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38화
48. 군주의 귀환 (2)
여진족은 단순하다.
짐승이 본능에 정직하듯 여진족 역시 원초적인 욕구가 강했고 심리는 정직했다.
숙련된 마부에게는 머리 좋은 말보다 거친 말이 더 다루기 쉬운 법이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이 북병사로 부임하게 되면서, 그대들에게 바라는 일이 많이 생겼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저희는 따르겠습니다.”
“적극적으로 응해주시니 고맙습니다. 하지만 당장은 아니에요. 먼저 알아볼 것들이 있습니다.”
“하문하시지요.”
여진족은 거친 환경과 사회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왔다. 얼어붙은 황무지와 가파른 산, 혹한의 기후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원나라가 멸망한 이후 만주 일대는 형식적으로만 명나라에 복속되어 있을 뿐. 사실상 무주공산인 상태에서 수천 개의 부족이 생겨나고 사라졌다.
살아남아 대를 잇는 것은 오직 강한 자에게만 허락되었기에 여진족 개개인은 강력한 전사였다.
때문에 이들을 통일한 세력의 탄생을 조선과 명이 괜히 방해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여진족의 일통을 절실히 바랄 수도 있는 법이다.
“주변 상황은 어떻습니까?”
김자강이 답했다.
“회령 일대는 어르신께서 떠나신 이래로 계속 평화로웠습니다. 외부는 여전히 혼란스럽지만, 어르신께서 지켜주시는 저희를 굳이 공격하려는 자는 없었지요.”
“다행이군요.”
“덕분에 순조롭게 세력을 정비할 수 있었습니다.”
여진족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끝없이 강해져야 했다.
인구는 착실히 증가하지만 척박한 토지에서 산출될 수 있는 식량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전쟁을 통해 인구를 조절하고 패배자들을 노예로 삼아 식량을 생산하지 않으면 부족의 존속이 위태로워진다.
하지만 무한한 혼란 속에서 투쟁만을 거듭하는 게 최선은 아니다. 이따금 내실을 다져야 외부의 압력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다.
단지 가혹한 여진족 사회가 그럴 여유를 용납하지 않을 뿐.
원할 때 평화를 구가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내부만 정비해서야 소용이 없지요.”
“예!”
김자강이 짧지만 단호하게 응했다.
여진족에게 내정이란 외정을 위한 것. 내가 돌아올 때까지 김자강을 비롯한 회령 일대 족장들은 무식하게 힘만 비축했을 뿐, 그것을 풀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바라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하고 명확했다.
“몸이 많이 근질근질하시겠습니다.”
“바로 보셨습니다, 어르신.”
“용케도 잘 참았군요.”
“어르신의 명이 없는데 어떻게 경거망동할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
보기보다 금칠에 유능한 김자강이다.
이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나 때문이 아니라 조선 조정을 의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국경에서 혼란이 벌어지기를 좋아하는 나라는 없다.
마치 조선이 명나라의 질서에 순응하여 국경에서 소란을 일으키지 않듯, 두만강 일대의 여진족들은 조선의 질서에 순응해 비교적 조용히 지내는 편이었다.
자칫 처신을 잘못하면 그나마 믿을 수 있는 후방의 강대국, 조선이 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다를 겁니다. 이 사람이 왔으니.”
“벌써 머리에 피가 도는 기분입니다.”
“서둘러 그 기대에 응해주고 싶군요. 하지만 무작정 싸움을 일으키도록 권할 수는 없습니다. 이 사람이라고 눈치를 볼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니까요.”
“음!”
“일단은 주변 지리와 부족들의 정보부터 확인하고 싶군요. 각 부족의 족장들, 유력자, 구성원, 물자 외에도 서로에 대한 은원이나 현 외교상태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래야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을 테니까요.”
“저희는 어르신의 명을 따를 뿐입니다.”
“머지않아 충심을 보답받을 겁니다. 일단은 정찰에만 집중해주시기를.”
“예.”
말 위에 가만히 앉아서 삭풍을 맞고 있으니 북방이 익숙한 나조차도 한기가 느껴졌다. 나는 왔던 길로 기수를 돌렸다.
“오늘은 여지까지만 하지요. 감영에서는 이 사람과 그대들 사이의 이야기는 최대한 자제하고, 꼭 필요할 때에만 여진어로 운만 띄우세요. 조선에서는 벽에도 눈과 귀가 붙어있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경성으로 돌아갑시다.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와 간만에 친우들을 만났으니 응당 대접을 하는 게 도리 아니겠습니까.”
