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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43화 (143/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43화

50. 사냥꾼과 사냥감 (2)

율호는 당도했다.

목적은 단순했다.

자신의 부족을 유린하고 파괴한 자들에게 그대로 복수하는 것.

그가 재기할 동안 회령 여진족들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놈들이 병력을 불러들이기 전에 본거지를 파괴해야 했다.

서두를 수밖에 없다.

내리막으로 이어지던 샛길의 경사가 완만해졌다. 빽빽하던 나무도 점차 듬성듬성 흩어졌다. 산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율호는 적의 진영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다.

오른편에 펼쳐진 드넓은 강.

파괴된 수많은 집들.

폐목을 쌓아 만든 어설픈 목책.

그 너머에 대열한 병사들.

색색의 갑주들…….

일대에서는 보기 어려운 생소한 양식이다. 하지만 모를 수도 없고, 몰라서도 안되는 양식이기도 했다.

조선군!

“……!”

율호는 손을 들며 기수를 잡아당겼다. 질주하던 말이 놀라 앞발을 번쩍 들었다.

그림 같은 장면이 만들어졌지만 율호는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어째서 조선군이 놈들의 본거지를 지키고 있는 것인가? 분명 율호, 그를 저지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밖에 없다.

다만 어째서냐는 거다.

조선이 강 너머로 출진하는 이유는 위협이 되는 부족을 파괴하기 위함이다. 지금처럼 여진족을 지키기 위해서 나선 적은 없었다.

조선은 여진족에게 우호적인 세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율호를 비롯한 수많은 여진족이 조선을 증오하듯 조선 역시 여진족을 증오했다.

하지만 이건…….

“족장!”

“어째서 조선군이 여기에?”

“왜 멈추신 겁니까?”

율호의 곁으로 전사들이 다가왔다. 그들 역시 적의 근거지에 주둔한 조선군을 볼 수 있었다.

분명 우군에 비해 적은 숫자이나, 고작 그런 이유만으로 조선군을 무시할 수는 없다.

설령 놈들을 이기더라도 2차로 파견될 원정군은 차치하더라도, 조선군에게는 화약 무기가 있다.

하늘을 쩌렁쩌렁 울리는 폭음은 말을 놀라게 한다. 기병을 적극적으로 운용하는 여진족에게는 쥐약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집까지 무너뜨려 만든 방책 역시 전원 기마 상태인 율호의 군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이럴 때는 화공이 효과적이지만 놈들은 머리를 잘 굴렸다. 마침 바로 옆에 강이 있겠다, 집과 방책 위에 천을 적셔 늘어놓았다.

이래서야 불을 붙일 수도 없다.

정 진입하겠다면 무식하게 힘 싸움을 해보라는 강요였다.

“족장…….”

오랫동안 율호를 보좌했던 중년의 전사가 조심스럽게 권했다.

“다음 기회를 노리시지요.”

이에 다른 전사들도 소극적으로 동조했다.

“맞습니다. 조선 놈들은 별 것 아니지만 이겨도 문제가 됩니다.”

“이미 만호에 버금가는 세를 이루셨습니다. 서두를 필요는 없으십니다.”

“보십시오, 놈들은 조선에 의탁해 목숨을 겨우 부지하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부러뜨릴 수 있는 나뭇가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전사들은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다시 찾아올 기회를 노리자는 말은, 달리 말하면 지금은 회령 여진족을 쳐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놈들이 조선에게 비호받는 한 율호는 영원히 복수를 이룩할 수 없으리라.

율호는 불쾌함으로 몸을 떨었다.

‘조선…….’

‘조선!’

도대체 어째서 이렇게 됐단 말인가.

따지자면 시작은 율호가 볼하진을 습격한 것부터다.

습격자들의 신원을 알 수 없게 위장시켜, 조선이 보복성으로 회령 일대의 여진족을 쓸어버리도록 말이다.

하지만 율호의 계략은 공공연히 탄로 났다. 졸지에 차도살인을 당할 뻔한 조선과 회령 여진족은 연합을 이루어 율호의 본거지를 파괴했다.

이제 조선은 그가 복수를 이룩하는 것까지 방해하고 있었다.

* * *

“대감!”

병마평사 이원익. 그가 다급한 목소리로 불렀다.

“나도 보고 있네.”

숲 외곽, 구릉지에서 일단의 기병이 등장했다.

