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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33화 (133/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33화

46. 신산귀모의 수 (3)

족히 달포 동은 회동관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와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았고, 필요한 것이 있다면 수행원을 시켰다.

장거정 파는 나의 이름을 앞세워 토지 전수조사를 시행했다.

반대파는 소국의 사신 따위가 감히 내정간섭을 한다며 사신은 벌하고 장거정은 퇴출해야 한다며 반발했다.

양측이 팽팽하게 맞서는 동안 어떤 날에는, 회동관 근처에서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몇 번이고 났다. 별일은 없었지만 나와 수행원들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하지만 시일이 흘러 순천부를 중심으로 막대한 양의 은결이 발견되자, 반대파의 기세는 순식간에 기울었다.

순천부를 포함한 전국의 체납액은 일체 감면되었으나 본보기 차원에서 중신 몇 명이 죽거나 유배를 당했다. 장거정 반대파의 핵심 인물들이리라.

그리고.

“이 공(公).”

손님이 찾아왔다.

“대인.”

예부시랑 임사번이었다.

몇 번 보지 않은 사이였으나 그는 어느 때보다도 상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공(公). 그동안 숙소에서 칩거하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소. 덕분에 순천부 체납액은 성공적으로 감면되었소이다.”

“제 노고랄 게 있겠습니까. 다 나라를 위해 애쓰는 대명의 충신들이 일궈낸 결과지요.”

“공께서도 대명의 충신이긴 매한가지지요. 일이 잘 풀렸으므로 장 수보께서 친히 공을 보고 싶어 하니, 나와 같이 뵈러 갑시다.”

“아, 그렇다면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의관을 먼저 정제하지 않고서 수보 어른을 뵐 수는 없으니까요.”

“물론이오. 나는 여기서 기다리겠소.”

임사번에게 양해를 구한 뒤 나는 사랑방을 찾았다. 그리고 관복으로 갈아입고서 의복을 깔끔하게 정리한 다음 나섰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아니외다. 그럼 따라오시오.”

회동관을 나오니 맞아주는 것이 있었다.

가마다. 물론 예부시랑은 명나라에서도 정삼품인 당상대신이다. 조선에서도 원한다면 가마를 타고 도성을 거닐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곁에서 걸어가란 말인가?

아니다.

가마는 하나가 아니었다.

“타시게.”

임사번은 뒤편의 가마에 팔을 뻗어 권하고는, 내가 무어라 물어볼 틈도 없이 자신의 가마에 올라탔다.

……까라는 대로 깔 수밖에.

두 다리가 멀쩡한 탓으로 나는 조선에서도 가마를 타본 적이 없다. 그런데 명나라에 와서 가마라니…….

자리하자 앞뒤에 자리한 장정들이 끙, 하는 기합 소리와 함께 가마를 들어 올렸다. 비록 지붕도 없고 벽도 없어 급이 낮은 가마임은 알겠으나 호사는 호사였다.

마치 구름을 타고 앉아가는 기분이라던가?

가마를 멘 장정들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가마가 너울거리듯 흔들렸다. 그러나 말안장 위처럼 거칠지는 않다.

실로 구름 위에 앉아 세상 아래를 내려다보며 천하를 주유하는 기분이다. 단숨에 시선의 높이가 올라가, 대명 수도조차 오시할 수 있으니…….

그런데,

“……?”

한 쌍의 가마는 골목을 꺾더니 천안문을 향해 직진하고 있었다.

정거정을 보러 간다더니 설마 이대로 입조하는 거냐.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천안문에 다다르자 장정들이 가마를 내려놓았다.

임사번이 물었다.

“어떤가?”

가마에 대한 소감을 묻는 건가.

“망극할 뿐입니다.”

“조선에서는 몰라도 북경에서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되어 있네. 하지만 이 공(公)은 동국의 사신이지만 세운 공이 있으니 괜찮지.”

“혹여나 대국 도성의 규율을 농락하였다는 이유로 벌을 받지는 않을까 우려스럽습니다. 말씀드렸듯, 소인은 동국의 사신이니 근신하여 처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닐걸세.”

