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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39화 (139/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39화

49. 자연재해 (1)

나는 경성감영에서 멀지 않은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영, 줄여서 북병영(北兵營)으로 향하고 있었다.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는 바쁜 몸이다. 명목상 함경도 전체를 관할하는 관찰사가 있다곤 하나, 단병사 역시 대체로 주둔지의 지방관을 겸하는 편이었다.

나 같은 경우에는 병마절도사는 물론 경성부사의 역할까지 수행해야 하는 셈이다. 그런데 각기 역할이 군사, 행정으로 다르고 관사까지 따로여서 바쁘게 살자면 한없이 바빠지는 자리이기도 했다.

마치 지금처럼.

“적어도 북병영이 멀지는 않아 다행입니다.”

대동한 병마평사 이원익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랑이가 앉았던 누각이라는 이름의, 좌호루(坐虎樓)가 나타났다. 2.5층 높이의 제법 위세가 좋은 팔작지붕의 영문이었다.

좌우에는 토병(土兵)과 함께 푸석한 인상의 말단 군관이 자리해 있었다. 부임 첫날에 가볍게 면식을 익혀두어, 군관은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올렸다.

“대감.”

“별다른 일 없었고요?”

“덕분에 무탈합니다.”

“흠…….”

나는 작게 웃어주고는 병영으로 들어섰다.

무탈하다니.

이곳 군관들은 아직도 태평한 모양이었다. 그건 어제 사소한 소란을 일으켰던 감영도 마찬가지지만, 슬슬 분위기가 바뀌어야 했다.

단지 내가 나의 성실함을 아랫사람들에게 강요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조만간 회령 일대의 부족들이 준동할 예정이다. 어디까지나 외부의 일이지만 고작 강 하나를 사이에 두었을 뿐이니, 마냥 남의 집 구경하듯 넋 놓고 있어서는 안 됐다.

혹시라도 일부 여진족들이 혼란을 틈타 변경이라도 노린다면 곤란해지는 건 나만이 아니다.

“여기가 무기고입니다.”

이원익이 안내했다.

정면에는 몇 개의 창고가 줄지어 있었으며 주변은 소수의 병사가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불청객의 등장에 시선을 보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정말로 다 뒤져보실 생각이십니까?”

“이 사람이 병마평사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니에요. 단지 장부상의 숫자는 장부상에 지나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원익은 무구의 종류와 숫자를 모두 취합하여 서면으로 보고했다. 적어도 종이 위에서 함경북도의 보급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두 차례나 벌어진 원정에 모두 참여했다. 서면과 현장의 간극이 크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

최전방이었던 회령조차 내가 임기 내내 바꿔나갔음에도 끝이 보이지 않았는데.

하물며 후방인 경성이라고 다르겠는가.

나는 병사들 앞으로 나아가 소개했다.

“이 사람은 최근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된 금천부원군 이(李)라고 합니다.”

“……!”

굳이 알리지 않아도 병사들은 대강 나의 정체를 직감했겠으나, 스스로를 소개하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의 태도와 언행 때문인가. 밖에서 대감 소리를 듣는 대신들이 신분 고하를 가리지 않고 존대를 하니 별종은 별종이었다.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딱히 선민의식의 발로라기보다는 단지 버릇이 됐을 뿐이다.

진정으로 선한 사람은 버릇처럼 과잉 친절을 표방하지는 않는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방문해서 놀라셨겠군요. 하지만 이 사람이 병기의 관리상태를, 친절하게 방문 의사부터 알린 다음에 확인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예.”

“귀찮겠지만 당장 무기고의 문을 개방하여, 무구들을 뜰에 늘어놓으세요. 분류를 해야 하니 가급적이면 종류별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병사들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무기고를 개방했다. 별다른 잠금장치는 없었으나, 어색한 손놀림을 보아하니 내부의 상태가 예상했던 대로인 모양이다.

곧 병사들이 요란한 철 소리를 내며 무기고와 병영 뜰을 오갔다.

느닷없는 소란에 상주 군관들이 상황을 파악하고자 하나둘 달려왔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갑자기 무슨 짓들을…… 대, 대감!”

병영 뜰에 쏟아지는 무구들을 보아하니 상황파악이 된 모양이었다. 올 때는 기세가 좋았던 군관은 그새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대감께서 병영에는 어인 일이신지…….”