놈들은 이렇다 할 대오도 없이 우르르 뭉친 채 시선을 이쪽으로만 향할 뿐. 요란하게 몰려들던 위세는 어디 갔는지 어떠한 행동도 펼치지 않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못’하고 있는 것이겠지.

역시나인가.

“우리의 존재가 놈들에게는 약간의 의외가 되었던 모양이군.”

정체불명의 군세가 판도에 개입하자 나는 적잖이 놀랐다. 그건 놈들도 마찬가지리라. 저들도 딴에는 그려놓은 그림이 있었을 터인데.

강 너머에 처박혀 있어야 할 조선군이 떡하니 주둔하고 있으니.

게다가 방어까지 굳히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이대로 물러갈까요?”

이원익이 희망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가능성은 적다는데 병마평사의 성을 걸지.”

“아니, 소관의 성은 왜…….”

“일대에는 저만한 병력을 운용할 수 있는 무리는 없다. 필경 가용 병력 대부분을 끌고 온 외부의 세력이겠지. 그런데 이대로 수확 없이 돌아가겠다?”

미련한 짓이다.

기호지세(騎虎之勢)라는 말이 있다. 호랑이의 등에 한 번 올라타면 끝을 봐야 한다. 기병 일 천. 보아하니 과장만은 아니다.

놈들은 판도에서 감안되지도 않았던 정체불명의 세력.

분명 멀리에서 왔을진대 이만한 병력을 가용한다는 건 사활을 걸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물러선다고 돌아갈 곳이 있기야 하겠느냐?

“아, 역시나.”

선두에 있던, 아마도 대장일 자가 먼저 말을 이끌고 구릉지를 내려오기 시작했다.

부하들은 그런 대장을 말리지 못하고 함께 우르르 내려오기 시작했다. 허허벌판에서 천 기쯤 되는 기병이 한꺼번에 돌진한다.

지축이 울렸다.

-두두두두두두…….

흙먼지가 날아오르고, 달아오른 적의 군세는 기괴한 고함을 질러댄다. 실로 전율이 이는 광경이다. 나 역시 박차를 가했다.

-히힝!

말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달려 나갔다. 나는 주변을 돌며 병사들에게 외쳤다.

“거창(擧槍)!”

이미 병사들은 잔뜩 긴장한 채 창을 들고 있었지만, 명령이 떨어지자 더욱 강건한 태도로 창을 들었다.

길이가 짧은 조선의 창은 대 기병전 특화 무기가 아니라 단지 염가의 양산 무기일 뿐이다. 그러나 반짝거리는 창날의 끝과 틈 없이 뭉친 인간 방패들은 기병에게 충분한 위협이 될 수 있었다.

놈들이 아군의 시체를 방패삼아 진입하겠다면 그것마저 저지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서 비장의 무기가 있는 게 아니겠나?

“조총수들은 방포를 준비해라! 명령 없이 방포하는 자는 내가 즉시 베어 죽일 것이야!”

총성과 함께 눈 깜짝할 사이에 인간과 전마를 단숨에 살상할 수 있는 무기.

비격진천뢰까지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이런 전투를 예상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었고 실책이었다.

여진어로 외쳤다.

“견제사를 날려라! 적이 많으니 노릴 생각은 하지 말고, 화살을 다 쏟아부을 생각으로 쏴!”

이에 여진족들이 화살을 날려대기 시작했다. 때마침 적들도 화살을 날려대기 시작했다.

쉬식, 쉬시식, 쉬시시시식…….

화살이 뱀 혓바닥소리와 함께 전장을 가로질렀다. 대지에는 대살이 피어올랐다. 목제 집과 목책에 꽂히는 화살들이 둔탁한 소리를 냈다.

일선에 선 병사들은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뿐이다. 갑사들이 입은 두정갑의 방어력은 엄청나다. 노출된 안면부로 유시(流矢)에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죽을 일은 없다.

두정갑에 쓸데없는 짓을 저지르지만 않았다면.

역시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에 화살이 턱, 꽂히며 쓰러지는 놈이 있었다. 덕분에 대오도 흔들렸다.

‘철판을 뺀 건가? 등신 같은 놈!’

재질에 따라 달라지지만 철편으로 정직하게 만든 두정갑의 무게는 20kg이 넘는다.

