내가 왜 이순신이죠? 148화
52. 제4원소 (1)
“부르셨습니까. 어르신.”
김자강이 인사했다.
그와 부족장들은 호출을 받은 즉시 출발했는지, 고작 나흘 만에 경성을 찾아왔다.
성실하고 충성스럽다.
아직까지는.
“근거지를 복원하고 주변 부족을 의식하시느라 부담스러우셨을 텐데. 감사하게도 서둘러 주셨군요.”
“다른 사람도 아닌 어르신께서 부르셨는데 잡다한 것들은 무시해야지요. 무려 세 번이나 저희들을 구원해주셨으니.”
맞는 말이다.
율호, 호령. 그리고 안 죽고 다시 찾아온 율호까지.
회령 여진족은 나에게 세 번이나 구원을 받았다. 죽으라면 죽는 척이라도 하는 게 예의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예의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괘씸하다고 지적이라도 하기에는, 도리어 적을 만들까 곤란하다. 적어도 김자강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행이었다.
다른 떨거지들과는 달리 김자강은 여진족에 걸쳐놓은 끈이니.
그걸 내가 스스로 쳐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곤란했다.
“먼 곳까지 서둘러 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안으로 듭시지요. 가볍게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눕시다.”
“그러지요.”
나는 관아 노복에게 술상을 부탁하고는 족장들을 대청으로 안내했다.
각자가 자리하자 상석 옆자리에 앉은 김자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급하시군요.”
“어르신 앞에서 결례를 범했다면 송구합니다. 하지만 말씀해주신대로, 본거지나 주변 상황이 좋지는 않으니까요. 혹 심각한 일은 아닐까 걱정이 들었습니다.”
역시 의식하는 건가.
대족장이라도 자신의 부족이 없다면 단지 간판만 족장일 뿐이다. 힘의 원천이 되는 부족을 두고 왔으니 걱정이 안 될 수는 없지.
나는 늘 보여주던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답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심각한 일이라면 심각한 일이겠지만, 부족에 위해가 갈 일은 없을 터이니.”
김자강의 부족은 그가 가진 힘의 원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내가 여진족 사회에 힘을 투사할 수 있는 끈이기도 했다.
그 끈이 끊긴다면 나 역시 곤란해진다.
위해가 가는 일이 발생한다면 내가 나서서 막을 터였다. 최근 돌아왔던 율호의 급습을 목숨 걸고 막아주었듯이.
“감사합니다.”
김자강이 감사를 표하자, 나는 가볍게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사람과 그대 사이인데.”
여진족 사회의 혼란함을 비교하자면 열도의 전국시대가 그나마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도 군주와 수하는 존재한다. 그들의 질서는 간단하다. 수하가 군주에게 의무를 다하면 군주는 수하의 영지를 보호한다.
따지자면 나와 김자강의 관계도 다를 바 없다.
그가 나에게 충성하는 한 나 역시 그를 보호할 터이니.
“아.”
때마침 술상들이 마련되었다.
관노들이 상을 하나하나 대청으로 옮기자, 바깥에 있던 사람들이 상을 받아 안쪽으로 옮겼다. 본론은 천천히 나눠도 된다.
족장들이야 급하겠지만.
별일은 없을 테고, 있을지라도 내가 가만히 구경하고만 있지는 않을 터이니.
“자. 한 잔들 하시지요.”
내가 술잔을 들자 족장들도 각자의 잔을 채워 들었다.
“이 사람과 그대들의 무궁한 번영을 위하여.”
“위하여!”
그렇게 첫 잔을 비우자, 족장 중 하나가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르신, 하나만 물어보아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시지요.”
“근래에 들어 소금의 수입량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래요?”
내가 가볍게 되묻자, 족장은 그것이 불편함으로 느껴졌는지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물론 어르신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저희들에게 소금은 무척이나 귀하고 반드시 필요한 물건입니다. 그런데 갈수록 수입량이 줄어들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흐음.”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내가 함경북도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다곤 하나 어디까지나 군사적인 방면에 한해서다. 수출입과 같은 행정적인 분야라면 이쪽이 아니라 함경도 관찰사를 찾아야 했다.
