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35화
47. 충성을 바쳐라 (2)
이순신은 돌아왔다.
선조의 바람과는 반대로.
나라의 영웅은 불청객이 되어있었다.
마치 원 역사에서의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선조가 말했다.
“바쁜 사람을 오래도 붙잡아두었군. 달포 내내 귀향하느라 고생이 많았을 테니, 편한대로 쉬게. 때가 되면 아랫사람을 통해 연락하지.”
“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어전에서 물러났다.
편전 내시는 내가 공신에 녹권되었음을 밝혔지만 선조는 말하지 않았다.
광화문을 나서니 육조거리는 올 때와는 달리 한산했다. 사람들의 관심이란 그만큼 빠르게 달아오르면서도 빠르게 식는 법이다.
그리고 북촌 관광방.
나는 저택으로 돌아왔고 대문 너머를 향해 말했다.
“문 열어주세요.”
대문이 열었다. 틈새 사이로 비치는 얼굴은 을룡의 것. 녀석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서둘러 대문을 마저 젖혔다.
“영감!”
을룡은 아예 밖으로 나와서까지 나를 마중했다.
“별고 없으셨습니까!”
“괜찮아.”
“부사만 먼저 돌아와 영감께서 명나라의 심각한 일에 휘말리셨다기에, 저택 식구들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호들갑이 따로 없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네가 가장 걱정한 것 같은데?”
“그건…… 크흠.”
을룡은 헛기침과 함께 주저하더니 순순히 인정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영감 없으면 뭣하러 삽니까?”
“부담스럽구나. 나는 이상한 소문이 퍼지는 걸 원치 않고 너도 팔자 폈겠다, 제대로 된 여자라도 만나 가정이라도 차리려무나.”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내 말 안 듣는 거 보니 걱정 안 해도 되겠다.”
나는 을룡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저택 식구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내가 등장하기 무섭게 모두 합이라도 맞춘 듯 밝은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다녀오셨습니까, 영감.”
“다녀오셨습니까.”
“영감.”
나는 식구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고는 답했다.
“다들 이 사람 없이 집을 지키시느라 노고 많으셨습니다. 별일 없었고요?”
“예.”
식구 중 하나가 답했다.
“다행이로군요. 마음 같아서는 모두와 회포를 풀고 싶지만, 달포 내내 마상 위에서 살 듯 지내서요. 사흘 정도는 죽은 듯 잠만 자고 싶군요.”
“알겠습니다. 편히 쉬시지요.”
“물대접 하나만 가져와 주세요.”
“예.”
나는 더 인사를 나누지 못해 미안하다는 뜻으로, 저택 식구들과 을룡에게 갓을 살짝 기울이고는 사랑방을 찾았다.
안채의 부인은…….
일단 쉰 다음에.
도성에 돌아와서 선조부터 보고 나니, 그동안의 피로가 복리로 이자까지 쳐서 한꺼번에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정도다.
곧 머슴 하나가 물대접을 가져왔고, 나는 소금으로 입을 헹군 다음 곧바로 이부자리부터 깔았다.
눈을 감기 무섭게 잠들었다.
* * *
눈을 뜨니 어느새 밤이었다.
구들장은 뜨끈했고 덕분에 피로도 어느 정도 가셨지만, 몸 움직이기 귀찮은 것은 여전했다. 나는 대감급의 체통도 잊고서 발을 쭉 뻗어 방문을 밀었다.
뻑뻑해서 발끝에 힘을 주니 그제야 툭, 하며 방문이 열렸다. 시원한 바람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후!”
싸늘한 공기를 맞으니 잠이 깨는 기분이었다. 머리맡에 둔 물로 입을 헹구고 나니, 발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저벅, 저벅.
방문 앞에 인영 하나가 나타났다. 달빛을 등지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나는 그의 체형이 눈에 익었다.
목소리도.
“영감.”
“을룡이냐. 안 자고?”
“영감을 수발들려면 맞춰서 자야 할 것 같아서요. 미리 자두었습니다.”
“대단한걸.”