무겁다는 건 이해하지만 목숨의 무게보다는 훨씬 가볍다. 그럼에도 무겁다는 이유로 철판을 빼는 미친놈들이 드물지 않게 존재한다.

방금 쓰러진 놈이 죽었건 살았건 좋은 꼴을 맞이하게 할 생각은 없지만, 지금은 사사로이 처벌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온다!”

일선 지휘관 중 하나가 외쳤다. 지축을 울리는 적의 군세는 이제 고작 3, 40미터 앞!

초 단위로 시시각각 커져가는 적들의 형체에 창을 든 갑사들은 자연스럽게 다리를 벌리고 무게중심을 낮췄다.

마치 동물적으로 벌어진 반사적인 행동.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발(擧發)!”

명령을 기다리고만 있던 조총수들은 시원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불 붙은 화승이 화문(火門)을 때리고 장약이 폭발한다.

-파파파팡! 파파파파파…….

매캐한 연기가 안개가 되어 일순 시야를 가렸다. 적 기병들의 진입은 없다.

돌격은 저지되었나!

갑사들 중 일부가 긴장이 풀렸는지 하나둘 씩 고개를 들었다.

“고개 숙여!”

나의 외침이 지휘계통을 타고 내려간다. 곳곳에서 고개를 숙이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조총수들은 긴장한 손으로 장전을 이어나갔다. 내가 병마절도사로 부임한 이래로 상비군들은 밥 먹듯이 훈련을 했지만, 훈련과 실전은 다르다.

장전 순서는 혼란스러웠으며 덜덜 떨리는 손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 답답한 광경을 지켜보는 나까지 떨릴 정도였다.

“뒤다!”

후열에 있던 조총수 하나가 등판에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뿌연 연기가 걷히며 전장이 드러났다. 돌격이 저지당한 여진족 기수들은 전략을 달리했다. 주변을 빙빙 돌면서, 일선이 아닌 반대편 후열로 화살을 날려대고 있었다.

두터운 갑주를 입은 갑사들 대신, 전면 가슴만을 보호하는 허접한 엄심갑으로 무장한 조총수들을 노리겠다는 발상이다.

곳곳에서 부상자가 속출한다.

무인의 길을 자처한 갑사들과는 달리, 단지 군역을 이행할 뿐인 토병(土兵)들은 순식간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앞을 봐라, 병신들아! 앞 봐! 앞을 보라고! 후열 갑사들은 활을 들어 적을 견제해라!”

서둘러 대응해야 한다는 마음에 두 부류의 병종에게 각기 명령을 내린다. 그러고서 바로 걱정이 일었다. 과연 놈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을까?

앞을 보라는 외침과 활을 들라는 외침이 뒤섞인다.

분명 후열의 갑사들만 활을 들라고 했거늘 일선에 서고도 멍청하게 창을 내리고 동개에 손을 가져가는 놈이 속출한다.

“일선, 창 들어! 일선! 창 들어!”

목이 터져라 외친다.

그 순간.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대지가 기울었다. 고통은 없다. 이건 내가 맞은 게 아니다!

말이 몸을 뒤틀고 있었다.

“대감!”

이원익이 절규했다.

덕분에 주변의 병사들이 나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분명 앞을 보라고 했거늘! 이원익을 향한, 닥치라는 호통이 나오기도 전에 대지가 등판을 때린다.

‘헉!’

시야가 검붉게 점멸한다.

그래도 고삐는 놓치지 않는다.

말이 진형 안에서 난동을 피우면 끝장이다! 한쪽 팔은 여전히 위로 치켜든 채로, 몸이 이리저리 끌려다닌다.

말을 진정시키기 위해 발작적으로 고삐를 거듭 당긴다.

날뛰던 말이 점차 느려졌다.

“대감!”

이원익이 달려와 안부를 물었다.

“말이나 진정시켜!”

나는 외친다.

이원익은 고삐를 인수했다. 툭 늘어지는 팔과 어깨에는 감각이 없다.

병사들이 떨리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땅을 짚고 일어선다.

하마의 충격으로 허리가 저릿하지만 아픈 기색은 내지 않는다.

“앞을 보라고 하지 않았나!”

나의 거친 외침에 병사들은 그제야 다시 앞을 바라본다. 멈춰 있던 손도 다시 움직인다. 산발적인 총성, 여전히 귓가를 때리는 뱀의 소리.

발에서 느껴지는 전장의 고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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