“……?”

임사번은 의아한 말만 던져놓고는 천안문으로 나아갔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쫓을 수밖에 없었다.

내부의 광경은 한 차례 사신으로서 입조할 때 보아두었기에, 이전과 같은 감흥은 없었다. 다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당혹스럽기만 할 뿐.

태화전으로 나아가니 명국의 중신들이 나와 임사번을 맞아주었다.

환관이 알렸다.

“예부시랑 임사번, 조선국 사신 정사 이순신 입시요!”

쥐어짜는 듯한 환관 특유의 외침이 있었고 임사번은 좌우 대신들의 대오 중 자신의 자리를 찾아 녹아들었다.

덩그러니 놓인 나는 단지 황좌 앞으로 나아갈 뿐. 허리를 깊게 숙여 예를 표하니 황좌보다 몇 계단 아래에 서 있던 장거정이 입을 열었다.

“조선국 사신 이(李)는 들으라.”

양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이니 장거정이 들고 있던 권자를 펼치며 선언했다.

“뭇 사람들은 그대의 간언을 두고서 조공국의 사신에 불과한 자가 감히 대명의 조정에 간섭한다고 평하지만, 공론만 분분하였던 일을 마침내 종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으니 어찌 잘못만을 지적할 수 있겠는가.”

“…….”

“오늘날에 이르러서 대명의 일이 크게 진전되고 나라에 즐비하던 장리(贓吏)를 가려내어 일벌백계의 표상으로 삼으며, 나아가 대업을 그르치려는 사특한 무리에게 경고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국 사신 이(李)가 대명과 황제에게 진실로 충성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여러 국왕과 뭇 신하들이 본받아 마땅한데 어찌 은상을 내려 모범으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이(李)를 이중대부(亚中大夫, 명나라의 종삼품 명예 품계)로 초수(初授, 처음으로 관직을 내림)하니 이(李)는 알라.”

“……!”

깜짝 놀랄 만큼 파격적인 대우였다. 조선의 관리 중에서 명나라 관직을 겸한 자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개중에서도 자신의 두 누이가 황제의 후궁이 된 한확이 받은 관직이 광록시 소경이다. 종사품 상계 실직.

명예직에 불과하다고는 하나 의전상으로는 종삼품인 내가 한확이 받은 종사품 광록시 소경을 능가한다.

역사책에도 이름이 올라가겠군.

나는 황제를 향해 거듭 절을 올려 감사를 표하고는 허리를 숙인 채로 일어나 말했다.

“폐하……. 신이 비록 조선국에서 먼저 관리로 기용되었다고는 하나, 대명의 질서에 순응하는 조공국의 신하로서 단 한 번도 폐하를 향한 충심을 잊은 적이 없는데, 일개 사신의 신분임에도 처신을 바로하지 못하고 무례를 끼쳤거늘 하해와 같은 은혜로 소신의 과를 공으로 덮어주시고, 또 두터운 은상과 과분을 포상으로 마땅한 충성을 크게 치하해주시니, 신 이(李)가 어찌 죽는 지경에 이르더라도 오늘날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신 이는 설령 조선으로 돌아가더라도 대명의 신하 된 자로서 매일 같이 대명을 향하여 절을 올리고, 폐하께 축수를 올리겠나이다!”

나는 일어나 두 팔을 들며 외쳤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그렇게 예를 표하자 장거정은 들고 있던 권자를 말아 곁의 환관에게 건넸다. 환관은 권자를 받들고서는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와 나에게 건넸다.

옻칠한 나무에 금색 비단을 두른 권자. 내부에는 나를 이중대부 품계를 내린다는 황제의 교지가 들어있을 터였다.

나는 무릎을 꿇은 채 두 팔을 높이 들어 권자를 받아들었다.

“이 공(公)이 진실로 대명의 일에 한 팔 거들었기에 포상을 내리는 것이오.”

장거정이 말했다.

“소관, 오늘날 폐하와 대인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명나라의 신하가 되었으므로 소인 대신 소관을 썼다.

장거정이 강조하듯 말했다.

