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42화
50. 사냥꾼과 사냥감 (1)
“헉, 헉!”
여진족 기수 몇 명이 회령을 찾았다. 얼굴은 새빨갛게 상기되어 있었으나 추위 때문은 아닌 듯했다. 다들 무척이나 급박해 보였다.
“문을 열어주시오!”
선두의 여진인이 조선어로 외쳤다. 단창을 꼬나쥔 채 잔뜩 긴장하고 있던 성문 보초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이들을 통과시키는 건 그들의 역량이 아니었다. 사유가 무엇이 되었건 대놓고 여진족인 그들은 강 너머의 존재가 확실했으니.
안 그래도 그들이 일으킨 분쟁으로 인해 회령 일대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부쩍 예민해진 상태였다.
“기, 기다리시오!”
병사 하나가 외쳤다.
“서둘러주시오! 북병사께서 반드시 들어야만 하는 이야기요!”
“……!”
북병사(北兵使).
함경북도에서는 왕과 다를 바 없는 직함이 나오자 병사들은 차마 절차를 지체할 수가 없었다. 혹 북병사가 소식을 접하고 왜 늦었냐고 분개한다면, 일개 병사들은 감당할 수 없었으니.
“그, 그럼 한 사람만 들어가시오. 소식을 전할 뿐이라면 굳이 여러 사람일 필요는 없으니…… 그 이상은 안 되오!”
병사가 타협안을 내놓았다. 여러 기의 기병은 몰라도 한 기의 기병이라면 큰 위협은 되지 않는다.
다행스럽게도 여진족 기수들에게 딴 마음은 없었다.
놈들은 서로를 향해 의사를 전달하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선두에 있던 기수가 박차를 가하며 성문을 가로질렀다.
-두두두, 두두두, 두두두두…….
멀어지는 말발굽 소리가 요란했다. 행인이 많은 성 내에서는 용납되지 않을 질주에, 간간이 놀란 듯한 비명도 들려왔다.
병사들은 과연 자신이 옳은 선택을 했는지를 고민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고 기수는 저 멀리 회령 관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 *
“대감께서 병사들을 이끌고 함께해 주시니, 그나마 안정이 됩니다.”
신일이 풀어진 얼굴로 말했다.
며칠 전 경성 감영까지 직접 찾아온 그는 강 너머 여진족들의 분란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지시한 사항은 이행하셨습니까?”
“예! 약간의 물자를 넘기니 무척이나 감사해하더군요. 역시 금천부원군 대감의 말씀대로였습니다.”
“하하하.”
신일이 안도한 것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금천부원군이 친히 병사 오백을 이끌고 회령에 진입했다.
그는 전장에서 닳고 닳은 노장은 아니었으나,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 새로 부임한 금천부원군은 바로 이곳 회령에서 거듭 승리를 거머쥔 자였다.
신일에게는 천군만마나 다름없었다. 감히 여진족들이 강을 넘어오기라도 한다면, 한 놈도 살아 돌아갈 수 없으리라.
믿을 구석이 금천부원군 밖에 없었기에 기대감이 과해진 감이 있지만, 금천부원군의 경력을 감안하면 아무리 기대하더라도 과하다는 표현은 걸맞지 않으리라.
그것이 신일이 믿는 구석이었다.
“모쪼록 기거하시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모시겠습니다. 대동하신 병력 역시, 성 내에서 수용하는데 무리가 갈 정도는 아니니…….”
신일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와중.
밖에서 누군가 외쳤다.
“북병사 어르신!”
쩌렁쩌렁한 외침이었다.
신일은 어떤 놈이 감히 소란을 떠나, 싶었지만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다급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혹시라도 우려한 상황이 벌어진 것은 아닐까!
신일이 외쳤다.
“당장 문을 열어주어라!”
그렇게 관아의 문이 열렸다. 들어선 사람은 털옷을 지저분하게 걸친 여진족 사내였다.
신일은 의아함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상상했던 것은 한창 공격받는 와중 주둔지를 빠져나온 병사의 전언이었지, 여진족 따위의 전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일의 생각이 어떻건 여진족은 거침없이 대청으로 다가왔다.
금천부원군과 안면이 있는 사이인가. 어쩐지, 며칠 전 새로 부임한 북병사께 문안을 드리겠다고 강을 넘어온 자들 중 하나였다.
“어르신.”
“무슨 일이지?”
여진족은 경계하는 신일의 눈치를 보더니 여진어로 말했다.
“큰일 났습니다. 김자강을 비롯한 족장 대다수가 병력을 이끌고 수주(愁州)로 떠난 직후, 하다가사(下多家舍)에서 일천 기 이상의 소속 불명 병력이 나타났습니다!”
수주(愁州)는 종성의 옛 지명이기도 하고, 강 너머의 근처를 일컫기도 했다. 당연하겠지만 이 경우에서는 후자다.
김자강이 벌써 거기까지 갔나.
하다가사(下多家舍)는 회령에서 서쪽 15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의 지명이다.
