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46화
51. 유능한 정치인 (2)
“어떠십니까?”
내가 묻자, 잔을 기울이던 선전관이 답했다.
“썩 괜찮군요. 북방은 척박하여 물산이 나지 않는다기에, 살짝이지만 걱정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우였군요.”
“사실 북쪽으로 더 올라가면 선전관께서 생각하시는 북방의 모습이 펼쳐집니다. 하지만 경성은 비교적 남쪽인 편이고, 해안을 맞닿아있어 기후도 온화한 편이고 물산에도 여유가 있지요.”
그래서 믿기지는 않겠지만 ‘산해진미(山海珍味)’라는 게 가능했다.
꼴에 수군도 있는 것이 함경북도이기에.
참고로 함경북도 수군절도사도 내가 겸직한다. 규모는 하삼도 수군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지만.
“회령의 이야기를 해주시지요. 소관은, 무인인 만만큼 금천부원군 대감께서 이뤄내신 무훈에 관심이 많습니다.”
“회령에서 어디 한두 번 싸웠어야죠. 언제의 일이 궁금하신 겁니까?”
“모두 궁금하지만 특히 최근의 전투가 궁금합니다. 사실, 도성에서도 대감의 움직임에 대한 해석이 분분합니다.”
나는 대답대신 잔을 기울였다.
역시나인가.
아마도 강을 넘어선 부분이 아닐까.
물론 조정으로 갈 보고에는 당위성 확보를 위한 약간의 곡해와, 판단의 합리화, 그에 걸맞는 결과물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려했던 부분이 바로 강을 넘어선 것이다.
아무리 포장을 하더라도 과잉대응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했기에. 하지만 이런 내막을 친절하게 밝힐 수는 없었다.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물었다.
“무슨 움직임에 대해서요?”
“강을 넘어선 다음 여진족 마을에 주둔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요.”
“그런데 여진족들과 함께 힘을 합쳐 적과 맞서 싸웠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리 번호(藩胡)라지만 본디 야만적이고 음험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 바로 여진족 아닙니까?”
“…….”
“그런데 어떻게 그들을 믿으셨습니까?”
이야.
이런 곳을 찌르다니.
나는 완전히 다른 곳을 짚고 있었던 셈이다.
물론 그런 쪽으로도 의문을 느낄 수는 있다. 조선의 관리들이 가진 여진족과 왜구에 대한 인식은 무척이나 뻔했다.
그들과의 협력이라는 건 적과의 동침. 오월동주(吳越同舟).
현장의 사람이라면 때로는 타협이 필요하다는 것도 인정하겠지만, 조정의 고지식한 늙은이들과 책상물림으로 가진 게 새파란 혈기뿐인 젊은이들에게는 불순하게만 느껴졌을 거다.
그래도 소득이 없지는 않군.
조정이 어느 부분을 의식하는지 알았으니.
‘어떻게 설명한다?’
여진족을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답한다면, 명확한 설명이 되겠지만 세간과 조정이 바라는 답은 그게 아니다.
물론 회령 여진족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명에 이어 여진까지 선을 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선조가 나를 회 뜨려 할 테니.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내가 운을 떼자 선전관이 눈을 빛냈다.
“강압적으로 진행된 감도 없잖아 있습니다. 하지만 적은 우세요 우군은 열세인데, 전장에 유용한 지형지물이 있고 합류시킬 수 있는 병력이 있는데 어떻게 방치할 수 있겠습니까.”
“위험하지 않습니까?”
“통상적으로는 그렇지요. 하지만 번호(藩胡)들이 아조에 충성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생존을 위해서겠지요.”
“맞습니다. 협조하지 않거나 배반을 획책할 수는 있겠지만, 그들의 영역은 아조의 영역에 닿아있고 그걸 떠서 어딘가로 옮기지 않는 한 끝까지 아조의 눈치를 봐야 합니다.”
“그래서 믿고 쓰셨군요.”
“예.”
“호오…….”
선전관은 입이 싼 사람이다. 물어보지 않았음에도 조정의 이야기를 곁들이거나, 대놓고 나에게 궁금한 점을 물어본다든지.
아마 도성으로 돌아가면 나를 대신해 사람들의 의문을 해소해줄 터였다.
