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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32화 (132/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32화

46. 신산귀모의 수 (2)

뜰에 모인 수행원들은 임사번을 위해 길을 내주었다.

임사번은 한데 모인 사람들을 보며 의아해하면서도 나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 이 공(公).”

“예의상 덕분에 잘 지냈다고 답해드리고 싶지만요, 하하.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전전긍긍하고서 지냈습니다.”

“종계변무 때문이겠지?”

“예.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이게 마음에 들 걸세.”

임사번은 왼팔 소매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양질의 재질로 만들어진 표지에는 멋들어진 필체로 제목이 쓰여 있었다.

萬曆重修會典

만력중수회전, 즉 명나라의 역사서인 대명회전의 증보판이었다.

“아직 황상께서 검수하지 않으신지라 확정된 건 아니지만, 하늘이 두 쪽이라도 나지 않는 한 내용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걸세.”

“소인에게 갑자기 회전을 주시는 이유가…….”

“수보께 인가를 받았네. 이전 대명회전에 있었던 강헌왕(康獻王)의 족보는 바로 고쳐졌어. 이게 이 공께서 진심으로 원하던 것이지?”

강헌은 명나라가 태조 이성계에게 내린 시호였다. 즉, 종계가 변무된 것!

“……!”

나는 깜짝 놀랐다.

별달리 한 일도 없는데, 고작 기름칠 좀 했다고 장거정과 예부시랑이 나서서 바로 수정본을 내어주었다고?

혹시 장거정과 임사번은 천사인 거냐…… 싶었지만 정계는 그렇게 순진한 발상이 통하는 바닥이 아니었다.

분명 대가가 있겠지.

하지만 그것을 굳이 지적하지는 않기로 했다.

“강헌왕의 족보가 고쳐진 부분을 직접 보여주지.”

임사번은 미리 꽂아두었던 책갈피를 이용해 바로 문제의 부분을 보여주었다. 조선의 왕들을 200년 동안이나 괴롭혔던 구절은 정상적인 내용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어떻게든 접촉이 있으리라 예상은 했지만, 대뜸 저쪽에서부터 해결을 해버린 뒤 결과물을 가져올 줄은 몰랐다.

달리 말하자면 그만큼 나에게 바라는 것이 크다는 뜻이었다.

“황상께서 검수하시고 인가를 내리시면 그때는 만력중수회전을 한 질 째로 보내겠네.”

“망극할 뿐입니다.”

상대방이 성의를 보였다면 나는 응할 뿐이다. 본론을 위해 문제가 해결된 만력중수회전의 중간권을 이산해에게 건네니, 이산해는 책을 받아들고 무릎을 꿇었다.

“대인!”

“아, 이 공(公) 일어나시오. 진즉 해결해줘야 했을 문제인데 오히려 이제야 해결된 것이라, 너무 고마워한다면 부담스럽소.”

“아닙니다, 대인. 대인께서는 소인만 아니라 여기 자리한 모든 사람의 목숨을 구하셨습니다.”

“음……, 조선국왕이 엄포라도 놓았단 말이오?”

“그것이.”

이산해는 나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조심스럽게 ‘고자질’했다.

“기약 없이 기다리기만 며칠째라, 금천군이 직접 칼을 차고 소인을 포함한 수행원 전부를 이끌고 장 수보의 댁으로 나아가, 하나하나 목을 치며 종계가 오랫동안 변무되지 않은 일을 목숨으로 성토하려 하였습니다.”

“허, 허어어…….”

임사번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깊게 탄식했다.

“일단은 해결이 되었으니 그만이오. 나는 정사 이 공(公)과 긴히 나눌 말이 있으니 부사께서는 사람들을 해산시키고 마음을 추스르시오.”

“예, 대인. 대인께서 소인의 목숨을 구제해주신 은혜는 조선으로 돌아가더라도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임사번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산해는 수행원들을 흩어놓고는 본인도 어딘가로 도망쳤다.

나는 임사번을 이끌고 이전에 만남을 가졌던 정방으로 안내했다. 임사번은 익숙하게 자신이 앉았던 곳에 다시 자리했다.

“대인.”

“이 공(公).”

“덕분에 올 때는 수십 명이었던 사신단이 한 명이 되어 돌아가는 일은 없게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나는 공이 이렇게까지 강단이 있는 사람인 줄 몰랐소이다. 부사마저도 예상치 못한 듯한데.”

“사람을 모집할 때부터 목숨을 걸고 대업을 완수할 자를 구한다고 했는데 부사가 새삼스럽게 놀라기에 저 역시 조금은 당혹스러웠습니다.”