“동국으로 돌아가서도 폐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잊지 말도록 하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나의 역할이 다한 지금, 사실 장거정이 나에게 명나라의 품계를 내려줄 이유는 없다.

자신에게 협조한 대가는 종계변무로 충분했다. 내가 조선으로 돌아가면 또 공신으로 녹권될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럼에도 명나라 관직까지 내리는 것은 다른 생각이 있어서겠지.

‘회유, 그리고 조선에 대한 압박.’

장거정은 이번 일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내부 정비에 들어갈 터였다. 세제개혁은 물론 반대파 숙청도 포함해서 말이다.

작업이 끝날 때까지 명나라는 외부에 시선을 돌릴 여력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잡음을 낸다면 명나라는 피곤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에게 높은 관직을 쥐어서 돌려보내는 것이다. 이만큼 콩고물을 먹여줬으니, 장거정 대신해 내가 조선에서 명나라의 영향을 공고히 하고 잡음을 방지하라는 차원에서.

‘걱정하지 마시오, 조선도 한동안은 내부 정비로 바쁠 터이니.’

장거정이 담담히 말했다.

“이만 돌아가시오. 그동안 대명이 그대를 너무 오래 붙들고 있던 것 같군.”

북경에서의 내 역할은 다했으니 이만 떠나라는 축객령이었다. 안 그래도 떠날 생각이었던 나는 황제에게 예를 표한 다음 물러났다.

* * *

달포 뒤.

도성이 고작 이틀거리 남은 개성. 아직 외곽에 불과함에도 황해감사 이이는 친히 나와 나를 맞아주었다.

“돌아오셨나, 금천군!”

“예, 형님.”

“하하하. 내가 금천군에게 간만에 형님 소리를 들어보는군.”

“이전에 개성을 지나쳤을 때는 족히 두 달 반은 전이니까요. 그러고 보니 시간이 많이 흐르기는 하였습니다. 간만에 형님의 존안을 보니 기분이 묘하군요.”

“이 사람도 그러네.”

이이는 개성을 향해 기수를 돌리며 말했다.

“남은 회포는 쉬면서 푸세. 나라를 위해 크게 고생한 사람을 밖에 세워두기만 한다면, 설령 문초를 당하더라도 할 말이 없을 거야.”

“설마요.”

“설마가 사람 잡는 법이네, 금천군.”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형님을 위해서라도 일단은 발을 재촉해야겠군요.”

수행원과 공노비들은 이이가 동행한 아전들에게 맡기고서, 나와 이이는 먼저 개성으로 돌아왔다. 흙길 좌우로는 논밭이 지평선 산 아래까지 펼쳐져 있었는데 녹색 들판이 금색 들판으로 한창 변하는 중이었다.

더울 때 출발했으니 확실히 시간이 많이 흐르긴 흘렀다.

선선한 바람을 헤치고 개성 관아에 도착하니 이이가 친히 객사까지 안내해 주었다. 여장을 푸니 이이가 물었다.

“일단 쉬시겠는가, 아니면 회포부터 푸시겠는가?”

“전자는 예의상 물어본 말씀 같으니 회포부터 풀도록 하겠습니다.”

“이보게, 금천군. 이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말게. 정말 피곤하다면 쉬어도 된다고.”

“하하하. 아무리 피곤해도 형님과 간만에 만났는데 회포부터 풀지 않고 배길 수 있겠습니까?”

국경을 넘은 다음에는 충분히 휴식을 취하면서 내려왔기 때문에, 피곤하긴 했지만 휴식이 절실하지는 않았다. 여독을 다스리는 것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만난 지인과 한껏 회포를 푼 다음으로 미뤄도 무방하리라.

“그럼 바로 술자리를 준비하겠네.”

“소박하게 주안상 둘만 챙겨서, 저랑 형님만 사이좋게 마십시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조금만 기다리시게.”

이이는 물러나서 반 각도 되지 않아, 직접 아전과 함께 술상을 끌어안고 돌아왔다. 술상과 함께 객사로 들어선 이이는 모자까지 벗어 벽에 걸어놓고는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자!”

