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36화
47. 충성을 바쳐라 (3)
선조는 불안하고 불쾌했다.
다시 만난 이순신은 여전히 변함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문제였다.
차라리 야욕이 있는 사람이면 모르겠으되 초탈한 사람처럼 행동하니 마음을 읽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순신을 어찌할 명분도, 방도도 없었다. 두 번이나 연속으로 일등공신 제일인의 자리를 차지했으니까.
심지어는 사은사 수행원들에게서 명나라에서 높은 품계가 받았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다. 자세히 알아봐야겠지만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는 않는 법이다.
‘이걸 어쩐다.’
이순신이 생환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한 이래로 보름은 꼬박 밤잠을 설친 선조.
그는 여전히 밤잠을 설치고 있었다. 새벽을 알리는 목소리가 궁궐을 울렸으나 선조는 여전히 서안을 낀 채였다.
그러나 쌓인 공문은 무엇 하나 펼쳐지지 않은 채였다.
선조의 머릿속에는 온통 이순신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놈은 마치 유리칼이었다.
손에 쥔다면 그 무엇이라도 베어버릴 수 있겠으나 얻기가 힘들었다. 분명 조정의 당쟁과는 확실히 겉돌고 있는 이순신이었으나 함부로 쥐었다간 자신의 손을 벨 것만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마 직감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고민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마침내 서른 세 번의 종소리마저 울렸다. 파루다. 오늘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
선조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공문은 여전히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과연 바깥의 내시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왕이 업무는 보지 않고서 밤만 샌다며 뒤에서 수근대지는 않을까? 아니, 그렇게 생각한다면 감감무소식인 왕의 용태를 걱정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러고서 단 한 사람도 자신을 걱정해 찾아오지 않고서 단지 욕만 본단 말인가?
빌어먹을 놈들! 불충한 자들! 역적들!
“…….”
선조는 속이 끓었으나, 막상 이순신에 대해 고민하던 도중 누군가 방해했다면 화냈을 것이 분명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평소 자신을 걱정하는 궁인들을 적대적으로 대했다는 것도.
그래서 아무도 자신의 안부를 묻지 않는 것이건만 선조는 그런 건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궁인들은 일정을 알리기만 할 뿐.
“전하.”
밖에서 내시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무슨 일이냐.”
“자전께 인사드릴 시간이옵니다.”
“……알았다.”
제길.
선조는 이를 갈았다.
정답이 나오지 않은 채 시간이 무심하게 그저 흘러갈 뿐인 것도, 왕대비에게 문안을 가야 하는 자신의 변함없는 일상도.
그에게는 모두 증오스러웠다.
한시라도 빨리 절대적인 권력을 취해야 하거늘.
세상은 그에게 협조적이지 않았다.
* * *
사정전.
아직 선조가 등장하지 않은 상황에서, 좌우에 시립한 중신들은 삼삼오오 근황을 나누었다.
“들었는가?”
“무엇을?”
“금천부원군이 명나라에서도 관직을 받았다는구만.”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떻게 되긴, 범접조차 못 할 사람이 되는 거지.”
당연하지만 모두의 관심사는 최근 귀환한 이순신이었다.
종계변무를 성사하였으나 대신 명나라 조정의 일에 깊숙이 관여하게 되어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그!
뭇 사람은 능력이 대단하다 칭송했고 누군가는 특명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여긴 충심을 우러러보았다.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오늘날 이순신을 대체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는데 그가 명나라에서 위해를 입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누군가는 이순신의 이름과 사주팔자를 걸고 점을 치기도 했다. 괴력난신과 음사는 믿지 않는다던 선비였으나 호기심의 힘은 어쭙잖은 신념을 능가했다.
하지만 점사의 결과가 어떻건 확실한 건 없었다.
그래서 이순신이 두 달이나 넘게 꼬박 말이 없다가 돌아오자 모두가 놀랐다. 그리고 모두가 관심을 가졌다.
과연 이순신의 다음 행보는 무엇이 될 것인가.
“다들 정숙하십시오. 주상 전하 납십니다.”
소란이 일순 멎었다.
신하들은 알고 있었다. 자신들보다도 더 이순신에게 관심 있을 사람이 바로 왕이라는 것을.
