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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45화 (145/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45화

51. 유능한 정치인 (1)

회령에서 ‘또’ 전투를 치르고서 삼 주가 지났다.

슬슬 겨울이 되어서인지 경성에서는 함박눈이 끊임없이 내렸다.

우중충한 하늘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북하게 내리니, 괜히 눈을 보고 하얀 똥이라고 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눈 치우는 고생을 내가 하는 건 아니어서, 나는 방문까지 열어둔 채 눈앞이 풍광을 배경 삼아 집무를 보고 있었다.

“대감.”

이원익의 목소리였다.

“병마평사입니까.”

“예.”

대답과 함께 과연 문 앞에 등장하는 이원익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조정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그래요? 바로 나가도록 하지요.”

서안에 펼쳐둔 책 가운데 문진(文鎭)을 놓아두고 일어났다. 오래 앉아서인가. 다리가 찌뿌둥했다.

거하게 기지개를 켜고 나서니 마침 뜰에 손님들이 와 있었다. 추운 북방의 겨울임에도 손님들은 원색의 철릭만 늘어뜨린 채였다.

특유의 화려한 복색은 그들의 신분을 가늠하게 해주었다.

선전관!

“금천부원군 대감.”

선전관을 비롯해 호위 병사들이 꾸벅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먼 곳까지 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듣던 대로 친절하시군요.”

“버릇이라.”

“성품이시겠지요. 소관들은 대감의 겸양을 받을 신분도, 자질도 못 됩니다.”

마다하면서도 짙은 미소를 품은 선전관이었다. 그는 인사는 이만하면 되었다 싶었는지 품속에서 권자 하나를 꺼냈다.

“교지입니다.”

“알겠습니다.”

왕의 명령이 적힌 교지는, 곧 왕의 뜻. 내가 정이품 대신이 되었어도 무릎을 꿇어 예를 표해야 했다.

이에 선전관은 교지를 펼쳐 낭독했다.

“금천부원군 이(李)는 들으라. 그대는 변방의 사소한 혼란에도 방심하지 않고 경계하여, 끝내는 변경을 위협하던 적호(賊胡)의 일군을 패퇴시키고 적장과 무수히 많은 수급을 거두어 진헌(進獻)하였다. 예로부터 공을 세운 신하는 충분히 포상하여 뭇 제신과 백성들의 표상으로 삼았으니,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금천부원군 이순신에게 아청사단령(鴉靑紗團領) 1령, 연청라철릭(軟靑羅帖衰) 1령, 특별한 활 1장과 화살 30발을 하사한다.”

낭독이 끝나자 선전관은 교지를 말아 건넸다.

“경하드립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이렇게 치하를 해주시니 망극할 뿐이지요.”

선전관이 뒤쪽으로 턱짓하자 공노비로 보이는 일꾼이 화려하게 치장된 상자를 진 채 나타났다.

나는 이원익에게 부탁해 동헌에 옮겨두도록 했다.

‘하사품이라, 나쁜 신호는 아니지만 조정의 분위기가 어떤지 모르겠군.’

분명 승리는 거두었으나 냉정하게 말하자면 나는 군대를 이끌고 강을 넘었다. 영토로 진입한 적을 격파한 것이라면 문제 될 게 없지만, 나가서 싸웠으니 곡해될 여지가 많았다.

예를 들자면 공을 세우고자 무리해서 강을 넘은 게 아니냐던가.

물론 나 같은 사람을 상대로 긁어 부스럼을 내기에는 위험부담이 크다. 특히 특정 당파에 소속된 자가 그런 식으로 시비라도 붙었다가 반대편에 붙는다면 큰일이니까.

하지만 모두가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압도적인 지위와 존재감은 적을 만들기 쉽다.

게다가 선조 역시 내심 나를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을 터이니. 차라리 나를 희생시켜 왕의 후의라도 입어보려는 놈이 있을지도 모르지.

‘도성으로 사람을 보내봐야 하나.’

워낙 도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 분위기를 알 수 있어야지.

선조가 나를 경계하는 지금, 앞으로는 이렇게 공을 치하하면서도 뒤에서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어찌 알겠나.

거기에 신하들이 동조라도 한다면 위험하다.

‘일단은…….’

다행스러운 점은 마침 코앞에 도성에서 온 사람이 있다는 거지.

“객사에서 짐을 푸시지요. 먼 길 오셨으니 자리부터 마련하겠습니다. ……부담되지만 않으신다면요.”