먼저 술병을 기울인 사람은 이이였다. 내가 술잔을 두 손으로 감싸 공손히 받아드니, 이이 역시 두 손으로 공손히 술병을 잡아 기울였다. 양측의 잔이 채워지자 말을 맞추기라도 한 듯 두 잔이 동시에 기울어졌다.

“크으으!”

나는 감탄을 흘렸다.

“명나라에서 좋은 술이란 술은 다 마시고 왔을 텐데, 고작 관아에 비축된 접대용 술에 그리 감탄한단 말인가?”

“명나라 술이 어디 술입니까. 이 사람이 대취한 다음날 소피를 받아놓아도 그게 명나라 술보다는 더 술 같을 겁니다.”

조선의 술은 명나라 사람들도 인정할 정도로 독하다. 한때는 주신인 정철과도 술을 나누었던 내가 고작 명나라의 허접한 술에 만족할 리 있겠는가? 게다가 명나라에서는 가장 중요한 안주를 곁들일 수가 없었다.

바로 인연이다.

“하하하하!”

이이는 대소하고는 다시 내 잔을 채워주었다.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니 이이가 붉어진 얼굴로 물었다.

“금천군이 명나라에서 고생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기왕 자리한 김에 나에게도 말해주게.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겐가?”

“먼저 보낸 아계가 어지간한 말은 다 했을 텐데요.”

“아!”

이이는 단말처럼 고함을 내지르고는 말했다.

“물론 아계도 금천군이 한 고생을 말해주기는 했지. 신산의 계책과 귀모의 수법을 동원하여 종계변무를 성사했으나, 대명 조정의 일에 연루되어 생사는 알기 어렵게 되었다고.”

이이는 흥, 불쾌하다는 듯 콧바람을 흘리고는 말했다.

“아무리 금천군의 당부가 있었다지만 부사라는 사람이 어떻게 대업을 이룩한 금천군을, 생사조차 가늠할 수 없게 된 이역만리에 홀로 두고 올 수가 있단 말인가? 겉보기와는 달리 어설픈 사람 같으니라고.”

“제가 살아서 돌아왔으니 그만 아닙니까.”

“그래. 그렇지 않았으면 내가 아계의 생사도 가늠할 수 없게 만들었을 테니까.”

“하하하…….”

나는 멋쩍게 웃었다.

“그런데 신산의 계책과 귀모의 수법이라니. 과장이 심하군요.”

“200년 동안이나 누구도 이룩하지 못한 일을 단숨에 성사했는데 신산의 계책과 귀모의 수법이라 표현해도 과장은 아니겠지. 하지만 아계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금천군에 대한 존경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한 일이 없어 잘 모르기 때문일 거야. 솔직하게 답해주시게. 아계가 도움은 안 되었지?”

“으음…… 하하.”

나는 웃음으로 긍정했다.

이산해를 동행시킨 이유는 먼젓번 운하 건으로 입지가 위태해졌기 때문이다. 딱히 역할을 바라고서 동행시킨 것이 아니다보니 실제로 딱히 한 일도 없다.

“대신 수정된 대명회전을 고이 가져오지 않았습니까.”

이이의 말을 들어보니 내 공을 훔친 것도 아니고.

그 정도면 양반이었다.

“제길, 두 발 달리고 두 손 사람이라면 아계가 아니라 누구라도 할 수 있었을 걸세. 부사가 괜히 부사인가? 정사를 보조하라고 부사인 것을. 그래놓고 공신이 되겠지? 흥!”

“너무 미워하지 마십시오.”

“동생은 너무 선해서 탈이야.”

“그럴 리가요.”

몇 번 술잔을 나누니, 가져온 병들이 금세 동이 났다.

피차 공무와 일정이 있는 몸이라서 술자리는 여기서 끝내기로 했다. 이이는 아랫사람을 시켜 술상을 정리하게 하고는 나에게 인사했다.

“이 사람은 이만 물러가네.”

“예. 형님께서도요.”

“도성에 가게 되면 잔뜩 긴장하게.”

“뭔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그걸 여기서 말해주면 재미없지. 쉬시게!”

이이는 실실 웃으며 객사의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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