“이것부터 확인하시지요. 미리 전해드려야 했었는데, 무척이나 피곤해하시기에 제때 전해드리지 못했습니다.”
을룡이 권자를 내밀었다. 붉은 비단이 돌돌 말린 권자였다.
흐릿한 달밤이라 글자를 보기 힘들었으므로 나는 촛대에 불을 켰다. 단숨에 방이 밝아졌다. 서안을 끌어당겨 권자를 펼치니 내용물이 나타났다.
공신녹권이었다.
“이거였나.”
편전내시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말하는 바람에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내용은 역시나 나를 일등 광국공신인 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공신(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 제일인. 군호는 금천군에서 금천부원군으로.
‘웃기는군. 수충(輸忠)이라…….’
수충의 뜻은 충성을 다했다는 뜻이다. 마치 선조가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처럼 들렸다.
충성을 다하라고.
같잖은 발상이다.
녹권에는 이외의 하사품 목록도 빠짐없이 기재되어 있었다.
특별한 것은 없고, 이전의 중흥공신 때도 받았던 땅, 옷감, 약간의 공노비와 사치품 몇 개가 다였다.
‘이중 공신인가.’
그마저도 모두 일등공신 제일인이다.
조선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이중으로 공신이 녹권된 자가 얼마나 있을까 싶은데 일등공신 제일인을 두 번이나?
아홉 번의 시험에서 장원을 거두어 구도장원공이라는 이명을 가진 이이조차도 내 앞에서는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동전에는 양면이 있으며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이다.
공신 자체가 카르텔을 형성하여 핵심 인물이 권신으로 발전하기 쉬운 존재다. 그런데 두 번의 공신 녹권에서 모두 일등공신 제일인이라면?
재벌가의 독자와 재벌가의 독녀가 만난 것 이상으로 압도적인 힘을 가질 수 있었다. 당연하지만 왕이 경계할 수밖에 없다.
‘선조는 내가 명에서 뒈지기를 간절히 바랐겠군.’
하지만 어쩌겠나.
몸 성히 돌아왔다.
명예직이라곤 하나 명나라의 종삼품 품계까지 달고서.
세종이 독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자 무고한 대신마저 잔혹하게 숙청했던 태종마저도, 명나라에서 관직을 얻은 한확을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다.
이건 세종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선조라고 별수 있겠는가.
어설프게 위해를 가하려 든다면 명나라에는 조선의 왕이 반항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테고, 제신들은 왕이 미쳐서 유능하고 충성하는 공신마저 핍박한다고 생각하겠지.
이미 독재적 행보로 적을 많이 만든 선조에게 나의 존재는 그야말로 용의 역린이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대놓고 강짜를 부려도 된다는 뜻은 아니겠지…….’
권신 놀음도 좋지만 선조는 미친놈이다.
굳이 선을 넘지 않아도 나를 못 조져서 안달일 텐데, 굳이 자극할 필요는 없다. 놈이 둘 중에 한 놈은 뒤져보자는 식으로 나오면 나라고 천하무적은 아니니까.
때가 무르익기 전까지는 처신을 잘해야 했다.
* * *
“대감.”
나는 권철의 집을 찾았다.
그의 지나친 환대에 내가 불만을 표해서인지, 권철은 나를 반기면서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때마침 나 역시 그때의 일로 방문한 참이었다.
“오셨는가, 금천부원군. 더 쉬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족을 뵈는 일인데 미룰 수 있겠습니까.”
“이 늙은이를 가족으로 생각해준다니 망극하군…….”
약간은 빈정대기까지 하는 느낌.
딴에는 피차 이롭자고 환대를 했는데 명령조로 까댔으니 삐질 법도 했다.
“창의문 아래에서는 약간의 오해가 있었지만 너무 의식하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일부러라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만 않으실 생각이라면요.”
“같은 실수는 벌어지지 않을 걸세, 금천부원군께서 두 눈 시퍼렇게 든 채로 보고 계시니.”
이게 또다시…….
“이보세요, 안동부원군.”
권철 역시 과거의 영의정 홍섬과 마찬가지로, 대업이 이루어졌을 때 의정대신을 지내고 있다는 이유로 일등공신에 올랐다.