그의 앞에서 이순신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불충이나 불례를 차치하더라도 일신에 이로운 행동은 아니었다.
-저벅, 저벅, 저벅.
선조가 나타났다. 최근 살이 빠져 평소보다 더 늘어진 듯한 곤룡포와 검은 얼굴. 초췌한 인상. 그러나 여전히 형형한 안광.
그가 어좌에 자리하자 제신들이 허리를 꾸벅 숙여 예를 표했다.
선조가 입을 열었다.
“다들 어젯밤은 무탈들 했는가.”
영의정 권철이 신하 대표로 답했다.
“전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 덕으로, 무탈히 지냈나이다.”
“다행이로군. 그럼 바로 안건에 대해서 논의하겠다. 그대들 모두 금천부원군 이순신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전해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
“금천부원군은 이제 정헌대부(正憲大夫, 정이품 상계)가 되었는데 여전히 참판직을 지낸다는 것은 옳지 않을 듯하다. 하나 육조의 판서는 아직 공석이 없고, 그렇다고 타 관청에 배치하기는 실력이 아까운데 어떻게 해야겠나?”
선조가 물었다.
그러나 직설적인 물음과는 달리 선조는 희망하는 바가 있었다.
예를 들자면 이순신이 중추부 등의 명예직으로 꺼져준다거나. 하지만 바람은 어디까지나 바람일 뿐이다.
이순신을 실권 없는 자리로 쫓아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뛰어난 능력을 갖춘 데다 한창의 나이인 이순신이다. 그를 명예직에 배치하겠다는 건 숙청하겠다는 것 외에는 해석할 여지가 없다.
설령 선조를 대신해 화살받이가 되어줄 멍청한 놈이 나타나더라도, 이순신이 자원을 하더라도 윤허할 수가 없는 사안이었다.
그래서 선조는 솔직하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이 골칫덩어리를 어떻게 처리해야겠느냐고.
“…….”
그러나 어전은 조용했다.
좌우에 시립한 중신들은 마치 인간이 아니라 장식품이라도 된 것처럼 딱딱하게 서서 미동조차 없었다.
왕의 발언은 의도가 분명했고 노회한 중신들이 그것을 읽기란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쉽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선조의 특기는 불리한 선택지 앞에서 결정권을 신하에게 떠넘김으로써 책임 역시 같이 밀어내는 것이었다.
왕은 정작 자신이 이순신에게 특임을 맡겨놓고도, 이순신이 대업에 성공하고 돌아오자 처분할 방도를 찾지 못해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물론 왕이 원하는 바는 있겠지만 선조는 그것을 자처하지는 않을 터였다.
욕먹기 싫으니까.
그건 중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왕의 의사에 반할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왕의 의사에 응하고자 나서서 이순신을 한직으로 밀어내자고 지껄일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
그래서 침묵만이 이어질 뿐이었다.
분명 몇몇은 지긋한 나이로 인해, 찬바람이 들기 시작하는 초가을을 맞이하여 기침이라도 할 법 함에도 어전은 황량할 정도로 조용했다.
선조로서는 불쾌한 흐름이었다.
“어찌 제신들 중에서 입을 여는 자가 단 하나도 없단 말인가? 그대들이 지금 이 자리를 지키고 선 이유가 고작 침묵을 지키기 위해서인가!”
선조가 재촉했으나 여전히 제신들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던 중 선조는 고개를 돌렸다. 이런 때는 한 사람을 콕 집어서 물어봐야 그나마 대답 비슷한 것이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왕의 시선은 영의정, 권철을 향해 있었다.
“영상.”
“예, 예…… 전하.”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설마 영의정이나 되어서 내게 할 말이 하나도 없지는 않겠지.”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전하께서 하교하신 대로 육조의 판서 중에서는 아직 임기가 다한 자가 없으며 또 공신인 자가 많기에 쉬이 교체하기 어려운 상황이옵니다.”
“그걸 내가 몰라서 묻는 것 같은가!”
선조는 팔걸이까지 때려가며 신경질적으로 따졌다.
이에 몇몇 신하들은 영의정을 안타깝게 생각했으나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권철은 메마른 입술을 순간 핥더니 어렵사리 답했다.
