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왜 이순신이죠-137화 (137/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37화

48. 군주의 귀환 (1)

“오셨습니까? 안동부원군 대감!”

권철이 찾아왔다.

개인적으로 찾아온 건 아니겠지. 평상시라면 한창 일하고 있을 시간대였다.

선조가 움직였나.

“금천부원군.”

권철은 짧게 답하고는 뜰을 가로질러 왔다. 부담감 가득 묻어나는 얼굴. 지난 날 면담을 여전히 의식하는 건가.

너무 두려워해 궁지에 몰린 쥐처럼 나를 물지만 않는다면 무방하다. 약간의 공포는 상하분간에 도움이 되니.

“말씀하세요.”

“짐작대로…… 전하께서는 금천부원군을 요직에 쓰기를 원치 않으셨네.”

“한결같은 분입니다. 그래서요?”

“이 사람이 금천부원군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 추천하였네. 음, 오해하지 않았으면 해서 하는 말이네만.”

권철이 다급히 항변했다.

“이건 이 사람이 먼저 제안한 게 아니라 전하께서 먼저 나를 콕 집어서 어느 자리에 쓸지를 물어보셨네.”

“압니다. 이해해요. 분명 전하께서는 이 사람의 원망을 사지 않고자 안동부원군께 책임을 전가하신 것이겠죠.”

“……이해해 준다니 고맙네.”

“오히려 전하께서 이 사람을 콕 집어서 한직으로 밀어내셨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요.”

선조란 참으로 일관적인 사람이었으므로.

최대한 책임지지 않고자 하는 것이 그의 특징이었다.

그런데 직접 나선다? 비상사태가 벌어졌다는 신호나 다름없었다. 놈이 평소 자신의 캐릭터대로 행동한다는 것만큼이나 고마운 일은 없었다.

하지만 안동부원군은 내 화살의 끝이 자신에게 돌아갈까 두려워하고 있으니.

약간의 위안 정도는 주는 편이 좋겠지.

외방으로 간 나를 대신해 제삼당의 가짜 영수 노릇을 하는 권철이 아니냐.

“안동부원군 대감. 실로 적절한 대응이셨습니다. 덕분에 이 사람이 나름 연고지라 할 수 있는 함경북도로 가게 되었군요.”

“음, 마음에 들었다면 다행일세.”

“마음에 들다 뿐이겠습니까. 감사드립니다.”

권철은 안도감이 들었는지 크흠, 짧게 헛기침하며 나의 반응에 고마워했다.

욕먹을 짓을 했다곤 하나 관계를 일방적으로 정립하는 것은 권철이라도 불쾌할 수밖에 없다. 그는 노회한 신하이며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존재이니.

쌍방에 대한 존중은 필수 불가결이다.

“이 사람이 도성을 떠나게 되면, 제 사람들 중에서는 안동부원군이 최고 어르신입니다. 부디 당여들 중에서 경거망동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을 대신해서 잘…… 다독여 주시길 바랍니다.”

“걱정하지 말게.”

“양당의 반응은요?”

“당장이라도 영입할 기세더니, 외방으로 가는 게 결정 나니 금방 시들해지더군.”

“단순한 사람들이로군요.”

왕의 나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하니, 굳이 영입을 서둘러 부스럼을 만들지 않겠다는 거다.

“덕분에 귀찮은 일은 줄었습니다. 양쪽에서 번갈아 찾아와 영입을 빌미로 질질 끌지는 않을 터이니.”

나는 마루를 짚으며 일어났다. 그리고 을룡에게 말했다.

“안동부원군 대감께 드리기로 준비한 예물을 가져와주게.”

“예.”

을룡이 꾸벅 숙이고 물러나자, 권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내가 막 명나라에서 돌아온 시점이었으므로, 예물의 목록은 몰라도 가치는 능히 짐작할 수 있을 터였다.

곧 을룡이 제법 묵직한 함을 가져와 바쳤다. 나는 함을 곁에 낀 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경덕진 청백자입니다. 회회국(回回國)에서 수입한 최고급 안료와 고령산(高嶺山)에서 나온 흙으로 만들었다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군요.”

“허!”

나의 설명에 권철이 감탄했다.

회회국은 자기에 쓰이는 푸른 안료의 산지이며, 고령산은 고룡토의 어원이 될 정도로 도자기를 만들기에 좋은 흙이 나오는 곳이다.

경덕진이라는 곳 자체가 황실에 납품할 정도로 질 좋은 자기를 만들기로 유명했고 말이다.

“어찌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겠나? 귀히 모셔두겠네.”