“이 사람이 병마절도사인데, 보고까지 해가면서 병영을 들러야 합니까?”

“아, 아닙니다!”

“보시는 대로입니다. 예상과는 다르길 바랬건만 병영의 상태는 안타깝게도 이 사람의 기대에 제대로 부응을 해주었군요.”

자루가 썩고 상한 창들, 벌레와 쥐가 물어뜯어 너덜거리는 엄심갑들. 환도는 녹이 슬어 도와 검집이 일체화된 녀석이 많았으며, 화살대는 새하얗게 빛이 바랠 정도로 삭아 툭 치면 똑 부러졌다.

비교적 양품인 물자도 있었으나 단지 근래에 들어 새로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관리되지 않아 금속날이 뿌옇게 물들어 빛이 바랜 지 오래였다.

“멀쩡한 게 많지 않군요.”

새삼스러운 소리를 하고 있으니, 병마우후 정승복(鄭承復)이 허겁지겁 달려와 예를 올렸다.

“대, 대감.”

다급하게 찾아온 걸 보니 충실한 부하에게 보고를 받은 모양이었다. 과연 뜰에 늘어진 무구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 상황에 대한 이해도가 곧 그의 평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가 물었다.

“병마우후, 지금 병영에서 보관하는 무구의 상태를 보니 장부상의 기록과는 제법 거리가 있어 보이는군요.”

“그, 그건.”

정승복은 침을 꼴깍 살피고는 변명했다.

“일부 무구의 상태가 좋지 않기는 합니다만, 정상화를 명해주신다면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최상의 상태로 원상 복구시키겠습니다.”

“그건 당연한 일이고요. 이 사람이 궁금한 건 책임 소재입니다.”

“…….”

정승복은 다시 침을 삼켰다.

전임 병마절도사는 이미 어딘가로 도망친 지 오래. 그동안 병영을 지키고 있던 사람은 정승복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책임인가? 혹은 이런 상태를 방치했던 전임 병마절도사의 문제인가.

어느 쪽이라도 정승복에게는 피가 말리는 선택이었다. 상관에게 책임을 전가했다는 말이 도성으로 들어간다면 자신이 어떤 꼴이 될지는 뻔했으므로.

그렇다고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면 그것대로 큰일이었다.

“소, 송구합니다.”

“당연히 송구해야 할 일이지요. 하지만 실제 상황이 벌어졌다면, 송구하다는 말 정도로는 끝나지 않았을 겁니다.”

“예, 예…….”

“과거의 일은 묻지 않기로 해두었습니다만.”

“……예.”

정승복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북병사가 군적에 올라간 장정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고.

덕분에 정승복은 물론 병영 식구들은 잔뜩 긴장해야 했으나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군관들은 금천부원군이라도 보통의 수령, 병사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부사나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어 일대에서는 왕과 다를 바 없다 하더라도 실무진과 척을 지면 피곤하기는 매한가지다.

다소의 문제점을 발견하더라도 똥물이 조정까지 역류할 정도가 아니라면 경고 수준으로 봐줄 수밖에 없다.

아마 이번에도…….

“이 사람을 우습게 알았군요.”

내심 안도하고 있던 정승복에게는 느닷없는 반응이었다.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어떻게 소관이 감히 금천부원군 대감을 업신여길 수 있단 말입니까?”

“이 사람은 분명 ‘앞으로는 각별이 주의해 주시길 바란다’고 해두었습니다만. 물론 우후에게 직접 드린 말씀은 아니었지만, 감영에서의 일을 한 마디도 전해 듣지 못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

“분명 경고를 했었는데 우후께서는 스스로가 예외라고 생각하신 모양이로군요. 아니면, 정말로 이 사람을 우습게 생각한 겁니까?”

“아, 아닙니다…….”

“실수에 지나지 않았다면 법전에 따라 객관적으로 처벌하도록 하지요.”

나는 주변 군관들을 향해 명했다.

“우후를 모시게.”

고저 없이 평이한 어조였으나 추상같은 명령이었다. 군관들이 슬금슬금 정승복에게 다가갔다. 정승복은 두어 걸음 뒷걸음을 치다 벌러덩 넘어졌다.

“대, 대감! 제가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봐주십시오!”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모범이 필요한 법입니다. 우후께서 때마침 잘못하셨으니 협조를 해주세요. 그것이 죄를 더는 길입니다!”