“말뿐인 줄 알았던 게지. 고향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대명의 수도에서 다른 사람의 손에도 아닌 공의 손에 목이 떨어질 줄 누가 알았겠나?”

“하하하.”

나는 가볍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큰 후의를 입었으니, 선비된 자로서 마땅히 도의를 쫓아 은의를 갚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개 사신에 불과한 사람이기에 오만하게 들리실 수도 있으시겠지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흠.”

임사번은 짐짓 고민하는 척 콧바람을 내쉬고는 답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순천부의 세액이 사 년 동안이나 밀린 일로 조정이 많이 번잡하오. 송구스럽게 되었지만 그대 사신단에 대한 예우가 빈약했던 것도 그 때문이고.”

“예우 이상의 큰 은혜를 입어 무방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문제는 조정에서 순천부의 체납된 새액을 감면하느냐 마느냐로 논란이 분분하다는 거요. 이 공(公)이라면 고견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게 나에게 바라는 대가로군.

장거정은 세제개혁을 위해 힘쓰고 있다. 하지만 개혁이란 언제나 반발을 불러들이기 마련이다. 분명 반대편이 하나하나 발목을 잡으며 반대하고 있겠지.

순천부의 체납액도 그래서 발생한 논의일 터였다.

세제개혁은 일국의 조정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세입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만큼, 결단이 되었다면 주체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순천부에 거액이 묶여 있어서야 개혁이 되겠나?

순천부 백성 하나하나가 체납한 세액을 은화로 전환해 다시 기재해야 한다. 그런 짓을 무식하게 하고 있다간 세제개혁은 까마득하게 된다.

그리고 논의가 되었으나 시행되지 않고 지지부진 미뤄지는 개혁은, 언제나 좌절되기 마련이다.

장거정은 분명 순천부의 세액이 면제되기를 바랄 터였다.

“찬반의 논의가 분분하고 양쪽 모두 주장에 정통성이 있다면, 기약 없는 논의를 이어가는 것은 상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이렇게 말씀을 드려 송구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은 다 똑같다는데 대명이라고 특별하게 유별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무슨 뜻이신가?”

“개혁을 반대하는 자들은, 물론 진심으로 개혁의 방향성이 옳지 않기 때문에 반대하는 자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이권이 걸렸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겠지요.”

“그렇네.”

“대안은 거기에서 찾아야 한다 생각합니다.”

물론 장거정이나 그의 수하들이 이조차 생각하지 못했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나를 찾아온 이유는, 내가 사신이라는 자리에서 특별한 역할을 해내기 마련이겠지.

예를 들자면 반대파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쓴다든지. 사신이니 조선으로 돌아가고 나면 어찌할 방도가 없다.

다소 파격적인 방식을 제안하더라도 장거정 측에서는 나에게 책임을 전가해 반발과 반격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 타국 사신의 주장이기에 객관적인 입장이나 판단 등으로 포장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흠…….”

나는 잠시 고민했다.

순천부 반대파들이 무엇을 지키고 싶어 하며, 무엇이 약점인지를.

일단 장거정 파의 세제개혁은 매우 좋게 볼 수 있었다. 그들 역시 부패하고 탐욕스럽기는 매한가지지만, 세제개혁은 장거정 파의 비리 개입 여지마저 최소화한다.

나라를 위한 결단도 좋고, 주장 자체가 가진 정당성도 좋지만 내가 가장 쓸 만하게 여기는 부분은 달랐다.

장거정은 세재개혁을 위해 다소의 이익을 포기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지킬 게 많은 쪽일수록 태도는 수비적일 수밖에 없었다.

장거정이 좀 더 공세를 취할 수 있다는 점은 내가 다소 과격한 제안을 해도 무방하는 것과 명백한 시너지를 이루고 있었다.

“이건 어떻겠습니까?”

조심스럽게 운을 떼자 임사번이 침을 꼴깍 삼키며 귀를 기울였다.

“말씀하시게.”

“현실적인 이유로 토지조사에는 정성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명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부끄럽지만 사실이네. 족히 백 년은 넘는 세월 동안 대명의 토지조사는 명목상으로만 시행되어왔네. 과거의 장부를 베껴 쓰는 정도에 지나지 않으니까.”

“세제개혁은 근본적으로 토지 및 호구 조사를 수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 수보께서도 염두에 두고 계시지만, 소인이 권하는 것은 대대적인 토지조사를 시행하여 그동안 신고가 누락된 전국의 토지를 속속들이 밝혀내는 겁니다.”

“음…… 반발이 무척이나 클 텐데.”

