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31화
46. 신산귀모의 수 (1)
조선 사신이 떠난 뒤.
명나라 대신들은 근래의 이슈를 논하다 어전회의를 파했다.
대부분은 각자의 관청을 향하였으나 장거정과 일부 대신들은 태화전 뒤에 자리한 중극전(中極殿)을 찾았다.
중극전은 황제가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상소문을 읽고 처결하는 장소로도 쓰였지만, 동시에 명나라에서 의정부 역할을 하는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에서 사무를 보기도 했다.
그리고 장거정은 내각대학사를 구성하는 4전2각 중 하나인 중극전의 대학사였다.
물론, 대학사는 명예직에 가까웠으나 황제의 섭정이자 명나라를 장악한 권신인 장거정에게는 예외였다.
“앉으시게들.”
장거정이 상석에 앉아 권하자 그를 따르는 재상들이 좌우에 착석했다. 모두가 자리하자 장거정이 입을 열었다.
“순천부의 세액을 감면하는 일은 어떻게 되었나?”
순천부는 정난의 변을 통해 황위를 차지한 영락제가, 민심이 불안해진 남경을 버리고 정치적 본거지인 연왕부로 돌아와 북경이라는 이름의 새 수도를 세우고 관할구역의 이름을 연왕부에서 순천부로 바꾼 것에서 기인한다.
달리 말하자면 순천부는 조선으로 치자면 한성 외에도 성저십리 등을 포함하는 방대한 영역으로, 세입의 비중이 매우 큰 지역이었다.
파악된 인구는 무려 70만.
그마저도 명국에서 가장 부유한 자들이기에, 순천부의 세액 체납은 가난한 명국에게는 치명적이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무려 융경 4년에서 만력 2년까지, 총 4년이 미납됐다.
호부상서 양준민(楊俊民)이 답했다.
“한림원과 도찰원 등 각사에서 반발이 여전히 심한 상태입니다. 물론 강행을 하자면 못할 것도 없겠으나 워낙 체납액이 커서······.”
“이런 무식한 작자들 같으니. 순천의 백성들은 이미 냈다는 세금을 어떻게 다시 거둘 수 있단 말인가? 미룬다고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마냥 아쉽다고 억지만 부리다니!”
장거정의 말대로였다.
순천부의 백성들은 분명 세금을 냈다. 단지 조정에 전해지지 않았을 뿐.
분명 전임황제 목종 융경제는 제왕학을 교육받지 못했음에도 뛰어난 용인술로 나라를 경영했다.
10만 몽골군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돌려보낸 것, 포도아(葡萄牙, 포르투갈)를 중심으로 구라파 상인들에게 막대한 양의 은을 흡수하여 은본위체제의 기반을 마련한 것이 그러했다.
하지만 빛이 있다면 어둠도 있는 법.
융경제는 중증의 호색한이었다. 십수 가지 최음제를 한꺼번에 복용하고 매일 밤 수십 명의 궁녀들을 상대하였으며, 이러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권신들의 다소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적당히 눈감아주기도 했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체납된 세액을 기약 없이 기록만 해두고 있다고 받지 못할 세금이 들어오는 건 아니야! 이대로 두어봐야 일조편법(一條鞭法)을 시행하는 데 걸림돌만 될 터이니 세제와 관련해서 곁가지는 최대한 덜어내야 해!”
호부상서 양준민이 조심스럽게 간했다.
“하오나 반대하는 목소리에 당위성이 없는 건 아닙니다. 체납액을 은으로 치환하면 족히 수십만 냥은 될 터인데, 단지 거두기 요원하다는 이유로 면제한다면 앞으로 세금을 누가 내려 하겠습니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쉬운 법이다. 만일 백성들에게 세금을 내지 않더라도 버티기만 하면 결국에는 면제된다는 느낌을 준다면, 체납이 전국적인 문제로 번질 수 있었다.
“그리고 반대파들이 트집 잡을 수 있는 명분이 될 것입니다. 물론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알고 있지만, 혹 반대파가 지난 세금 미납을 수보와 연관 짓기라도 한다면······.”
-쾅!
장거정이 탁자를 내리치자, 호부상서 양준민은 물론 좌우 대신들이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양준민이 표한 우려가 마냥 헛소리는 아니었다.
전 세대 권신들인 서계나 고공과 마찬가지로 장거정 역시 무척이나 부패한 사람이었다.
지난 수 년 동안 순천부의 조세가 대대적으로 횡령된 것과 아주 연관이 없기란 요원했다.
혹시라도 그 끈이 조금이라도 드러나는 순간 반대파에게는 좋은 공격거리가 될 터였다.
장거정이 마침내 지난날 횡령한 조세를 완전히 묻어버리기 위해 사사로이 권력을 남용하여 순천부의 체납액을 면제했다고 말이다.
그래서일까.
“······.”
장거정은 콧바람으로 씩씩대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세제개혁은 분명 황제와 대명을 위한 일이었지만, 그 숭고한 목표와는 달리 장거정 개인은 자신이 하는 일을 당당하게 추진할 수 있을 정도로 깔끔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만일 반대파에게 공격당해 권력을 잃기라도 한다면 개인의 영달은 물론이고 개혁까지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중극전에는 한참이나 불쾌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것을 깬 사람은 예부상서 려조양(呂調陽)이었다.
“대인.”
“말하게.”
“반대파의 의견이나 호부상서의 우려가 아주 억지라고는 못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대명을 위한 일에 소인배들이 끼어 방해가 된다면 그것대로 불편해지지 않겠습니까?”
“예부상서에게는 방도가 있는 것 같군.”
“으음······.”