“대감!”

정승복은 몰려든 군관 사이에 파묻혔다가, 양팔이 붙잡힌 상태로 일어났다.

처량한 얼굴이었다. 지나가다 벼락을 맞은 것만큼이나 당혹스럽고 억울한 기분이겠지. 무부로서 이런 일은 당한 적도, 본 적도 없었을 거다.

하지만 종삼품 병마우후라도 잘못을 저지른다면 몸이 성할 수 없음을 모두가 알아야 했다. 적어도 내 관할에서는, 내가 의도한 바가 곧 법이었다.

곧 정승복은 적당한 줄로 포박된 뒤 감영으로 이송됐다.

뜰에 남은 군관들은 혹시라도 불똥이 튈까 싶었는지 다들 살살 시선을 피했다.

“잠시 우후가 공무상의 이유로 직임을 이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니, 이제 나를 대신해 병영의 기강을 확립할 사람은 그대들입니다.”

“…….”

“망실된 무구를 모두 원상 복귀하라는 억지는 부리지 않겠습니다. 대신 창고에 있는 모든 무구와 물자를 확인해 수량과 상태를 냉정하게 정리해 보고하도록 하세요. 이전 장부와의 차이는 이 사람이 책임지고 처리할 테니.”

“알겠습니다.”

군관들은 적어도 자신들에게 불똥이 떨어지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명을 받들었다.

그리고 당분간은 군 생활이 피곤하리라는 것도 직감했다. 하지만 병마절도사를 말릴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비단 금천부원군이 함경도에서는 유일무이한 정이품 고관이라서만이 아니다.

보통의 수령과 병사들이 만사에 적당히 넘어가는 이유는, 문제가 상부인 조정에 보고될 경우 전임 혹은 현임인 자신 둘 중 하나가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

보통의 관리라면 자신의 관직 생활을 망칠 짓을 굳이 하려 들지는 않는 법이다.

하지만 금천부원군은 논외의 존재였다. 두 번이나 일등공신 제일인의 자리를 거머쥐었는데 고작 전임 병사가 무섭겠는가?

“주을온, 오촌, 어유간, 폐무산, 봉산에 있는 군영에도 말을 전해주세요. 곧 북병영와 같은 수준의 엄중한 조사가 들어갈 터이니 추후에 논란거리를 만들지 말라고.”

군관들의 예상은 옳았다.

금천부원군의 임기가 다할 때까지 함경북도의 군영들은 모조리 바빠질 예정이었다.

그리고 당일 밤.

“…….”

옥에 갇힌 병마우후 정승복은 나무 창살 너머로 밤하늘을 수놓은 은하수를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별생각 없이 보았던 밤하늘에 어째서 눈이 가는 것일까.

“진짜 어련히 재수가 없으려고.”

정승복은 처량하게 중얼거렸다.

과연 이순신의 예상대로, 그는 지금 상황을 억울해하고 있었다.

전임 병사는 병영 무구에 대해서는 딱히 관심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이는 중간에 우후로 들어온 정승복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새 병마절도사는 부임하고 얼마 되지도 않아 말도 없이 병영을 헤집어놓았으니, 물론 직무 소홀이겠으나 보통의 인간일 뿐인 정승복 딴에는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조정에 공문이 올라가면 나는…….”

중원과 한반도의 문명국들은 대체로 무인들에게 엄한 편이었다.

보아하니 금천부원군은 함경북도를 제대로 쑤실 생각이었고, 어쩌면 한두 사람은 정말로 죽을지도 몰랐다.

사형을 받지 않더라도 곤장 수십 대를 작정하고 때리면 반병신이나 시체 하나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으니까.

실제로 사형만 받지 않았다 뿐 장형 일백을 몰아쳐서 사실상 사형이나 다름없이 맞아 죽은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으으!”

차마 잠 못 드는 밤.

종이품에 공신 대신인 금천부원군의 난동은 사실상 천재지변이나 다름없었다.

바다에 빠진 사람이 바다를 원망하지 않듯 정승복 역시 금천부원군을 원망하기보다는, 금천부원군이라는 이름을 가진 천재지변이 자신에게 자비롭기만을 애타게 바랄 뿐이었다.

-끼이익…….

그러던 중 들려오는 경첩 소리.

정승복은 침을 꼴깍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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