“아닙니다!”

선전관은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답했다.

“대감께서 친히 마련해주시는데 어찌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그래요? 감사하군요.”

“소관이야말로 감사합니다. 짐부터 정리하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예.”

나는 이원익에게 안내를 맡기고는 돌아섰다.

만족스러운 대화였다.

정보를 접하는 방법은 일대일로 면전에서 정보 자체를 듣는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선전관은 나의 권유에 기뻐하며 응했다.

도성에서 위험한 분위기가 풍기고 있다면 그런 반응이 나오지는 않겠지. 최대한 거리를 두려고 했을 거다.

‘일단은 안심인가.’

나는 보다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뜰을 가로질렀다.

향한 곳은 관아가 아닌, 뒤편에 붙은 동헌.

본래 지방관과 그의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이지만 나는 단신으로 부임했다. 그래서인지 주변은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덕분에 눈치 보지 않고 왕에게 하사받은 예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의 보자기로 싸여 있어 예상하지 못했지만 상자가 두 개였다. 하나는 의복인 아청사단령과 연청라철릭이 고이 들어가 있었다.

단령은 쉽게 말해 관복이다. 그중에서도 아청사는 의례가 있을 때 입는 양식이다.

철릭은 그냥 철릭. 이 시대에서는 군복도 겸하는 외투다. 색상은 나의 취미를 반영이라도 했는지 하늘색(軟靑).

다른 상자에는 하사받은 무구가 있었다.

‘특별한 활과 화살이라더니……!’

무려 흑궁과 흑시(黑矢)였다.

일반적인 궁시에 비해 다른 것이라곤 색상뿐이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서 색상의 의미는 크다.

옻칠로 보강한 여타 활도 다 검은색이니 흑궁은 그렇다 쳐도 소모품인 화살까지 검은색으로 염색한 것은 상징이 크다.

특히 이 둘을 한꺼번에 일컬어 노궁노시(盧弓盧矢)라 해서…… 천자가 큰 공을 세운 제후에게 하사하는 대표적인 품목이다.

과연 노궁노시는 황위 찬탈의 전 단계로도 일컬어지는 구석(九錫)에도 동궁(彤弓, 붉은 활), 동시(彤矢)와 함께 포함되어 있다.

“…….”

선조가 생각 없이 보낸 건 아닐 테지.

그가 최근 나에게 호감을 내비쳤다곤 하나 어디까지나 동서 양 당을 견제할 수 있는 패로서 포섭하기 위함일 뿐.

진심으로 나에게 호감이 있는 건 아니었다.

흑궁과 흑시 역시 포섭의 일환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비단 그 생각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제기랄.

이게 나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게 아니어야 할 텐데.

목표가 생기고 잃을 것도 많아지다 보니 자연스레 겁이 늘었다. 어쩌겠나. 내가 단순무식한 사람이 못 되는 것을.

‘다른 단서가 있지는 않을까?’

선조가 그렇게 친절한 인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어쨌거나 한 번 확인한다고 해서 밑질 것은 없다.

나는 하사 받은 옷과 궁시를 따로 치우고 붉게 물들인 비단 받침을 들어냈다.

그러자.

“…….”

과연 아래쪽에 서찰이 하나 깔려 있었다.

새하얀 한지 아래로 검게 칠한 글자들이 흐릿하게 보였다. 마치 내가 찾아내기를 기다렸다는 듯. 썩 기분 좋은 감정은 아니었다.

선조는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단 말인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는 그 순간.

“대감?”

방문 너머에서 이원익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서찰 위에 다시 비단을 깐 뒤 뚜껑을 덮어 숨겼다. 그리고 상자와 하사품을 구석으로 치워두었다.

누가 내 사랑방에 함부로 들어오겠냐만 이 정도는 해둬야 할 것 같았다.

“바쁘십니까?”

“아니에요. 무슨 일입니까?”

“자리가 거의 마련되었습니다.”

“알겠습니다. 손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요.”

나는 얼굴을 쓸어내린 뒤 의복을 고치고 사랑방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니 이원익은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조심스럽게 아뢨다.

“대감.”

“말씀하세요.”

“다름이 아니옵고……. 소관의 역할은 병마평사가 아닙니까?”

“그렇지요.”

“직제를 따지자면 감영이 아니라 병영에서 일하는 게 옳지 않나 싶어서 말입니다, 하핫…….”

