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왜 이순신이죠-141화 (141/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41화

49. 자연재해 (3)

“무슨 손님이 찾아와? 내가 오늘 볼기가 결딴이 나서 옥황상제라도 받아줄 수가 없다 전하거라!”

“병마절도사 대감이십니다만……,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뭐? 아니야! 잠시만 기다리거라! 이봐!”

정승복은 다급히 외치며 방문을 향해 엉금엉금 기었다. 어떻게든 서둘러 방문을 여니, 싸한 한기와 함께 노복의 당혹한 얼굴이 나타났다.

“어, 어르신?”

“이 멍청한 놈! 처음부터 대감께서 오셨다고 말했어야지!”

“송구합니다요.”

“모시거라.”

“예!”

노복이 멀어질 동안 정승복은 어떻게든 예를 차리고자 벽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흠씬 두들겨 맞은 하반신은 파업을 결정한 상태였다.

차마 일어설 수가 없어 어떻게든 무릎을 꿇으니 이제는 퉁퉁 부어오른 엉덩이가 저릿저릿 아려오기 시작했다.

그때 금천부원군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후, 무리하지 말고 누워서 쉬세요.”

금천부원군은 이미 방에 도착한 뒤였다.

정승복이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금천부원군은 방으로 들어서 정승복을 눕혔다.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지만 목침을 빼서 허리에 받쳐주기도 했다.

“맞아 부어오른 부위는 최대한 높여야 덜 붓고 덜 아픕니다.”

“그, 그렇습니까.”

“이 사람 때문에 고생이 많군요.”

“……다 나라를 위한 일 아닙니까.”

정승복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사실 이렇게까지 고생할 줄은 그도 몰랐던 탓이다. 언제 장을 맞아봤어야 알지.

“그렇게 이해해 준다면 좋겠군요, 우후께서 말씀하시는 걸 보아하니 그게 진심은 아닌 듯합니다만.”

“크흠.”

부인하지는 않는 정승복이었다.

“붕대로 환부를 가볍게 압박하고, 이따금 얼음으로 찜질해주세요. 너무 오랫동안 대고 있으면 도리어 동상에 걸릴 수 있으니 적당히.”

“조언 감사합니다.”

“그리고…….”

금천부원군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몸조리 잘 하시길 바랍니다. 복귀가 늦으시면 다른 사람들만 재미보는 수가 있으니까요.”

“……예.”

정승복은 의아했다. 다른 사람들이 재미를 본다니?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단 말인가.

진의를 가늠할 수 없었으나 허투루 한 말은 아닐 터였다. 보아하니 머지않아 내막이 드러나리라. 정승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친히 안부를 물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곳에서 이 사람이 몇 의지하지 않는 충신인데. 당연히 안부 정도는 직첩 찾아와서 물어봐야지요. 그럼.”

“가시렵니까?”

“예. 무리하지 마시고 쉬고 계세요. 최대한 빨리 회복한 모습으로 돌아오길 기다리겠습니다.”

금천부원군은 흑립을 살짝 기울여 예를 표하고는 거침없이 발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멍히 바라보던 정승복은 침만 꼴깍 삼켰다. 외관은 아들 정사준(鄭思竣)의 연배와 비슷했으나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다.

괜히 명나라의 조정마저 뒤엎은 자가 아니었다.

* * *

며칠 뒤.

김자강을 비롯한 몇 명의 족장들이 다시 감영을 방문했다.

병마평사 이원익은 오랑캐에 불과한 강 너머의 여진족들이 거듭 감영을 찾아온 것을 불쾌해했다. 여기가 어디 자기네들 안방인 줄 아느냐며 말이다.

그리고 아랫사람들을 아끼는 성품은 잘 알겠지만 오랑캐들 같은 자들마저도 잘 대해줄 필요는 없다고도 했다.

“이 사람은 괜찮네. 번호(藩胡)의 수장들이 나를 좋아한다면 더 품어주어야 아조의 질서에 협조할 게 아닌가?”

“음.”

“물러가게. 손님들은 들어오라고 하고.”

상관이 까라는데 별수 있나. 이원익은 허리를 숙이곤 물러났다.

“알겠습니다.”

직후 김자강과 족장들이 들어섰다. 그들은 털옷 가슴께에서 몇 장의 종이를 꺼냈다.

“최대한 알아본 근방의 소식입니다.”

“잠시만요.”

