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44화
50. 사냥꾼과 사냥감 (3)
-타당! 타다당!
산발적인 총성과 함께 전마(戰馬)의 비명이 전장을 울렸다.
긴장감은 여전했으나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적들의 기세는 꺾였다. 돌격이 저지됐을 때부터 성패는 사실상 결정되어 있었다.
놈들은 주변을 돌며 끊임없이 견제사를 날려댔으나 위협 이상은 되지 못했다.
조총수들이 부족민들의 견제사 사이로 치명적인 탄환을 쏟아내니 적지만 확실하게, 적들에게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다.
결국.
“놈들이 도망친다!”
누군가 외쳤다.
과연 그 말대로, 흩어지는 총연 너머로 기수들의 형체가 흩어지고 있었다.
시작은 고작 한두 놈이었겠으나 이미 전의를 잃어버린 적들이다. 수많은 기수들이 뒤이어 말머리를 돌려 멀어졌다.
그게 대세가 되어버리니 그나마 남아서 싸우던 녀석들도 결국에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귓전을 때리던 화살의 위협적인 뱀 소리도, 지축을 울리던 말발굽 소리도 멎었다.
빈 공간을 아군의 환호성이 채웠다.
“와아아아!”
“와아아!”
“이겼다!”
승리를 선언한 사람도 없건만 병사들은 앞다투어 환호했다. 죽다 살아난 기쁨이다. 혈전도 없었다. 이 정도면 일방적인 승리다.
나는 주먹을 들고 외쳤다.
“우리가 이겼다!”
“와아아아!”
나의 공언에 환호성은 한 층 더 커졌다.
전투는 끝났다.
“대감, 대승입니다!”
병마평사 이원익이 곁에서 외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병사의 역할은 승리와 함께 끝났을지언정 지휘관의 역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원익에게 말했다.
“부대 지휘관들에게 일러 전상자들을 파악하고, 확인된 부상자들은 가옥으로 피신시키세요. 응급처치에 조예가 있는 자들을 파악해 환자들 치료에 동원하고, 갑사들은…….”
나는 주변을 살폈다.
갑사와 토병을 가리지 않고, 모든 병사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름살로 갈라진 얼굴마다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당초 계획은 적이 패주하면 갑사들이 말에 타서 추적하는 것이었으나.
아군은 지쳤고 적은 전원 기병이었다.
무리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아닙니다. 최소한의 경계만 남기고 다들 쉬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이원익은 대답만 했을 뿐, 아직 지시를 전달하지 않았으나 병사들은 앞다투어 주저앉아 휴식을 청했다.
자리가 넓은 안쪽으로 찾아와 벌러덩 드러눕는 자들도 즐비했다.
군율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지만 다들 목숨을 걸고 싸워 값진 승리를 얻어냈다. 너무 가혹할 필요는 없겠지.
명령을 하달받은 일선 지휘관들은 부대원을 찾아다니며 전상자를 확인했다.
그동안 나는 소수을 병력을 대동하고서 전장 외부를 살폈다.
“아직 살아있는 놈들이 제법 있습니다.”
이원익이 우려 섞인 목소리로 보고했다.
과연 전장에는 즐비한 시체 사이사이로 명이 아직 다하지 않은 적이 많았다. 당장 코앞에도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이끌고 어기적거리며 도망치는 자가 있었으니.
물론 얼마 가지 못하고 군관에게 딱 사로잡혔다.
그 한심한 모습을 보곤 이원익이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투항 의사를 물어 협조하는 자는 확보하세요.”
“대감께 맞선 자들입니다. 모두 죽어 마땅하니, 전부 베고 수급을 거두시지요.”
“하하하…….”
내게 맞섰다고 죽여야 한다면, 지금 도성에도 죽여야 할 놈이 하나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웃음을 거두고는 답했다.
“항복한 사람을 무작정 죽여서야 되겠습니까.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고, 또 투항한 자들이 있어야 적의 신원을 확인하고 이번 전투의 배후를 알아낼 수 있지요.”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리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과연 누가 이번 습격을 주도했는지, 배후에 다른 세력이 있지는 않은지 알아내야 했다.
또, 적의 지휘관이 전장에 남아 있다면 응당 수급을 거두거나 신병을 확보해 조정으로 보내야 했다.