“고작 이 정도로 안동부원군을 향한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하사품으로 받은 철갑상어 가죽도 하나 드릴 터이니 요긴하게 쓰시길 바라겠습니다.”

철갑상어의 가죽 역시 무척이나 진귀해 사치품을 장식하는 데 쓰였다. 내가 회령에서 세운 공으로 하사 받은 환도에도, 손잡이와 검집이 철갑상어 가죽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아…… 정말로 고맙네!”

권철은 저택 지붕에다 청기와를 덮고 동판을 두를 정도로 티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명나라에서 알아주는 최고급 도자기와 황제에게 하사받은 철갑상어 가죽만큼 그에게 어울리는 선물도 없었다.

두고두고 자랑거리가 되겠지.

“장인(丈人)은 여전히 공부에 열중입니까?”

권율.

그동안 바쁘게 지냈다 보니, 좀처럼 어울릴 일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접한 소식이 다음 식년시를 준비한다는 것이었는데, 그게 벌써 내년이 됐다.

“덕분일세. 이미 소과는 합격했고, 올해 말에 있을 대과 초시를 준비 중이라네.”

“장인의 잠재력은 이 사람이 진즉에 알아보았으니 노력에 부족함이 없었다면 단번에 대과에 합격할 겁니다.”

“금천부원군만 믿어야겠군.”

“한동안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으나 한 시도 응원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전해주십시오.”

“기꺼이. 놈이 기뻐할 걸세.”

나는 대청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철이 나를 방문한 것은 대화나 나누기 위함이 아니라 조정의 명을 전하기 위함이었으니.

슬슬 보내줘야 했다.

권철은 노복을 시켜 짐을 옮길 법 함에도, 도자기가 들어간 함과 철갑상어의 가죽을 각기 들고서 발을 돌렸다.

이대로 의정부로 가서 자랑이라도 할 셈인가.

여하튼 티 내는 건 참 좋아하는 자였다.

“살펴 가십시오, 안동부원군 대감.”

“편히 쉬시게. 금천부원군 대감.”

나는 골목까지 나가 권철을 배웅한 뒤 돌아왔다. 그리고 쪽마루에 앉아 한쪽 무릎에 팔을 기댔다.

결과적으로 나는 함경북도의 병마사로 가게 됐다.품계는 한 단계 낮았으나 그에 대한 불만은 없다. 단지 선조가 조정에서 나를 밀어내려고 했다는 점이 불쾌할 뿐이다.

하지만 이건 명나라에 중임을 맡고 사신으로 가게 된 것처럼 나에게 새로운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함경북도에는 회령이 있었고 회령의 강 너머에는 나에게 충성을 맹세한 여진족 부족장들이 있었다.

물론 그들이 나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은 일대 부족장들끼리 분쟁을 최소화하고, 또 연합 너머의 강성한 부족들에게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함이다.

여진족 사회에서 조선의 대신이 뒷배로 있다는 건, 조선 사회에서 명나라 대신이 뒷배로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그동안 행사하지 않았던 지배권을 정당하게 행사해야 할 때였다. 미리 연습을 시켜둬야, 나중에는 잡음 없이 여진족을 다룰 수 있을 테니까.

* * *

함경북도 경성(鏡城).

초가을에 출발했는데 도착하고 나니 함경북도는 완연한 겨울이 되어 있었다.

도성에서 몇 년 살았을 때와는 판이한, 강렬한 추위에 코털까지 얼었지만 나에게는 친근했다.

마치 고향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첫 관직을 시작한 회령이 멀지 않았다.

“대감.”

병마평사(兵馬評事) 이원익이 나를 찾았다.

황해도 금천과 충청도 태안의 공사에서 싹싹한 면모를 잘 발휘했던 사람이라, 힘을 약간 써서 데려왔다.

이원익에게는 북방의 맹추위가 혹독했는지 털갖옷에 방한모까지 뒤집어쓰고도 코찔찔이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여진족 십수 인이 찾아왔습니다. 각기가 족장이라고 하는데, 대표의 이름이 김자강이라 하였습니다.”

“음, 회령에서 일할 때 면식이 있던 친구들인데 용케도 부임 소식을 들었나보군요.”

“들일까요?”

“들라 하세요.”

“예.”

이원익은 킁, 콧물을 빨아들이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마초적인 중년의 전사들이 차례차례 들어섰다.

선두에 선 자는 무척이나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북방의 맹추위에 살이 패이기라도 한 듯 금세 주름이 불어나 있었다.

“김자강. 그새 많이 늙으셨습니다.”

“어르신께서도 매한가지십니다.”

김자강은 만면에 미소를 띄운 채였다.