“금천부원군은 진실로 충성하는 자이고, 또 배려할 줄 아는 자이오니 당장 요직에 배치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이해할 줄로 아옵니다.”
“그래서?”
“신이 듣건대 최근 함경도 변방의 오랑캐들이 날로 준동한다 하였사옵니다. 또 금천부원군은 함경도 변방의 오랑캐를 다스리는 일에는 무척이나 유능하지 않사옵니까?”
“흠.”
선조는 턱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고민하는 건 아니었다. 함경북도병마사.
적절한 대우였다. 권철이 말마따나 명분도 있고, 결정적으로 한직도 아니지만 조정이 아닌 지방직으로 내쫓을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고 걸리는 점이 없지는 않았다.
함경북도 병마사는 종이품 관직이다. 정이품 상계인 이순신이 지내기에는 급이 낮다. 과연 그가 고이 받아들일까?
이순신은 티를 안 내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진실로 개의치 않아서인지, 혹은 속에서 칼을 가는 사람이어서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후자라면 적어도 이순신이 갈게 될 칼의 끝을 자신에게 돌릴 필요는 없었다.
“병마절도사는 본래 종이품 관직인데, 행수법의 예가 있다고는 하나 공신을 우대하는 원칙에 부합한다 할 수 있겠는가?”
“…….”
권철은 답하지 않았다.
놈 역시 책임을 지고 싶지는 않았던 걸까. 괘씸했지만, 상관없었다.
이순신을 외방으로 쫓아내자는 말을 처음으로 꺼낸 사람이 바로 권철이니.
아무리 대단한 공을 세우고 세간의 이목을 사로잡은 이순신이라도 자신의 처조부를 박대할 수는 없을 거다.
선조는 흐릿하게 웃곤 답했다.
“되었다. 금천부원군은 충신이니 어찌 조정의 사정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허나 미안한 마음이 있으니 금천부원군의 처조부인 영의정이 직접 찾아가 알리고 위해주도록 하라.”
“……그리 하겠사옵니다.”
“오늘은 이만하면 되었다. 어젯밤 공무를 보느라 피곤하구나. 제신들은 물러가라.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
당상대신들이 모여, 권철을 제외하고는 다들 입 한 번 벙긋하지 않았으나 회의를 파해버리는 선조였다.
그가 밤을 샌 것은 어제의 일만이 아니다.
이순신의 생환을 알게 된 보름 전부터 제대로 잠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이순신의 처우가 결정된 지금, 안도감과 함께 피로감이 파도처럼 몰아치고 있었다.
선조는 팔걸이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정전을 빠져나갔다.
간만에 편하게 잠들 수 있으리라.
* * *
회의가 파해지고 권철은 북촌 관광방의 흰 벽돌담 집을 찾았다.
“금천부원군.”
그러자 대문이 열리고, 이순신의 저택을 지키는 진녹색 도포의 사내가 나타났다. 이름은 을룡. 해방노비 출신이다.
“안동부원군 대감.”
미천한 출신과는 달리 안색과 몸짓에는 무인의 기개가 짙게 묻어났다. 회령에서 주인과 함께 고생한 탓인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불리우는 영의정 권철조차 을룡을 업신여길 수 없었다.
“금천부원군을 만나러 왔네. 전해줄 말이 있어서.”
“안으로 듭시지요.”
권철은 계단 몇 개를 올라 솟을대문 앞에 섰다. 활짝 열린 대문 너머 금천부원군 이순신은 이미 밖에 나와 있었다.
며칠 전 권철은 자신의 저택을 찾아온 이순신에게 엄중한 책망을 받았다. 상하분간을 확실히 하기를 원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몇 년 전 선조에게 질려 낙향을 원하던 순진한 청년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분명 그때에 비해 권철은 두 번이나 공신으로 책록되었으며 자신의 자리를 노렸던 좌의정 오겸까지 쳐냈음에도.
이순신은 그보다도 훨씬 높은 자리에 올라와 있었다.
한 없이 부드러운 얼굴 아래 어떤 독기를 품고 있는지는, 노회한 권철조차도 가늠할 수 없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안동부원군 대감!”
소름이 끼치리만치 친근한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