강변을 제외하고는 가파른 산만 펼쳐진 회령 서쪽에는 1천 기 이상의 기병을 가질 수 있는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외부의 세력이 접근했다는 뜻.
‘김자강이 군대를 뺀 것을 확인하고 들어온 건가.’
본대로 귀환 요청을 보냈겠지만, 반드시 늦는다. 어디서 굴러온 개뼈다귀 같은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에서 나서지 않는다면 회령 부족들의 근거지는 유린당한다.
“귀찮게 됐군. 어떤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와주십시오, 어르신!”
“그럴 생각이네.”
이쪽이 가진 병력은 500. 회령에서 장정들을 징발하면 2, 300은 늘어나겠지만 시급한 상황이다. 느긋하게 병력을 모집할 여유는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곁의 신일이 물었다.
“무, 무슨 일이랍니까?”
“적호(賊胡)의 병력이 회령으로 접근하고 있다는군요. 일천 기 이상이랍니다.”
“허, 헉! 일천 기!”
신일이 기겁했다.
기병이 일천이라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위험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에서 더욱 위험했다.
이 정체불명의 군대가 오직 기병만으로 이루어진 별동대가 아니라면, 보병 역시 일천은 있다 봐도 무방했다.
“이 사람이 알기로 일대에는 병력을 일 천 이상 기병만으로 징발할 수 있는 세력은 흔치 않아요. 북쪽의 율보리라면 모르겠으나…….”
율보리의 세력은 약 삼천 호(戶). 병력을 만들자면 능히 정체불명의 세력이 갖춘 군세를 만들 수 있었다.
문제는 이론상으로 가능한 일이라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 건 아니라는 거다.
율보리는 종성에서 한참 서쪽의 해란강과 그 주변의 방대한 평야를 장악하고 있었다. 덕분에 지금의 세를 이룩할 수 있었으나, 대신 젖과 꿀이 흐르는 그의 땅을 노리는 세력도 많았다.
그런데 전력 상당수를 회령 서쪽에 등장시킬 정도로 크게 우회한다?
일대 부족들이 타 세력의 통행을 용납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율보리에겐 그런 짓을 할 이유도 여유도 없다.
“그렇다면 누구란 말입니까?!”
신일이 다급히 물었다.
“잘 모르겠군요. 확실한 건 그 친구들이 강 너머에서 분탕을 치는 걸 구경할 수만은 없다는 겁니다. 회령의 여진족들이 망하기라도 하면 우리는 삭풍 앞에서 이를 잃은 잇몸이 될 터이니.”
회령 여진족에게 직접적인 군사 지원은 요원한 일이었으나, 이렇게 그림이 잘 그려진다면 나서지 못할 것도 없다.
순망치한(脣亡齒寒).
실리도 그렇지만, 명분으로도 적호(賊胡)가 조선에게 순종한 번호(藩胡)를 치겠다는데 팔짱 끼고 앉아서 구경할 수만은 없다.
나는 작게 웃고는 병마평사 이원익을 불렀다. 객사에서 쉬고 있던 그는 나의 호출에 다급히 달려 나왔다.
“무슨 일입니까?”
“병사들에게 출진을 준비하라 하세요. 정체불명의 세력이 일천 기 기병을 이끌고 회령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아, 하지만 출진이시라면. ……차라리 회령에서 방어를 굳히는 게 낫지 않을는지.”
“그럼 강 너머 여진족들은 다 죽으라는 얘기입니까?”
“……음.”
“평소에 병마평사가 여진족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아조에 충성을 맹세한 번호(藩胡)들이 적호(賊胡)에게 공격을 받기 직전인데, 우리가 팔짱만 끼고서 구경만 할 수는 없잖습니까.”
순망치한이라는 실리도 그렇지만, 명분 역시 있었다.
이원익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바로 이행하겠습니다.”
그렇게 이원익이 물러나자 신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적이 고작 수십 기도 아니고 무려 일천 기입니다. 아무리 번호에 대한 의리도 중요하지만, 혹 금천부원군의 안위에 문제라도 생긴다면.”
“글쎄요. 이 사람이 오래 산 건 아니지만. 굳이 창이나 칼에 맞지 않아도 죽는 것이 목숨이요, 죽을 것 같으면 죽고 살 것 같으면 사는 게 인생이니. 딱히 겁 낼 필요는 느끼지 못하는군요.”
“…….”
“회령의 장정들을 모두 무장해서 넘어오세요. 우물쭈물 시간을 낭비하는 건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발길을 돌렸다.
비보를 전한 여진족은 내가 관망 대신 개입을 선택한 것에 기뻤는지, 벌써부터 안도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래전에도 나는 그들을 이끌어 두 번의 승리를 쟁취한 자.
때마침 회령 여진족들의 머리도 두꺼워져 구속력이 약해진 참이었다.
어떤 떨거지가 습격을 주도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덕분에 내가 다시 면을 세울 수 있게 됐다.