평소답지 않게 어설픈 웃음까지 흘리는 이원익이었다.

바짝 긴장하고 있던 나는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우리 병마평사께서 쉬고 싶으신가 보군요.”

“그, 그것은 아니옵고.”

“아시겠지만 이 사람의 본 관직은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요.”

“알고 있습니다.”

“경성부사라는 것은 겸직일 뿐이지요. 물론 나름의 역할은 수행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역할일 뿐이에요.”

“……예에.”

“경성판관이 이 사람을 대신해 고생하는 바가 큽니다. 일상적인 업무는 거의 판관이 전담하고 있으니. 그리고 병영에는 병마우후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병마평사라는 애매한 관직을 가진 이원익이 계속 똘마니로 고생해 달라는 뜻이었다.

을룡도 잡무는 도와주고 있지만 공식적인 업무를 직품도 없는 그가 수행할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원익은 유능한 부하였다. 창의력은 없지만 까라면 까는 사람이다. 오랫동안 함께 일해와서 결과물을 나의 입맛대로 가공해 보고하는 배려심도 있었다.

“……끄응.”

“아마 이 사람만 치하를 받아서 배가 아픈가 본데.”

“그, 그건 아닙니다!”

기겁하며 부인하는 이원익이었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영향이 없지는 않았을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조용히 일 해오다가 오늘 갑자기 투정을 부릴 다른 이유가 있겠는가.

정작 전장에도 군말 없이 따라왔는데 말이다.

“이제야 조정에서 치하가 있었는데 어찌 이 사람이 먼저 평사의 공을 치하할 수 있겠습니까. 조만간 이 사람의 권한 안에서 충분히 평사의 노고를 치하할 테니, 손님이나 맞으러 갑시다.”

“예, 예에!”

단숨에 얼굴이 밝아지는 이원익이었다. 역시 왕의 치하에서 나만 언급되어 배가 아팠나 보다.

딴에는 왕의 눈에 들어 출세하고 싶나 본데…….

왕의 관심, 내가 넘겨줄 수 있었다면 골백번이고 줬을 거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게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 내 심정을 이원익에게 친절하게 알려주더라도, 그는 배부른 사람의 한탄으로만 들리겠지.

능력은 있으니 지금보다 더 높은 관직으로 올라갈 수는 있을 거다. 부디 그때 선조에게 마음껏 당하고 지금의 철없는 자신을 반성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관아 뜰로 돌아오니 선전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감.”

선선하게 웃는 낯을 보아하니 자신이 가져온 하사품의 내막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거기에 왕의 친서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기라도 한다면 기겁하겠군.

이놈이고 저놈이고 그저 태평할 뿐이요, 사태 심각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늦어서 송구했습니다. 잠시 휴식을 취한다는게 그만 길어졌군요.”

“아닙니다.”

“대청으로 듭시죠. 날이 춥지만 안쪽은 바람이 들지 않아 그런대로 따뜻합니다.”

“예.”

선전관이 먼저 안쪽에 자리하자, 나는 이원익에게 말했다.

“병마평사도 선전관과 대화를 나누고 싶겠지만 지금은 맡길 일이 있어서요. 추후에 자리를 마련할 터이니 지금은 그것으로 만족하셨으면 좋겠군요.”

“아닙니다. 하명하시지요.”

“주을온, 오촌, 어유간, 폐무산, 봉산의 주둔지를 방문해서 각 군영의 비축물자 상태를 직접 확인해주셨으면 합니다. 진즉 살폈어야 했지만, 회령의 전투로 미뤄지고 있었습니다.”

“알겠습니다.”

이원익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러났다.

그에게는 조금 미안하군.

병마우후 정승복이 관리 부실을 이유로 장을 맞았으니, 그가 나의 뜻에 동감하건 혹은 혼자 맞은 것이 억울해서건 일대 주둔지는 이미 관리했을 터다.

설령 그가 나서지 않았더라도, 주둔지의 갑사나 만호들이 눈치 밥 말아먹은 멍청이가 아닌 이상에야 상관이 개작살이 났는데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았겠지.

그러니 솔직하게 말하면 이건 이원익을 멀리 보내는 것 외에는 의미가 없다.

하지만 나는 선전관에게 도성의 분위기와 그간의 정보를 집요하게 캐낼 예정이었다. 혹 방해라도 될 수 있는 구경꾼은 곁에 둘 수 없었다.

“그럼.”

나는 선전관이 자리한 대청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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