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47화
51. 유능한 정치인 (3)
동헌의 사랑방은 내가 떠났을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누가 내 방을 뒤지기라도 하겠느냐만, 다른 것도 아니라 비밀 서찰이 있다 보니 평소답지 않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다시 상자를 끌어내어 비단보를 걷어내니, 정체불명의 서찰은 이전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리고 내가 서찰을 확인하는 것을 막을 사람도 없었다.
“후!”
묵은 숨을 토해낸 뒤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최고급 종이를 썼는지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좋았지만 기분이 찝찝했다.
나는 서찰을 펼쳤다.
-이(李)는 들으라. 그대가 운하와 종계변무의 일로 거듭 공을 세우고, 또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북쪽의 오랑캐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니 일국을 경영하는 인군으로서는 이(李)의 존재가 마치 천군만마와 같다. 하지만 충성과 능력은 별개인지라 예로부터 반역자는 황위를 찬탈하기 전에 구석부터 받았으며, 공신으로 녹훈되어 인군과 맹약을 맺고도 종묘와 사직에 위해를 끼치다 일가가 패망한 자가 부지기수이다.
경고인가.
-이제 그대가 큰 공을 여럿 세워 훈공이 빛나고 영광이 천세에 이르게 되었지만, 인군이 부덕하여 마음 놓고 믿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이(李)와 같은 신하라도 마음 놓고 나를 믿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편지를 남기는 이유는 과인이 이(李)에게 진심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내용의 분위기가 달라졌군.
당근과 채찍인가.
앞에서는 내가 아무리 공을 세워도 옛 찬탈자나 권신들처럼 반역이나 불충을 일삼을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도 서로 믿지 못하는 현실을 강조하고 자신이 먼저 손을 내밀었음을 밝히고 있었다.
나를 회유할 생각이라면 나쁘지 않은 구성이다.
어지간한 사람은 첫 문단을 읽으면서 오금이 저렸을 터이니.
왕이 협력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제안한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겠지.
-국경의 여진족들이 아조에 입시하지 않은 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선대왕들께서는 그들의 자식들에게 재물을 하사하고 궁궐을 수비하는 위사로 삼았으나, 정작 장성하여 대를 이은 다음에는 아오의 은혜에 일말의 감사도 표하지 않으니, 실로 불충한 일이다. 이(李)는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서 그들에게 은밀히 명하여, 변방의 여러 번호(藩胡)들을 이끄는 족장들을 조정에 입시하게 하라.
나는 이마를 쓸어내렸다.
번호(藩胡) 족장들을 입시하게 하는 건 나에게 공식적으로 명할 수도 있었지만, 보아하니 선조는 그런 것은 원치 않는 듯했다.
대놓고 ‘은밀히 명하여’라고 하지 않았는가?
오라고 불러봐야 족장들은 까란 대로 깐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선조는 그런 작위적인 모습보다는 족장들이 자신의 ‘위대한 령도력’에 감화되어 제 발로 찾아와 다시금 충성을 맹세했다는 그림을 만들고 싶었겠지.
근데 그걸 나보고 그리라고 하고 있었다.
“제길.”
끊임없이 세력이 멸망하고 탄생하는 여진족 사회에서 족장이 장기간 부재해야 한다는 건,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과거에는 조선이 공격적인 모습을 자주 보였다. 변방의 여진족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사신을 보내 충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조선은 다르다. 변방에서의 분란은 최대한 지양하고 있었다.
이제 여진족들에게 위협이란 다른 여진족들뿐이었다. 눈치를 본다면 대상은 조선이 아니라 주변의 잠재적인 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을 도성으로 보내라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까라는 데 안 깔 수도 없고.”
비공식적인 명령이라도 명령은 명령이다. 이걸 거부하거나 실패했다간 비공식적으로 보복당하는 수가 있었다.
물론 왕이 일개 신하에게 비공식적으로 명령을 했다는 것 역시, 선조에게는 위험부담이다.
하지만 선조는 최근 나를 영입하려는 많은 신호를 보냈다. 견제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편으로 만들지 못해 안달이었다.
실로 미친놈다운 이중적인 행보였고 내가 이제 변방으로 쫓겨났으니 다시 자기편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더 커진 모양이었다.
진짜 미친놈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보아하니 나를 본격적으로 부려먹을 생각인가 본데.
당연하지만 이번 하나로 놈의 사적인 명령이 끝나지는 않을 거다.