성과를 자랑하기 좋아하는 선조이니 차분히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긴 다음 알아서 처분하겠지.
그렇게 뭐라도 하나 물려줘야 나에 대한 견제를 덜하지 않겠나.
“그렇군요.”
“죽은 전마는 도축하세요. 맛은 없겠지만 고기만으로 배를 채우는 호사라면 병사들에게 충분히 위로가 되어줄 겁니다.”
“예.”
이원익은 주변 군관들에게 명령을 전했고 동행한 여진족 족장은 앞장서서 생존자를 가려내고 투항 의사를 확인했다.
몇 번의 칼질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순순히 항복했다.
개중에는 몸이 성한 자들도 있었다.
큰 상처는 없었으나 말을 잃어, 도망치지 못해 죽은 척하며 숨은 부류였다.
그런 놈들은 끌려다니며 적의 신원을 확인해야 했다.
“저 자입니다!”
포로 중 하나가 외쳤다.
그는 즐비한 아군의 시체를 거듭 넘어 자신이 가리킨 자를 찾았다. 다가가니 제법 기품있게 차려입은 자의 시신이 나타났다.
미동은 없었다.
만일을 대비해 환도로 목을 살짝 찔러보니 식은 피가 조금 묻어나오다 말았다. 이미 명을 다한 상태였다.
나는 직접 무릎을 꿇어 적의 상태를 확인했다.
매끄러운 최고급 털옷. 보석을 꿰어 만든 장식. 드러나는 외상은 없었다. 겉옷을 젖히니 탁한 색상의 철판 갑옷의 드러났다.
배 부근에 구멍이 두 개 뻥 뚫려 있었다. 더 볼 것도 없이 조총이 만들어낸 흔적이었다.
눈은 반개한 채였고 죽은 말의 등에 기댄 채였다. 자세를 보아 총상이나 낙마로 즉사하지는 않았으나 부상과 쇼크로 죽은 모양이었다.
시선의 끝은 조선군이 주둔한 마을을 향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여진족 시체가 가득했다.
분명 자신의 부대가 괴멸당하는 광경을 죽기 직전까지 봐야 했겠지. 얼굴에는 고통이 묻어나지 않았으나 편한 죽음은 아니다.
“이 놈이 대장 맞겠군. 이름은 뭐지?”
“율호라는 자입니다.”
포로가 답했다.
“율호?”
의외로군.
“율호라면 내가 판관으로 있을 때 볼하진을 습격한 놈이 아닌가?”
“……맞습니다.”
“기왕 몸을 빼내 살아남았다면 호승심 부리지 말고 조용히 살아갈 것이지. 꼴에 복수라도 하고 싶었나 보군.”
포로가 힘없이 끄억였다.
놈도 이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사실 수많은 전사들이 어르신…… 과 조선군이 주둔한 모습을 보고 전투를 꺼렸습니다. 하지만 율호가 먼저 돌격하는 바람에.”
“그래, 배후에 다른 놈은 없나?”
“없습니다.
“본거지는?”
“이곳에서 200리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하지만 주변에 적이 많았던 데다 주력을 모두 이끌고 와서…….”
“버려진 건가.”
“근래에 복속되어 마지못해 충성하고 있던 자들입니다. 율호가 떠나려 할 때 그도, 부족민들도 서로 미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무리한 건가 싶기도 하고.
적장도 확보했겠다 이만하면 고생은 충분히 했다. 말단 병사들마저 쉬는데 나도 좀 쉬어야지 않겠는가.
나는 이원익에게 명했다.
“수급은 챙겨두세요. 전하께 보내드려야 하니. 그리고 송구하지만 이 사람은 이만 쉬러 가야겠습니다. 수색은 마저 부탁드리지요.”
“예. 노고 많으셨습니다. 먼저 쉬십시오.”
이원익을 포함해 여러 사람들이 꾸벅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나 역시 작게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바로 휴식을 취하지는 못했다. 거처를 알아보는 와중에 우군들이 도착했다.
회령부사 신일과 회령 여진족 주력을 이끌고 나갔던 김자강이었다.
“대, 대감…….”
먼저 온 쪽은 신일이었다.
어영부영 하다가 늦으면 군법으로 처벌하겠다는 엄포를 들은 상태라, 잔뜩 겁을 집어먹은 표정이었다.