무훈과 전공만큼 여진족들에게 확실한 건 없으니.
아조의 백성들이 무고하게 다칠 수도 있음은 내가 미안하지만.
나의 부임으로 이미 일대의 여진족들은 큰 혼란에 휩싸였다. 어쩌면 나는 천재지변과 다를 바 없는 존재이니.
소나기가 착한 마음을 품는다고 사람을 가려 적실 수는 없듯.
나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 * *
사오이(沙吾耳).
회령의 바로 맞은편에서, 나는 군세를 도열하고 남은 족장과 부족민들을 규합했다.
본거지를 지키기 위해 최소한으로 남긴 병력이었기에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큰 의미는 없다. 하지만 억척스러운 북방의 인간들이다.
함경도의 아낙들만 하더라도 자신들이 하삼도의 병사들보다 잘 싸우리라 자신 있게 외친다.
강 너머의 여진족이라면 그 이상이어야지 않겠나.
상대도 여진족이긴 마찬가지지만 필사를 각오한다면 일인분을 못 할 것도 없다.
“어르신. 당장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모두 집결했습니다.”
족장 중 하나가 보고했다.
북쪽 비탈에서는 여인과 아이, 노인들이 피신하고 있었다. 이건 내가 오기 전에 미리 처치했어야 했는데 다들 전전긍긍 떨고만 있었다.
괜히 적호(賊胡) 여진족들이 번호(藩胡) 여진족들을 상대로 유약해졌다고 하는 게 아니다.
기댈 구석이 있으면 사람은 약해지는 법이니.
하지만 때로는 이런 기대가 더 큰 기대를 발휘할 수도 있는 법이다.
산군(山君)이라 불리는 맹수 호랑이도 때로는 몇 마리의 개를 이끄는 사냥꾼에 의해 사냥당하기도 하니.
의지와 복종은 질서와 조직력을 만든다.
“외부의 가옥을 무너뜨려 벽을 만들고 옷과 천을 적셔 그 위에 덮도록 해라. 기병들의 저지를 막을 수 있을 거다.”
“알겠습니다!”
족장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물러나 여진어로 나의 명령을 전했다. 보금자리를 부수라니 부족민들은 흠칫 당혹했으나 머뭇거리는 자는 없었다.
주위 사방에서 집을 무너뜨리는 요란한 소동이 벌어지는 동안, 나는 이번 전투에서 공신이 될 신무기를 챙겼다.
“드디어 이놈이 빛을 보겠군.”
조총!
나는 열병기의 위력을 잘 알고 있지만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무기였으며, 또 검증되지 않은 무기이기도 했다.
때문에 북병영에도 고작 이백 정 남짓, 회령에도 오십 정 남짓씩 배분되고 말았다. 상비군의 규모를 생각하면 부족한 편은 아니나 유사시에 대비할 정도는 아니다.
함경북도 역시 상비군은 2,500인 안팎이지만 단창과 엄심갑 같은 징집군용 무구는 만 단위로 비축되어 있으니.
거기에 고작 수백 정 정도란, 사실 유의미한 편제조차 불가능한 수량이었다. 이번에 조총이 제대로 활약해서 한 층 조정에 좋은 인식을 새겨주는 수밖에 없다.
“갑사들은 모두 하마해서 창, 환도, 활로 무장하고 토병들은 조총과 환도로 무장한다.”
나의 명령에 군관 중 하나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기병들 숫자 자체가 적에 비하면 극히 적습니다만, 모조리 하마시킨다면…….”
“적의 일천 기병과 정직하게 육박전이라도 벌여야 하나? 중요한 건 놈들의 예봉을 꺾고 돌진을 저지하는 거다. 오히려 지금은 말을 쉬게 하고 적들이 도망쳤을 때 쓰는 편이 나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토병이 아니라 저희들이 창을 쥔다는 건.”
“광대들이 무관과 똑같이 칼춤을 추면서도 나라에 녹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이런 때 목숨을 걸 일이 없기 때문이지. 등을 돌리는 자는 내가 직접 참하고 삼족에게까지 죄를 물을 것이야. 내 손에 죽을 바에야 적의 손에 죽도록. 알겠나?”
“예…….”
갑사들은 쭈뼛거리며 말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다. 아무리 최전방에 배치되는 양계의 갑사라지만 대부분은 실전이 처음.
그런데 최전선에서 창을 들고 적의 돌진을 받아내게 됐으니 벌써부터 심장이 쿵쾅거릴 거다.
이런 때일수록 총지휘관인 내가 냉정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느긋하게 전장을 구경했다. 슬슬 병사들이 대오를 갖추고 있었다. 부족한 숫자지만 집들을 바리게이트 삼아 연결해 진입로를 최소화하니 그런대로 모양이 나왔다.
“……대감.”
곁에서 이원익이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때마침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지평선 산세에서는 수백 개의 까만 점이 한꺼번에 날아올랐고, 흙먼지가 솟아올랐다.
“전장에 돌아오니 좋구나.”
나는 놈들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