“이 사람은 함경북도의 병마절도사이지, 관찰사가 아닙니다. 직권으로 무역의 수출입 총량을 제한할 수는 없어요.”
“그렇습니까…….”
“그쪽으로 연락은 해보았습니까?”
“일전에 사람을 보내 의향을 물었는데 박대만 당했습니다. 관찰사는 얼굴도 보지 못했지요. 모두가 어르신처럼 여진족을 편견 없이 대하지는 않습니다.”
조선의 관리들은 대부분 여진족을 혐오하거나 증오했다.
배우지 못한 오랑캐들과는 달리 명나라의 중화를 잇는 문명대국 조선의 관리라는 선민의식도 있고, 여진족이 잊을 만하면 크고 작은 피해를 입히기도 하는 탓이다.
오히려 나 같은 경우가 별종이라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내가 특별한 이유는, 여진족까지 편견 없이 대해서가 아니라, 이용가치가 있다면 누구와도 어울릴 수 있기 때문일 뿐이다.
다른 여진족들과 달리 눈앞의 족장들은 내가 여진족 사회에 힘을 투사할 수 있는 창구였다.
‘하지만 소금인가…….’
족장이 강조했듯 여진족 사회에서 소금은 무척이나 중요한 교역품이었다.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염분이 필요한데 숲과 들판뿐인 여진족 영역에서는 소금을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괜히 밥에다 짐승의 생피를 말아, 피 속에 있는 최소한의 미네랄마저 섭취하려드는 게 아니다.
그나마 연해주 지역은 해안과 닿아 있어 염분을 접하기는 쉬우나, 추운 기후로 인해 효율적인 생산이 어렵기는 매한가지다.
게다가 연해주에 거주하는 여진족은 육진 일대에 거주하는 여진족과는 판이한 종족이다.
조선과 명나라의 국경 일대에는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이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문명국과 닿아 있어 그나마 사람 같이 사는데 반해, 멀리 떨어진 야인여진들은 야인(野人)이라는 이름 그대로 짐승과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사납고 야만적인지 같은 여진족마저 두려워하고 기피할 정도다. 이들과 교역을 해서 소금을 수급한다는 건 꿈같은 소리다.
괜히 이들이 조선의 무역에 기대는 게 아니다.
‘문제는 소금이 전략물자라는 거지.’
여진족 사회에서 소금은 곧 힘이다.
조선은 물론 명나라에서도 여진족을 상대로 한 소금 반출은 통제한다. 자칫 소금을 중심으로 여진족이 힘을 합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걸 뒤집으면…….
나 역시 여진족을 틀어잡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음.”
나는 가볍게 운을 뗐다.
“다른 일이라면 모르겠지만 대여진족 무역은 나라에서도 깊게 관여하는 일입니다. 이 사람이 주고 싶다고 해서, 그냥 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렇습니까…….”
족장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관찰사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해 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이겠지.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모두의 눈과 귀가 있는 이곳에서는 안 된다.
“겨울에 들어서면서 자연스레 소금이 귀해진 탓입니다. 날이 풀리면 수입량이 어느 정도 정상화될 터이니 너무 우려하지 마시길.”
“……예.”
소금 이야기는 여기까지.
영양가 있는 진정한 논의는 다음 기회에 사적으로 나누어야지.
나는 주제를 전환했다. 지금은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일단은 본론으로 돌아가지요.”
김자강을 바라보니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고작 술 몇 잔 마신다고 취했을 리는 없고, 세력 확장을 다시 용인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 같았다.
과거 김자강을 비롯한 족장들은 나의 지시를 받들어 전쟁을 일으켰으나 성과는 크지 않았다.
고작 군소부족 두엇을 복속시켰을 즈음 율호가 습격을 해 확장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방어는 성공적이었으니 율호의 습격 자체는 문제가 안 된다. 문제는 조선군이 나서서 김자강을 비롯한 회령 여진족들을 구원했다는 거다.
주변의 부족들에게 위화감을 주기에 충분한 상황이었고, 이 상태에서 확장을 계속 시도한다면 경쟁 부족들의 연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결국 김자강을 비롯한 회령 여진족은 마땅한 성과도 없이 확장을 포기해야 했다. 그동안 답답했겠지.