지금은 외직을 지내고 있어 명령 역시 외직에 어울리는 것이지만, 조정으로 복귀한 다음에는 정계에 적극적으로 개입시킬 가능성이 높았다.
“……후.”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안 그래도 제삼당에 이어 회령 여진족까지. 관리할 놈들만 많아졌는데 이제는 왕까지 나를 귀찮게 하고 있었다.
그거야 과거에도 마찬가지였지만, 놈들은 내가 성장한 만큼 바라는 것도 많아졌다.
도대체 내가 어디까지 올라가야 내가 아닌 다른 놈들이 눈치를 보게 될지.
확실한 건 정이품 대신의 자리로는 한참은 부족하다는 거다.
* * *
당일 밤.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을 공공연히 한탄할 수도 없어, 사랑방에 주안상만 하나 덜렁 들이고서 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술이 들어가도 한숨은 줄어들지 않았다.
술이 부족한건가 싶어 평소답지 않게 숨이 뜨거워질 정도로 마셨건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세상은 여전히 빌어먹을 것이었고 주변 놈들은 나의 지위와 능력에 기대 어떻게든 이익을 보려는 거머리 새끼들이었다.
“으으, 빌어먹을.”
갑갑한 마음을 견딜 수 없어 방문을 밀어냈다.
시리도록 밝은 달밤 아래로 북방의 한기가 단숨에 몰아쳤다.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추워졌지만 깊은 곳의 답답함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제기랄.”
술도 소용이 없었다.
이러다간 협심증까지 오겠군.
선조도 숨 쉬듯이 가슴이 갑갑하다며 신하들에게 징징거리는데, 나도 놈의 기분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놈만 벼락 맞고 뒤진다면 놈의 갑갑함도 나의 갑갑함도 모두 치료될 텐데.
눈치는 더럽게 없어서 아직도 살아있는 선조였다.
‘하루 빨리 죽이고 싶구나…….’
나는 묵은 숨을 토해냈다.
이 상황을 궁극적으로 탈피하려면 역시 그 방법밖에 없었다. 물론 권철의 권유를 받아 조정에 다시 입성했을 때부터 조금은 각오한 일이었다.
하지만 선조는 내가 확실하게 자신을 죽이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그걸 놈은 알고 있을까?
“대감?”
여인의 목소리였다.
주변에서는 흔히 접할 수 없는 부드러운 고음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조금 익숙한 것이기도 했다.
“오셨습니까.”
“……예.”
방문 너머로 매화가 나타났다.
그녀는 내가 부임한 이래로 잊을만 하면 나타나 자신의 존재감을 피력했다.
그것이 나에 대한 호감을 드러내는 것임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부인 권씨는 차치하더라도 매화는 관기(官妓)라 내가 챙겨주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나는 정이품에 두 번이나 공신으로 녹권된 대신이다.
힘을 쓰자면 못 쓸 것도 없지.
하지만 임지의 관기를 빼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진다면 이미지건 입지건 크게 타격을 입을 터였다.
그러니 일부러라도 그녀를 외면하는 것이었다.
나는 딱딱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평소답지 않게 동헌까지 찾아오셔서.”
“빛이 있어 오게 되었습니다.”
“그대가 무슨 날벌레라도 된단 말입니까?”
내가 피식 웃자, 매화는 쓰게 웃었다.
“불의 빛을 말하는 게 아니옵니다.”
“그럼요?”
“소녀는 언제나 대감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생이 많으시군요. 기대는 항상 사람을 배신하는 법입니다. 기적을 바라지는 마세요. 이 사람이 그대에게 존대를 쓴다고는 하나, 그것이 사심이 있어서는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대감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존대를 써주시지요. 설령 소녀처럼 천한 관기라 할지라도…….”
“버릇입니다.”
짤막한 대답과 함께 적막이 가라앉았다. 혹독한 북방의 겨울이다. 풀벌레 소리도 없이 삭풍만이 귀곡성처럼 울 뿐이었다.
매화가 입을 연 것은 한참 뒤였다.
“어르신께서는 관기에 대해 얼마나 아십니까?”
“글쎄요. 지방관을 지내본 것도 이번이 두 번째고, 각기 판관과 겸직이라서.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만.”
“소녀는 아비도 어미도 모르고서 다른 기생들의 손에 길러졌습니다. 머리를 올린 다음에는 기적(妓籍, 기생 명부)에 올랐지요. 공허한 삶이었습니다. 부사께서 수청을 들라면 들어야 하고, 누군가를 접대하라면 접대해야 하고.”
“…….”