나는 가볍게 박차를 가했다. 실컷 쉬었던 말은 다시 힘껏 내달렸다.
경성에 도착하니 을룡이 우두커니 골목에 서 있었다. 마냥 서서 찬바람만 맞았는지 얼굴이 새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거기서 뭐 하나?”
“대감!”
“그래, 제대로 보았군.”
“병마평사에게 대감께서 말을 이끌고 경성을 빠져나갔다 들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쫓아가고 싶었으나…… 어디로 가셨는지 알 수가 없어서.”
“그래서 그냥 기다리고 있었나?”
“예.”
“안에서 기다리지 않고?”
“걱정되는 마음에.”
을룡은 폐를 끼쳤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여기에서도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려고 애를 쓰는구나. 멀쩡히 돌아왔으니 찬바람 맞는 게 취미가 아니라면 들어가서 좀 쉬게.”
“알겠습니다.”
을룡은 재차 고개를 숙이고는 감영으로 들어갔다.
도성에 남아도 무방하다 했거늘.
기어코 쫓아와서는 고생을 사서 하고 있었다.
“우리도 들어갑시다.”
* * *
연회는 밤이 되어서 끝났다.
족장들은 감영 객사와 아전들의 집에 나누어 투숙하게 했다. 자리가 파할 즈음에는 다들 거나하게 취했으니 지금쯤이면 다들 곯아떨어졌겠지.
취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으나 잠은 오지 않았다. 달아오른 열기를 견디지 못해 밖으로 나왔다. 북방의 밤하늘은 유난히 밝았다.
-바스락
발소리.
나의 것은 아니었다. 손이 반사적으로 허리춤으로 갔다. 철갑상어 가죽을 두른 환도 손잡이가 자연스럽게 얽혀왔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얼굴이기도 했다.
“대감.”
“간만입니다.”
매화.
과거 소흡이 함경북도 병마사를 지내던 시절, 그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김자강을 비롯한 족장들이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그때 매화를 만났다.
그녀는 내가 다시 돌아오기를 원했다.
“대감께서 부임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꼭 소녀를 보러 오신 것만은 아니시겠지만…….”
“음, 솔직히 말해 의도한 바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만난 걸 보니 연이 없지는 않나 보군요.”
매화는 상기된 얼굴로 끄덕였다.
“날이 춥습니다. 고뿔이 들릴 수 있으니 이만 들어가서 쉬시지요.”
내가 권했으나 매화는 물러나지 않았다.
“소녀는 이곳에서 오래 살아, 이 정도의 추위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래요?”
정, 이 순간만이 이어지기만을 원한다면. 그것마저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몸을 뜨겁게 데우던 취기가 모조리 가실 때까지 뜰을 지켰다.
한참이 지나 매화와 다시 만날 것을 약조하고서 동헌으로 돌아갔다. 뒤늦게 청한 잠인 탓인지 순식간에 잠들었다.
* * *
병마평사 이원익은 유능한 사람이었다.
태안에서도 함께 일해 잘 알고 있던 바였으나 병마절도사의 업무는 운하 공사와는 다르다.
그럼에도 이원익은 맡겨진 일이라면 단숨에 해결하여, 나의 입맛에 맞는 방식으로 보고를 해왔다. 이래서 구관이 명관이었다.
“하명하신 대로 관할의 토병(土兵)을 지역별로 정리해 왔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일단 확인부터 하지요.”
“예.”
이원익이 서류를 내밀었다.
함경북도의 상비군은 총원이 약 2,500인. 팔도에서 가장 군사적으로 보강된 지역의 병력임을 감안하면 지독하리만치 적다.
조선의 병역은 16세에서 60세까지임을 감안하면 함경북도에는 남자가 고작 2,500인 밖에 없는 것인가, 싶겠으나 당연히 그렇지는 않다.
군적에 올라간 자들은 실제 군역을 이행하는 소수의 정군(正軍)과 군역을 국방세로 대체한 다수의 봉족(奉足) 또는 보인(保人)으로 나뉜다.
전자의 경우 군사 또는 행정시설에 상주하는 자도 있으나, 예비군처럼 농한기에만 이따금 모여 군사훈련만 하거나, 이마저도 없이 군포도 내지 않고 평이한 생활을 영위하는 무늬만 정군까지, 같은 정군이라도 군역의 이행은 경우와 상황에 따라 달랐다.