그때 받은 군호가 안동부원군이었다.
“지금 착각하고 계신 듯합니다. 제가 분명 회맹연 이후 사람들 다시 불러 모아서, 한동안은 서인에게 녹아들어 존재감을 감춰야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
“지금 서인의 영수 놀음에 너무 취하신 듯한데, 부니 그 역할에 너무 매몰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권철은 중흥공신 이등이었고, 이제는 광국공신 일등이었다.
게다가 영의정의 직책까지 지내고 있으니 서인에게 영수로 추대받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게다가 나를 대신해 서인으로 위장한 제삼당 당여들에게도 푸시를 받고 있어, 서인 내에서도 입지 기반이 탄탄했고 말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위장에 불과했다.
매몰된다면 역할놀이에 취해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당여들은 어디까지나 나의 사람이었고 제삼당의 본질은 나에게 있다. 이런 질서에 소속된 채로 가짜 권력을 맛보니 이성을 잃은 듯한데, 내가 손을 보려 든다면 서인의 영수도 무적은 아니었다.
나는 이 의견을 에둘러서, 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영수가 당여를 치게 되는 계기는 여럿이 있습니다만, 대체적인 이유는 바로 당여가 자신의 분수를 냉정하게 보지 못해서입니다.”
기어오르는 자는 영수의 권위를 손상시킨다. 나아가 그것이 자신의 자리를 꿰차려 들거나, 적의 편에 붙는 등의 야망으로 해석된다면 숙청은 불가피했다.
권철이 항변했다.
“물론 이 사람이 금천부원군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건 알고 있네. 하지만 이래 봬도 나는 이 나라의 영의정이고, 금천부원군에게는 처조부 되는 사람인데 이렇게까지 엄하게 대해도 되는 건가?”
“이 사람은 이 나라의 일등 중흥공신 제일인. 안동부원군을 이등 중흥공신으로 만들어준 사람! 그리고 일등 광국공신 제일인! 영상을 일등 광국공신으로 만들어준 사람! 그리고 당신의 손녀사위로 관직을 잃었던 폐물을 영의정으로 만들어준 사람입니다.”
“…….”
“아, 한 가지 더. 이번에 명나라에서 산직이라고는 하나 이중대부(亚中大夫, 명나라의 종삼품 명예 품계)에도 제수되었습니다. 명을 장악한 실권자 장거정 외에도 여러 중신들과도 연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하는군요.”
이어지는 스펙 나열에 권철의 얼굴에 짙은 놀라움과 당혹이 피어났다. 이국이라지만 조선이 따르는 명나라의 관직을 이 나라의 영의정이 모를 수는 없었다.
종삼품 명예직이라고는 하나, 명나라에서는 엄연히 외부인인 조선 관리가 받은 품계였다. 이는 시사하는 바가 컸다.
“이만하면 이해하셨을 겁니다. 이 사람은 처조부와 얼굴을 붉힐 생각은 없어요. 여기에서 끝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발생하는 것을 용납할 생각은 더더욱 없으니, 부디 자신에게 쥐어진 권력의 발원을 명심하시길 간절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알았네…….”
“조만간 전하께서 저를 견제하실 겁니다. 입지가 너무 커졌으니…… 아마 지방관직을 맡기겠지요.”
“내가 어떻게 해야겠나?”
“어지간하면 응해주십시오. 너무 쉽사리는 아니고, 약간은 주저하면서도 전하의 기분이 상하지는 않을 정도로.”
“……알겠네.”
“좋습니다.”
나는 낯빛과 어조를 부드럽게 바꾸며 말했다.
“오늘은 처조부께 실례가 많았습니다. 사죄의 뜻으로 이 손녀사위가 머슴 몇을 보낼 터이니 긴히 써주시기를.”
말이야 사죄의 뜻이지 감시나 다름없었다. 실제로도 감시가 맞았다.
권철의 안색에 혈기가 빠져나갔으나 그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고, 고맙네. 금천부원군…….”
“그럼.”
나는 권철에게 묵례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