“어르신 같은 분은 처음이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없겠지요. 그러니 억지라는 것을 알면서도, 억지를 부릴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조용히 잔을 기울였다.
짧은 침묵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사람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소녀가 어찌 대감께…… 바라는 것이 있겠습니까.”
“하고 싶은 말은 다 하시고도 시치미를 떼실 생각이십니까? 그깟 억지 한 번 더 부려보시지요. 이 사람은 거나하게 취한지라 사소한 실수 정도는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그럼…….”
매화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청을 들게 해주십시오.”
“……음.”
나는 다시 잔을 기울였다. 고작 수청이나 들어서 어쩌겠단 말인가.
수청만 들면 무언가 달라지기라도 한단 말인가. 결국에는 하룻밤의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을.
하지만 이유를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무례한 행동이었다. 그것이 정 일평생의 소원이라면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다.
* * *
다음 날.
잠에서 깨니 침소에는 나뿐이었다.
얼굴과 입안을 헹군 뒤 옷을 갈아입고 관아로 나아가니, 평소답지 않게 경성판관 이준(李準)이 있었다.
“판관께서는 어인 일로?”
“사소한 일입니다만,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말씀하세요.”
“지난 밤 관기 중 하나가 사라졌습니다.”
매화인가.
“…….”
잠깐이었지만 그녀가 말한 관기의 삶은 공허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끈질긴 기다림과 간절한 부탁으로 자신의 소원을 이뤘다.
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수색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의미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렇습니까. 예. 적당히 덮어놓겠습니다.”
“부탁드리지요.”
이준은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물러났다.
나는 집무실을 찾았다.
아전들이 결재가 필요한 문서 몇 가지와 경성 내의 소식을 가져왔다. 별다른 일은 없었다. 하나하나 결재하고 있으니 병마평사 이원익이 찾아왔다.
“하명하신 대로 경성 일대의 주둔지에 대한 보고 사항입니다. 예상과는 달리 전반적으로 관리가 잘 된 편이었습니다.”
“그거 희소식이군요.”
“대감?”
“예.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하시지요.”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이원익을 바라보았다.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별고 없으십니까? 피곤해 보이셔서요.”
“나랏일 때문에.”
“……그렇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보다, 진행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하명하시지요.”
“회령 여진족들이 근자에 소란을 일으켰지요?”
“예. 조선에 입조를 하라는, 터무니없는 명분으로 다른 부족들을 공격했지요. 감히 대조선과 전하의 권위를 앞세워 사익을 챙기려 들다니.”
“함께 목숨 걸고 싸웠는데도 여전하시군요.”
“불충한 것들입니다.”
“율호를 처단할 때 큰 도움이 된 건 사실이지요. 물론, 병마평사에게 이 사람의 생각을 강요하려는 것은 아니고.”
나는 말을 이었다.
“그들의 명분이 진심인지, 혹은 불충한 자가 사익을 위해 사칭한 것인지 확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저들이 먼저 조정에 입조할 생각이 있는지 확인하면 됩니다.”
“과연!”
이원익의 얼굴이 밝아졌다. 근자의 혼란은 회령 여진족들이 벌인 것이고, 아직 긴장감이 채 가시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런 때 과연 족장의 자리를 공석으로 둔 채 입조하러 갈 수 있을까?
전쟁을 위해 거짓된 명분을 앞세운 것이라면 입조하지 못할 것이요, 명분이 진심이었다면 기꺼이 입조할 터였다.
“역시 금천부원군 대감이십니다. 실로 명안이로군요.”
“아닙니다. 그 치들의 생각을 듣고 싶으니 그곳 족장들을 불러오시지요. 진심을 확인해야겠습니다.”
“음, 의향을 물어보는 정도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혹 따를 생각이 없다면.”
“그러니 데려오라는 겁니다. 그래야 여차할 때 손을 쓰기가 쉽지요.”
나는 검지로 목을 그었다.
그들이 전쟁을 위해 거짓된 명분을 앞세워, 대조선과 전하의 권위를 손상시키고도 입조에 응하지 않는다면 실로 적도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아하…….”
이원익은 나의 치밀함에 감탄 반, 공포 반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들에게 방문하라고 전하겠습니다.”
“예.”
이원익은 인사를 올린 뒤 물러났다.
일거삼득이다.
선조 놈의 심부름도 하고, 회령 여진족의 충성심도 확인하고. 이원익의 그들을 향한 경계도 다소 꺾어놓을 수 있을 터이니.
나는 유능한 정치인이다.
어떤 난관과 사건을 마주하더라도…….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