이중에서 그나마 상비군은 대립(代立)이라 하여 아예 삯까지 받아가며 남의 군역을 대신 지는 자들에게 전가되어, 엄밀히 말하자면 조선의 군역은 동시대 국가와 비교하면 무척 관대한 편이었다.
때문에 인구가 제법 있음에도 군적에 병사로 올라간 자들이 고작 2,500인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딱히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유사시에는 2,500인이 아니라 25,000인도 징집할 수 있을 테니.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이 중에서 토병(土兵)이 얼마나 실재하는지 궁금하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 지요?”
“군적에 이름만 올려놓은 사람이 부지기수는 아닐지, 이미 죽거나 다른 지역으로 떠나간 사람을 지우지 않고 여전히 남겨둔 것은 아닌지 의문스럽다는 얘깁니다.”
군역을 회피하는 방법이 정직하게 군포를 내거나, 대립을 세우는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아전들과 사이가 좋고 약간의 성의를 보일 수만 있다면 이름만 올려두거나 아예 다른 사람의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있겠군요. 수확도 끝났겠다, 군적에 정군(正軍)으로 오른 사람은 전부 모이라고 하세요. 병방(兵房) 아전들도요.”
“알겠습니다.”
이언적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얼굴에는 긴장이 잔뜩 묻어났다. 혹 문제가 있다면 그냥 넘어가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겠지.
운하 공사에 비해 군적을 확인하는 일은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이다.
하지만 나는 어설픈 사람이 아니다. 소흡처럼 공을 세울 일에만 핏대를 올리는 사람도 아니다.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
무엇이 되었건 간에 하자가 있다면 뜯어고칠 생각이었다.
“그럼.”
이언적은 꾸벅 허리를 숙이곤 물러났다.
그가 돌아온 것은 두 시진이 꼬박 지나서였다. 집무를 보고 있으니 밖에서 알려왔다.
“대감, 병방 아전들과 군적에 오른 이들을 모두 불러모았습니다.”
“그래요? 고생했군요.”
“아닙니다.”
“어떻습니까?”
“예.”
“이 사람이 화를 낼 것 같습니까, 안 낼 것 같습니까?”
“……그건.”
이언적은 시원하게 답하지 못했다. 그게 곧 대답이나 다름없었다.
예상했던 상황이었다. 오히려 멀쩡했으면 놀랄 일이었다.
나는 서안을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나서니 옆으로 비켜선 이언적 너머로 오와 열을 맞춰 시립한 장정들이 보였다.
“대감.”
이언적이 짧게 반응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곤 장정들을 살폈다.
도성에서도 볼 법한 전형적인 조선인부터 당장 털옷을 걸치고 말을 타도 위화감이 없는 여진인도 있었다. 나이는 십 대 후반에서 중년까지.
다만,
“이 사람이 보기에는 절대 군적에 기재된 숫자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군요.”
그럼에도 군역을 피하는 자는 많았다.
예나 지금이나 징병자들을 소모품으로만 인식하니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내가 이곳의 지휘관이 된 이상 간과할 수도 없었다.
나는 허리를 푹 숙인 병방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하실 말씀이 있다면, 지금 하시지요.”
“그게.”
병방 중 연로한 자가 나서서 답했다.
“아직 수확을 마치지 못한 자도 있었으며, 병을 얻어 거동이 힘든 자들도 있었습니다. 또 잠시 거처를 비워 만나지 못한 자들도 부지기수라…….”
“그런 자들이 태반이나 된다는 말입니까?”
“……예.”
“만일 그 말이 거짓으로 드러나면 책임을 지실 자신은 있으시고요?”
“…….”
병방은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이미 숙인 허리만 더욱 아래로 내려갈 뿐.
“과거의 일에 대해서 책임을 묻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 이후부터는 각별히 주의해 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예, 예. 송구합니다.”
“다들 해산시키세요.”
이에 병방들이 휘휘 손짓하여 장정들을 대충 해산시켰다. 성의라곤 하나도 없었다.
아마 속으로는 일이 앞으로 흔치는 않으리라, 오늘은 부임 직후 의례적인 점검이리라 생각하는 것이겠지.
부디 착각이기를 바랄 뿐이다.
명분을 쌓는 이 과정이 칼을 가는 소리임을 몰라준다면 이쪽도 피곤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