그 점에서는 쓸만한 녀석이었다.
“소관이라면 여진족들이 혹 배신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다 시기를 놓쳤을 겁니다. 역시 두 번이나 공신을 하신 분은 다르군요.”
“절박하면 수는 어떻게든 생기기 마련이라지요. 적절하게 환경을 이용했을 뿐입니다.”
“대감께서 개발하진 조총도 위력이 대단하다 들었습니다. 적장이 입고 있었던 갑옷을 완전히 관통했다던데, 직접 보고 싶었지만 소관에게는 기회가 없어서.”
나는 조총의 위력을 증명하기 위해 율호가 입고 있었던 갑주 역시 전리품 명목으로 조정에 바쳤다.
두터운 쇠판에 구멍이 두 개나 뽕뽕 뚫렸는데 그게 어떤 무기의 작품인지는 뻔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실전이 없어 외면받고 있었던 조총에 대한 인식을 바꿔주리라 믿었다.
보아하니 효과가 아주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예. 이렇게 말해봐야 스스로 금칠하는 것 이외로는 들리지 않겠지만, 조총은 뛰어난 무기입니다. 아무리 두터운 갑주라도 관통해 버리고 마니.”
“흐음…….”
선전관은 복잡한 감정 섞인 얼굴로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더니 술 한 잔을 기울이고는 말했다.
“무서운 무기라고 생각합니다.”
“왜요, 무인의 입지가 줄어들 것 같아 그렇습니까?”
“그건…….”
선전관은 찔린 듯 주저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전근대 전장에서 장수가 활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냉정하게 말하면 조총과 같은 무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재수 없이 유시(流矢)가 적중하여 죽는 경우 등을 제외하면 장수들은 두터운 갑주로 무장하여 일신의 무용을 아낌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
설령 적의 칼이나 창끝이 몸을 스치더라도, 화살에 맞더라도 갑주가 막아주니 다소 무용을 뽐내더라도 무방하다.
하지만 총 앞에서는?
패왕 항우건 만인지적 관우건 콩알 한 방이면 저승으로 가는 수가 있었다.
“일신의 무용이 전장을 지배하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으음…….”
선전관이 쓰게 침음했다.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서 하는 말입니다만, 이건 선언이 아니라 고지에요.”
“그게……, 무슨 차이입니까?”
“이 사람이 설령 조총을 개발하지 않았어도 무용의 시대는 끝났을 겁니다. 그러니 알려드리는 차원에서의 고지인 것이지요.”
친절하게 알려주었거늘 선전관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하기야 폐쇄적인 조선의 관리가, 서양과 열도에서는 이미 조총이 범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겠나.
“적응하셔야 할 겁니다. 적들 역시 위협적인 무기로 무장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니.”
“……여진족이 말입니까?”
“아니요, 하하. 그랬더라면 아주 끔찍했겠지요. 이 사람이 말한 적은 고작 여진족 따위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혹시……, 명나라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딴에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보는 선전관이었다.
명나라라니.
물론 조선의 전형적인 관리인 그에게 조선보다 뛰어나며, 그래서 위협이 될 수 있는 국가는 오직 명나라뿐이다.
미개하고 야만적인 오랑캐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지.
괜히 조선이 임란왜란 당시 파죽지세로 밀려난 게 아니다. 조선은 망국을 당면하고서도 도통 진지해지 못했고, 당쟁이나 일삼다 한양이 함락당한 뒤에야 뒤늦게 사태를 파악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선전관도 그런 흐름에 조금은 일조했겠지.
나는 씁쓸하게 웃고는 답했다.
“명나라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나의 대답에 선전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명나라가 아니면 어디를 말하는 것이냐는 듯.
은근한 추궁에 나는 손을 내저었다.
친절하게 알려주더라도 의미는 없을 터이니.
당장 입증할 수도 없는데 왜인들이 얼마나 발전했으며 머지않아 조선을 대규모로 침공할 것을 알려주더라도, 전형적인 이 시대 사람인 선전관에게는 편집증 환자의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 사람만 너무 성실하게 답변한 것 같군요. 부디 선전관께서도 이 사람의 호기심에 응해주셨으면 합니다.”
“아, 송구했습니다.”
선전관은 민망했는지 얼굴을 붉히고는 말을 이었다.