“은결(隱結, 숨긴 땅)과 그와 관련해 체납된 세액이 분명 수백만 냥은 될 테니까요. 우려하시는 대로 분명 반발이 클 겁니다.”

“흠, 일을 크게 만들어 묻어가자는 건가?”

아무리 순천부의 체납액이 크더라도 전국의 대지주가 숨겨놓은 은결을 쑤셔대면 결국에는 전체 체납액의 일각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그것도 계책 중 하나이지만, 제가 진정으로 권하는 계책은 은결과 관련된 벌금과 체납액을 전체 감면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흠…….”

“지금 반대하는 자들이라고 친척이나 문중이 없는 건 아니겠지요. 일이 커지고 잃을 게 많아지면 목숨을 걸기보다는 타협을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호오.”

임사번은 감탄을 흘렸다. 썩 그럴싸한 계책이었다.

자신의 위치를 잘 이용한 계략이었다.

이순신의 발언은 다소 과격하더라도 곧 떠날 사람이기에, 예봉으로 앞세운 다음 기세가 꺾이기 전에 조선으로 피신시키면 그만이었다.

역풍이 불 단초가 없어지니 반대파는 갈피를 잡기 어려워지겠지. 혼란해하는 사이, 이순신의 말마따나 일이 커지고 잃을 것도 많아지면 타협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신묘한 계책일세. 하지만…… 장 대인께서는 이미 순천부의 일로 목소리를 내고 계셔서, 그의 존함을 걸고 새로운 일을 벌일 수는 없네.”

“필요하시다면 소인의 이름을 앞세우셔도 됩니다. 대신, 먼저 부사에게 회전의 수정본을 지참시켜 먼저 떠나보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소인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성과도 행방이 없어질 테니까요.”

“이 공(公)이 정 대인은 물론 황제 폐하와 대명을 위해 계책을 내고 위험까지 감수하는데, 그 정도조차 배려해주지 못하겠나. 원한다면 바로 떠날 수 있게 조치해 주겠네.”

“감사합니다.”

합의가 끝나자 수행원 중 하나 눈치껏 차를 내왔다.

나와 임사번은 결과물에 만족하고서 차를 음미했다. 하지만 임사번에게는 아직 역할이 남아있었기에, 오래 여유를 부리지는 못했다.

“나는 이만 돌아가 봐야겠네. 정 대인께 자네의 신묘한 계책과 대명을 향한 충신을 보고드려야 하니까.”

“예.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내가 무슨 고생을 했단 말인가. 자네만 고생이 많았지. 부사 일행은…… 아니, 준비되는 대로 먼저 출발해도 좋네. 이쪽에서 구설수가 없도록 처리해 둘 터이니.”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나는 가네.”

“대문까지는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나는 임사번과 함께 뜰을 가로지른 뒤, 정문 앞에서 멈춰 섰다. 임사번이 먼저 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단지 까딱이는 정도에 불과했으나 대명의 중신이 조공국 조선의 사신에게 먼저 인사한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살펴가십시오.”

이쪽에서도 예를 표해 배웅하니 임사번은 그제야 가마를 타고 멀어졌다.

그렇게 배웅을 다 하고 돌아오니 이산해와 수행원 몇 명이 경직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금천군……!”

이산해는 무척이나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조심스럽게 엿들어보니, 금천군께서는 대명의 정치 상황에 끼어들게 된 것 같은데 괜찮겠나?”

“그럼 대가도 없이 저들이 회전을 수정할 줄 아셨습니까, 하하하.”

“나는 금천군의 안위에 대해 물어본 걸세, 물론 종계변무를 성사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안위야 어지간하면 괜찮겠지요. 정면에 내세워진 이 사람이 대뜸 실종이라도 된다면 장 수보 측에서도 곤란할 터이니, 그쪽에서도 충분히 대비할 겁니다.”

어쩌면 회동관과 멀지 않은 곳에서 흑의인들이 서로를 향해 칼질한다는, 지극히 무협스러운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지.

혹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구경하고 싶겠으나 앞으로 한동안은 회동관 밖을 벗어나지 않는 게 좋았다.

이역만리 타지에서 시체가 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금천군…….”

이산해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금천군의 노고를 헛되이 할 수 없어, 부끄러운 일임을 알면서도 먼저 조선으로 떠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게. 대신 오늘날의 성과에 금천군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명명백백히 밝혀 팔도의 천만 백성 모두가 금천군의 공을 알게 하겠네.”

“저 아직 안 죽었습니다. 부사께서는 서둘러 행장이나 챙겨 출발하십시오. 늑장을 부리다가 반대파가 보낸 사람들에게 인질로 잡히기라도 한다면 곤란합니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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