나는 보고부터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함경도에 방문한 것이 불과 몇 년 전에 지나지 않을진대 변방의 정세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조선에게 충성을 바치고 안전을 약속받은 번호(藩胡)들만이 그나마 변동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여진족 사회 대다수를 구성하는 중간 규모의 부족들은 대부분 새로운 판도에서 새로운 족장의 지휘 아래 존재하고 있었다.

‘이만한 혼란스러움은 전국시대의 일본에나 비견되겠군. 그러고 보니 때마침 일본도 전국시대인가…….’

이 시대에서는 60갑자를 사용한다. 그것이 익숙해진 나에게는 임진왜란이 정확히 몇 년 남았는지 계산할 수 있었다.

대략 16년 정도.

잘은 모르지만 아마 오다 노부나가가 열도를 통일해 가는 시기가 아닐까.

사실, 이 정도는 바로 옆에 붙은 나라로서 알아야 하는데 조선은 열도의 근황에 통 관심이 없었다.

천박한 오랑캐들답게 서로를 주살하며 논다는데 문명국 대조선이 거기에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게 대충 조선의 입장이었으니.

‘지금은 열도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다.’

당장 나의 앞에 펼쳐진 것은 두만강 너머의 여진족의 세력도였으니. 따지자면 이쪽도 누르하치의 발호가 머지않아서 중요도는 열도에 밀리지 않는다.

누르하치가 만주와 연해주를 장악하기 전에 회령 족장들이 알을 박아야 했다.

“이 일대는 한결같이 혼란스럽군요.”

“예.”

“그 혼란에 묻어가는 것도 방도가 될 수는 있겠지만, 번호(藩胡)가 사사로이 팽창하려는 시도를 조정이 좋게 보지는 않을 겁니다.”

“음.”

김자강이 침음과 함께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내가 있는게 아니냐, 싶은 느낌이었다.

맞았다.

그래서 내가 여기에 있는 거지.

이 야망 많은 족장들은 내가 체감하지 못하는 충성의 대가로, 자신들의 확장에 편의를 봐주기를 원하고 있었다.

오만하지만 적어도 나의 도움을 받으려면 나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만하면 부족하지 않다.

적어도 누가 위인지 알고 있다는 뜻이니.

“외교적으로 고립된 부족이 몇 개 보이는군요. 해란강(海蘭江) 이남의 부족들 위주로 최후통첩을 보내세요. 자식들과 함께 조선에 입조하여 그 질서에 순응하라고.”

“응할 녀석은 없을 겁니다.”

“그래서 최후통첩이라고 하는 겁니다. 미리 변경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응하지 않는다면 좋은 명분이 되니 돌입하면 됩니다.”

“오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의 이름을 팔면 안 됩니다. 최후통첩은 어디까지나 거절할 것을 알고서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명분일 뿐. 배후에 나나 조선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일대 여진족들이 규합될 가능성이 있어요.”

나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이들이 나의 이름을 걸고 정복 전쟁이라도 일으켰다는 소식이 조정에 들어간다면, 정치생명은 물론 일신의 생명까지도 끝장날 터이니.

“그렇군요.”

“전쟁명분은 어디까지나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명분인 겁니다. 오히려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편이 좋아요.”

“알겠습니다.”

“내가 배후에서 힘을 써주겠지만 많은 것을 기대하시면 안 됩니다. 지금은 음성적인 차원에서 물자지원 정도……. 군사 개입을 남발할 수는 없으니까요.”

“예.”

“많은 수확이 있기를 고대하겠습니다.”

허락이 떨어져서일까.

김자강과 족장들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로 투닥거리던 회령 너머의 족장들은 나의 아래에서 힘을 합치고 이제 부상하고 있었다.

과연 어떤 저력을 보여줄까.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승승장구하지는 않기를 바랐다. 조정에서 위협을 느끼고 제동을 걸 수도 있지만, 그들을 향한 나의 장악력 역시 약해질 수 있으니.

해란강 이남.

적당한 영역이다.

며칠 뒤.

‘조선에 입조’라는 것은 일대 여진족들에게는 터무니없는 명분이었다.

두만강 일대에는 조선의 질서에 순응하는 번호들이 수백은 있었으나, 그들 중 진심으로 조선에 충성하는 자는 없었다.

단지 강 너머에 존재하는 강대한 세력을 적으로 돌리지 않고자 충성을 맹세했을 뿐.