“물론 금천부원군 대감께서 궁금하신 바가 있으시다면 제가 성실히 답해드려야지요.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근래에 조정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음.”
선전관은 짧게 수염이 난 턱을 매만졌다. 그는 회상이라도 하는지 잠시 고민하더니, 오래지 않아 입을 열었다.
“특별한 것은 느끼지 못했습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지요.”
“그래요?”
“물론 금천부원군께서 거두신 승리로 인해 약간의 고양감은 있습니다. 뭐, 버러지 같은 북적(北狄)들이 아무리 거세게 준동하더라도 아조의 변경을 노릴 수는 없다고 말이지요.”
“하하.”
나는 작게 웃고는 말았다.
별다른 이상은 없는 건가.
‘음.’
선전관이 하급 무관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도 감안은 해야겠지.
조정이 호들갑이라도 떤다면 누구나 알 수 있겠지만, 암중모략이 벌어지고 있다면 고작 선전관 따위가 알 수는 없다.
게다가 나에게 전해진 정체불명의 서찰.
선조가 주인일 가능성이 높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누가 서찰의 주인이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단지 일이 노골적으로 벌어지지만 않았을 뿐. 희소식이라면 희소식이다.’
내가 가장 걱정했던 경우가, 바로 내가 도성을 비울 동안 왕이 공공연히 성토대회를 여는 경우였다.
신하들은 기본적으로 왕의 의사에 부응해야 한다. 선조가 노골적으로 특정한 흐름을 유도한다면, 대다수는 따르게 될 터였다.
하지만 선전관의 반응을 보아하니 아직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단지 서찰만 왔을 뿐.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혹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어느 쪽이건 곤혹스럽군.
“대신들의 직책 변경은 없었습니까? 안동부원군은 여전히 영의정을 지내고 계시고요?”
“예. 금천부원군께서 떠나신 이래로 작은 변화들은 많았습니다만, 대신들의 직책은 딱히 변하지 않았습니다. 안동부원군은 여전히 영의정을 지내는 중이시고요.”
“그렇습니까.”
동서 양당이 조정을 반분하고 있다고는 하나, 각자의 세력이 큰 만큼 내부에도 세력은 있기 마련이다.
제삼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서인으로 위장하였으나 팔은 어디서든 안으로 굽기 마련. 자연스레 제삼당 그대로 서인 내에서 세력을 형성했다.
마치 기업이 다른 기업과 경쟁하면서도, 기업을 구성하는 내부의 라인들도 다른 라인과 경쟁하듯 제삼당 역시 서인의 다른 주축들과 경쟁하고 있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제삼당이 서인을 탈피해 자립하기도 전에 내부 경쟁에서 도태되는 것.
선전관의 말을 들어보니 다행스럽게도 도태나 숙청의 조짐은 없었다.
“처조부께서 잘 지내고 계시다니 다행이로군요. 도성에 삭풍이 불면 경관(京官)들도 불안하겠지만 외관(外官, 지방관)들은 더 불안합니다.”
“금천부원군 대감이시라면, 조정에 아무리 삭풍이 불더라도 무방하지 않겠습니까? 두 번이나 일등공신 제일인에 녹훈되시고 명에서도 관직을 얻으셨으니.”
“하하하. 이 사람은 그렇지만 이 사람이 아는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잖습니까.”
누군가를 숙청하는 방법은 비단 물리적으로 제거하거나 실권을 박탈하는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수족을 적절히 쳐내기만 해도, 말로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신이 하루아침에 뒷방 늙은이로 전락하는 수가 있다.
그건 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먼 곳까지 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지요. 쉬셔야 하는데 이 사람이 괜히 억지로 자리를 마련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소관은 괜찮습니다. 이미 피로는 다 풀렸습니다.”
“하하하. 예의상 하는 말씀으로 알겠습니다. 이만 쉬시죠. 자리는 언제든지 다시 마련할 수 있으니.”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선전관 역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감사를 표했다.
“알겠습니다. 소관은 객사로 돌아가서 쉬겠습니다. 금천부원군 대감께서도 편히 쉬시기를.”
“예. 오후에 봅시다.”
나는 선전관을 객사로 안내한 뒤 발을 돌렸다.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정체불명의 서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