“조금 늦으셨군요.”
“소, 송구하옵니다.”
“일부러 늦은 건 아니겠지요.”
“아니옵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든 아랫놈들을 닦달해 최대한 빨리 출발했습니다!”
거짓말은 아닐 거다.
여진족 마을에 주둔하고서 최소한의 방비만 갖추기 무섭게 바로 교전이 벌어졌으니. 또 습격을 패퇴한 게 전부라 전투 시간도 길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늦었다는 사실만큼은 명백했다.
내가 따로 치죄하지는 않겠지만 조정에 올라갈 장계는 사실 그대로 쓰일 거다.
“전투를 치른 병사들이 지금 경계를 서느라 쉬지 못하고 있는데, 마침 잘 오셨습니다. 이제는 부사와 회령부에서 보초를 서주시지요.”
“예, 물론입니다!”
신일은 벌을 받지 않았다는데 안도했는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도망치듯 물러났다.
다음은 김자강이었다. 다른 부족장들과 함께였다.
“폐를 끼쳤습니다, 어르신.”
“덕분에 몸을 풀 수 있었습니다.”
“낙마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말이 화살을 맞는 바람에요.”
“괜찮으신 겁니까?”
나는 끌려다녔던 팔을 들어 보였다. 감각은 돌아온 지 오래였다. 여전히 뻐근해서 문제지.
“병신 신세는 면했습니다.”
“다행입니다, 어르신.”
“더 나누고 싶은 말이 있지만 여기는 보는 사람이 많으니. 나중에 찾아오도록 하세요. 지금은…….”
주변을 둘러보니 전투를 도왔던 여진족들, 피신했다가 돌아온 여진족들은 쉬지도 못하고 근거지를 복구하고 있었다.
마을의 길목을 방책이 막고 있는 데다, 이를 만들기 위해 많은 집이 해체된 탓이다.
적어도 한동안은 많은 사람들이 이웃에게 신세를 지겠지.
“어차피 경계는 회령부사가 대신 설 테니 그대와 수하들은 거처를 복구하는 데 집중해도 무방할 겁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철수하고 나면 그대들이 경계해야 할 터이니.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요.”
율호는 죽었지만 적병 대다수는 살아서 도망쳤다.
포로가 말했듯 율호가 새로 마련한 근거지는, 진심으로 율호에게 충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따랐던 병사들은 돌아갈 곳이 막막할 터였다.
십 중 구 할은 도적으로 전락하겠지.
어쩌면 패잔병들이 서로 규합되어 신흥 세력을 이룰지도 모르고.
어느 쪽이건 주변 치안에는 좋은 일이 못 된다.
“당분간은 출정을 자제하고 근거지를 복구하는 데 집중하세요. 조선군이 직접 강까지 넘어와서 그대들을 구원했다는 소식이 주변에 전해질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세를 이어나갔다간 많은 적을 만들게 되겠지요.”
“받들겠습니다.”
김자강과 족장들은 확장을 계속 이어나가지 못하는 것이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완급조절이 중요했다.
조선처럼 큰 세력에게 비호를 받으며 공세까지 이어간다?
주변이 큰 위협으로 인식할 거다. 일대 여진족이 연합이라도 구성했다간 확장은 어려워진다. 당분간은 내정에 충실해야지.
‘슬슬 여진족 내에서도 내 친위세력을 만들어야 하는데.’
김자강이 수직적인 관계를 납득하는 이유는 그것이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김자강이 앞으로도 나에게 충설할지는 미지수다.
이럴 때는 2, 3인자를 곁에 두어 크게 기용하는 것이 방도지만……. 그걸 김자강이 좋게 받아들이지는 않을 거다.
지금 김자강이 회령 여진에서 대장을 자처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세력이 가장 강해서가 아니라 여진족 중 나와의 인연이 가장 강한 자가 바로 김자강이기 때문이다.
‘천천히 생각하자. 시간은 많으니.’
지금은 쉬고 싶었다.
마침 아랫사람들에게 명령도 다 내려놓았겠다, 나는 가까운 여진족 거처를 찾았다.
침대도 침소도 없이 구석에 깔린 지푸라기와 털가죽이 전부였지만, 전쟁과 지휘로 피로해진 내가 잠드는 것에는 하등 문제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