그러나 회령 일대의 여진족들은 힘을 합쳐 마치 조선의 번견(番犬)이라도 된 듯 입조를 요구하며 전쟁을 시작했다.

이는 노골적인 팽창의사로 인식되었고 일대는 단번에 긴장 상태에 돌입했다. 그건 강 너머에 새로 발족한 연합체를 둔 회령도 마찬가지였다.

회령부사가 직접 찾아왔다.

“대감께서는 그들에 대해 잘 아시지 않습니까?”

회령부사 신일(辛馹)이 애처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명목상의 부사일 뿐인 최전방 오지에 배치된 사람답게 나름의 사연이 있는 자였다.

대략 2년 전 선산의 부사로 있다가 탐오한 죄를 물어 파직되었으나 근래에 회령의 부사로 복직된 것이다.

사람도 얼마 살지 않는 얼어붙은 동토에는 빼먹을 것도 없고 누릴 것도 없다. 특히나 육진의 부사로 부임한 자들은 조용히 임기만 다하고서 도성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그런데 바로 맞은편에서 난동이 벌어졌으니.

꼴에 겁이 날 법도 하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오나…….”

“변방의 오랑캐들이 소란을 일으킨다는 것은 물론 경계해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저들이 조선의 입조를 명분으로 주위에 싸움을 걸었는데, 설마 우리들에게 피해를 주겠습니까?”

“음.”

“그렇지는 않겠지요. 이 사람이 보기에 그 치들은 오히려 우리들의 도움을 간절히 원하는 것 같습니다만.”

신일은 그런가, 싶어 하면서도 여전히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옆집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데, 이쪽으로 옮겨붙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다고 겁이 안 날 수는 없으니.

“좋아요, 정 걱정되신다면 물자 조금을 그쪽으로 보내세요. 앞으로도 여진족들 사이에서 모범이 되어달라고요. 지지 의사를 보여주면 그쪽에서도 감사하게 생각할 겁니다.”

“음…….”

“물론 무기처럼 민감할 수 있는 물건을 반출해서는 안 되겠지요. 묵은 곡식과 저들이 긴히 여기는 소금 따위가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부사를 통해 지원하게 되나. 이쪽에서 먼저 나설 필요가 없어 좋군.

“상황이 격화되면 군 일부를 회령 방면으로 재배치하겠습니다. 직접 순시도 할 터이니 너무 염려 마시길. 냉정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저들도 딴 생각을 안 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좋아요, 부사. 경성까지 직접 찾아오시느라 노고 많으셨습니다. 그동안 마음도 편치 않으셨을 듯한데 객사에서 느긋하게 쉬다 가시기를.”

“……예.”

사람이 멍청해서 좋군. 덕분에 병력도 옮기고 직접 회량을 찾아갈 명분도 생겼다.

하지만 그의 우려가 막연한 건 아니다. 회령은 물론 해란강 이남과 접경한 종성과 온성도 유사시를 대비해 긴장 상태에 돌입했다.

적들이 혼란을 틈타 강을 넘어올 수도 있으니. 때마침 모든 것이 삭막해지는 겨울이라 여진족들도 한층 사나워지고 야만적으로 변할 때였다.

이건 회령 서쪽 지역인 무산도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인구는 적고 산세는 가파른 무산이 육진보다 더 위험했다.

‘양영만동진, 풍산진, 볼하진에 병력을 증원해야겠군.’

* * *

늑대가 돌아왔다.

놈은 수 년 전만 하더라도 자신의 영역이었던 방대한 토지를 숨죽여 바라보았다. 이제 그곳에는 늑대의 수하들은 없었다.

근본도 알 수 없는 놈들이 가가호호를 이루어 땅을 일구어놓고 말을 풀어두고 있었다.

그에게는 굴욕적인 일이었다…….

일대의 패자를 꿈꾸었던 늑대는 패배와 울분을 삼키고서 목숨만 부지한 채 친위대와 함께 도망쳤다. 일단 살아남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세를 일궈낼 수 있으리라 믿고서.

그리고.

마침내.

돌아왔다.

그는 회령의 여진족들이 팽창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것이 귀환길을 서두르게 만들었다. 놈들은 군세를 동쪽으로 돌렸다. 본거지를 지키는 병력은 극히 적으리라.

-번쩍

율호는 손을 든 다음, 기수를 돌렸다.

그가 언덕에서 물러나니 수천 기의 기병이 율호를 뒤쫓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