자신의 뒷배인 조선 관리가 일대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북병사로 등장했으니 맹추위 겨울에 몸살을 앓고 있을 회령 너머임에도 봄이 온 듯했으리라.

“용케도 이 사람이 부임한 걸 들으셨군요.”

“다른 사람도 아닌 어르신의 소식 아닙니까. 당연히 알고서 찾아뵈야지요.”

“그건 참 감사한데. 다들 이렇게 부족은 돌보지 않고 우르르 찾아와도 되는 겁니까? 이때다 싶어서 쳐들어오는 자가 있으면 어쩌려고요?”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어르신께서 능히 힘 써주실 줄로 압니다.”

“하하하하하…….”

나는 대소하고는 살짝 고개를 치켜들었다. 집무실은 십수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함께 자리하기는 너무 좁았다.

또, 건전한 이야기를 위해서라도 이목이 많은 감영 한가운데는 피할 필요가 있었다.

“먼 곳에서 찾아오신 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여기는 너무 좁아서 다른 자리를 마련해야겠군요.”

“저희는 어디든 괜찮습니다.”

“좋아요, 좋아. 나가서 바람 좀 쐽시다.”

집무실을 가로지르니 족장들이 좌우로 비켜 셨다. 그리고 나를 쫓아오니, 마치 영화 ‘범좌의의 전쟁’과 같은 모습이 연출됐다.

그래서일까.

감영 뜰을 오가던 감영의 아전들은 발을 재촉해 흩어지더니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구간에서 말을 가져와 감영 밖으로 끌어내니, 그나마 이원익만이 쫓아와 물었다.

“대감, 어디로 가시는지요?”

“오랫동안 보지 못한 친우와 만나 잠시 바람을 쐬려 합니다. 두 시진 안에는 돌아올 터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어디로 가시는지 말씀은……?!”

나는 말에 올라타 단숨에 박차를 가했다. 이원익은 당혹한 표정을 한 채 빠르게 멀어졌으나, 여진족 족장들은 각자의 말에 올라타고서 순식간에 쫓아왔다.

역시 여진족이었다.

성문은 열린 채였고 일단의 무리가 내는 소리는 요란했으므로, 나는 거침없이 대로를 가로질렀다.

정해둔 목적지는 없었다. 회령은 몰라도 경성의 지리에 대해서는 아는 게 많지 않았으니.

단지 인적이 드문 곳만을 막연히 생각하고서 달릴 뿐이었다. 겨울의 칼바람이 귀를 때리고 얼굴을 할퀴었으나 전신에서는 도리어 힘이 솟아났다.

한참이나 달렸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후!”

나는 말을 멈춰 세우고 흑립을 뒤로 넘겼다. 정수리에 쌓인 열기가 단숨에 흩어졌다.

앞뒤로는 좁은 길이었고 양옆으로는 산이었다. 인가는 없었고 행인도 없었다. 여기라면 편하게 대할 수 있을까.

“주군.”

김자강이 눈치 보지 않고 말했다. 여진어라, 누군가가 얼핏 듣는다고 별일이야 생기지는 않겠으나 조심해야 했다.

지금의 나는 잃을 게 많아졌으니.

나는 주의하라는 뜻에서 검지를 입에 대고는, 여진어로 답했다.

“간만에 마음 편히 질주하니 속이 다 시원하군요.”

“오직 북방에서만 누릴 수 있는 자유지요.”

“맞습니다.”

가볍게 운을 뗀 나는 본론을 열었다.

“다들, 이 사람이 돌아온다니 만감이 교차했겠군요. 반기는 기분도 들었을 테고 또 걱정도 들었겠지요.”

“걱정할 게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이 사람이 그대들이 충성을 맹세한 자로서, 정당하게 지배권을 행사할지도 모르는데요. 당연히 걱정할 줄로 알았습니다만.”

“어르신께서는 저희의 목숨을 살려주셨고 거듭 전투를 이끌며 위대한 전사임을 입증하였는데, 따르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으며 걱정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믿어준다면 고마울 뿐입니다.”

여진족은 거칠고 충동적이다. 김자강처럼 부족을 이끄는 자라도 외교적 수사에는 그다지 능한 편이 아니었다.

지금 한 말이 가식은 아니겠지.

물론 충성은 영구불변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은 갈대와도 같으니. 어떤 감정이 화마처럼 타오르다가도 장작이 다하면 단숨에 사그라지는 법이다.

하지만 내가 그들의 편인 이상 그들 역시 나의 편으로 남아주겠지.

“이 사람이 북병사로 부임하게 되면서, 그대들에게 바라는 일이 많이 생겼습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