“그대들이 바라는 바를 내가 모르는 건 아닙니다. 충분히 의식하고 또 걱정하고 있지만, 미안하게도 이번에 그대들을 부른 이유는 그대들이 기대하는 지시를 전달하기 위함은 아닙니다.”
선을 긋고 들어서니 여러 족장들이 풀이 죽어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 사람과 그대들 사이이니 직설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전하께서 여진족들이 자발적으로 입조하여 예를 다하고 충성을 바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자 족장들이 다시 고개를 든다. 눈빛에는 우려와 걱정이 한가득 담긴 채였다.
조선의 왕이 있는 한양은 북방에서 굉장히 먼 곳이다. 입조를 한다면 부족은 장기간 족장이 부재중인 상태로 방치된다.
여진족 사회에서 집단을 유지하는 힘은 제도나 질서가 아니라 수장의 카리스마에 있었다. 그것이 오랜 시간 배제된다는 것은 건물에서 대들보를 빼는 짓과 같았다.
“갑자기 입조라니요?”
뭐, 나야 선조가 이번 승리로 배알이 꼴려서 자신도 면을 좀 세워보겠다는 전말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만.
김자강에게는 날벼락 같은 소리일 테지.
하지만 전말을 친절하게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대답 대신 의향을 물었다.
“어쩌시겠습니까.”
분명 나의 지시라면 잡다한 것은 무시해야 한다던 김자강이, 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멍청한 사람은 되지 못했다. 비록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났으나 김자강은 내가 원하던 대답을 내놓았다.
“가야지요.”
족장의 부재로 부족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면, 나를 적으로 돌리는 경우에는 확실하게 부족을 잃는다. 물론 목숨도.
지시에 따르지 않을 경우 손을 쓰겠다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나에게 필요한 사람은 지시를 맹목적으로 수행할 사람이지, 이것저것 재면서 따를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여차할 경우에는 족장들을 모두 없애고 바지사장을 세울 생각이었다. 회령에도 나와 면식이 두터운 여진족은 많았다.
그러니 김자강은 적절한 판단을 한 셈이었다. 하지만 어디에나 합리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자는 있었다.
“다른 분들 생각은 다르실 수도 있지요. 정 시급한 문제가 있다면 일정 정도는 충분히 조율해 드릴 수 있습니다.”
나의 말에 몇몇 사람들이 주변의 눈치를 봤다.
“물론 입조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분들도 있으실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한두 명 정도라면 제가 편의를 봐 드릴 수 있으니.”
“그럼…….”
족장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저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불안한 얼굴이었지만 그러면서도 할 말은 하고 있었다.
나는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고는 물었다.
“다른 분들은?”
“…….”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족장은 자신만 빠지겠다고 말한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다시 주변인의 눈치를 보았다. 마치 그쪽은 빠질 생각이 없냐는 듯.
나는 다시 물었다.
“일정을 조율하면 어지간한 사정은 문제가 없을 걸로 압니다만. 그럼에도 입조에 빠지시겠다니, 이 사람이나 다른 족장들을 믿지 못하는 것 같군요.”
“그, 그건 아닙니다.”
족장이 떨며 말했다.
분위기가 이상해진 것을 느꼈을까. 김자강을 비롯한 다른 족장들은 합이라도 맞춘 듯 고개를 숙였다.
혼란스러운 여진족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눈치다. 그게 없으면 설령 족장이라 하더라도 명을 유지하기 어렵다.
눈앞의 족장은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인 것 같았다.그것도 이제 끝이었지만.
“병마평사?”
나의 부드러운 부름에 대청 옆에 있는 방문이 열렸다.
병마평사 이원익이었다. 남들 가슴께에 겨우 미치는 그의 작달막한 체구 너머로, 중무장한 갑사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저 분이 입조는 내키지 않으신답니다.”
“처리하겠습니다.”
이원익은 단호하게 말하며 갑사들과 함께 대청으로 들어섰다.
그제야 파악이 된 것인지 입조를 거부한 족장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앞뜰에도 병사들이 나오기 시작했으니.
족장이 절규했다.
“사, 살려주십시오, 어르신!”
나는 대답 대신 이원익에게 손을 저었다.
빨리 치우라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