려조양은 짧게 침음하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 조선에서 사신으로 온 이순신이라는 자는, 물론 이미 전해 들어 알고 계시겠지만 동국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공신으로 녹권되었습니다.”
“그를 끌어들이잔 말인가?”
“단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예. 그렇습니다.”
“하!”
장거정은 비웃듯 대소하고는 말을 이었다.
“우리가 당면한 일은 대국 대명의 일이거늘, 아무리 공신이라고는 하나 소국인 조선에서 일하던 자에게 무슨 방도가 있겠는가? 자칫 대국의 대신이 소국의 사신에게 대업을 전가했다는 구설수만 생길 것이다.”
“소관은 정반대로 생각합니다.”
“어떻게? 분명하게 말해보라.”
“이순신은 사신이고 일정도 마쳤으니 머지않아 본국으로 돌아갈 겁니다. 달리 말하자면 어떤 책임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뜻입니다.”
“······흠.”
장거정은 축 늘어진 수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예부상서의 말마따나 이순신에 대해서는 장거정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전조에서도 시행하지 못한 대사업을 단번에 성사했다던가.
그리고 주변에서도 알게 모르게 좋은 평가가 들려오고 있었다.
인품이 뛰어나고 박식하며 시대를 꿰뚫는 혜안을 가지고 있다······ 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였다.
그것이 현실을 모르고서 고담준론(高談峻論)이나 지껄여대는 새파란 신입 관리들의 평가라면 장거정에게는 도리어 악명이겠으나, 제법 중신 소리는 듣는 자들의 평가였기에 장거정도 이순신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놈이 대명의 일에 협조하겠나?”
“일개 사신인데 거역이라도 하겠습니까.”
“동국이 대명국의 질서에 순응한다고는 하나 이따금 불손해지는 면이 있지. 분명 오체투지의 심정으로 대명을 받드는 것은 아닐 터이다.”
장거정은 현실적으로 생각했다.
국제질서란 힘의 논리에 의해 좌우되는 것.
조선의 성질이 북로남왜와는 다르다곤 하나 그들 역시 대명이 무작정 강성해지기를 바라지는 않을 터였다.
장거정은 이번 세제개혁이 성공하면 대명은 지금보다 몇 배는 부강해지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동국의 사신이 불손한 생각을 품고 있다면, 찾아간들 어떤 이익도 얻지 못하고 단지 대명의 수보가 소국의 사신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논란만 남길 터였다.
“소관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예부시랑 임사번이 나섰다.
“소관이 일전에 이순신을 만나본 적이 있사온데, 뻔한 말씀이겠지만 그는 조선국왕에게서 종계변무를 성사하라는 명을 받았다 합니다. 그것을 미끼로 삼는다면 충분히 이순신을 움직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흠······.”
“사실, 종계변무도 족히 이백 년은 이끈 사안인 데다 성조(成祖, 문황제)와 무종(武宗, 정덕제)께 성지까지 받아두어 언제까지고 안 해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건 그렇지.”
“소관이 생각하기에 이순신이 어떻게든 대국에 봉사만 한다면 종계변무 정도는 못 들어줄 것도 없다 사료됩니다.”
장거정은 다시 수염을 쓸어내렸다.
일국의 정통성을 저당잡는 것도 좋았지만, 예부시랑의 말대로 조선은 종계변무를 약속하는 이전 황제의 성지를 받아두었기에 언젠가는 종결을 해야 했다.
그러니 세제개혁을 위해 쓸 수만 있다면, 굳이 후대의 권신에게 이 좋은 패를 양보할 이유는 없었다.
“예부시랑은 이순신이 어지간히도 마음이 들었나 보군.”
장거정이 가볍게 말을 건넸다. 임사번이 조선 사신들이 머무는 회동관을 방문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 송구합니다. 하지만 방금 드린 말씀은 사심 때문에 드린 게 아니었습니다.”
“알고 있네.”
임사번은 빈손으로 나왔으니까.
그는 회동관을 가장 먼저 찾아갈 정도로, 사실 탐욕스럽기를 따지자면 다른 중신에 비해 부족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자신을 빈손으로 돌려보낸 이순신에게 악담은커녕 도리어 호의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장거정에게는 나름 흥미로웠다.
“이순신과의 접촉은 예부시랑에게 맡기지.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게.”
“받들겠습니다.”
임사번은 황송하다는 얼굴로 예를 표했다.
* * *
회동관.
며칠 전 내무부에서 몇 가지 하사품을 반사받은 이래로, 명나라 관리들과의 접촉도 접점도 없었다.
덕분에 회동관은 무척이나 조용하였으나, 가라앉은 분위기와는 정 반대로 모두의 마음속에는 불안이 짙게 퍼지고 있었다.
그래서.
“다들 모이세요.”
나의 전언에 부사 이산해와 수행원들이 하나둘 모였다. 개중에서는 목숨을 걸고 자원한 역관들도 있었다.
말단 공노비들을 제외한 사람들이 모두 자리하자, 나는 그들 앞에 서서 말했다.
“이 사람과 부사가 일을 진전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렇다 할 효용이 없는 관계로 최후의 수단을 동원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자 모두의 얼굴에 올 게 왔다는 절망감이 감돌았다.
내가 새삼스럽게 뇌물이나 뿌리자고 말하려는 것이 아님을 다들 알기 때문이었다.
“극단적이긴 하지만 원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에게는 주먹질이 정답인 법입니다. 하지만 어찌 일개 사신이 대명의 중신을 두들겨 팰 수 있겠습니까?”
“······.”
“하지만 자극이란 고작 물리적인 충격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심리적으로도 충분히 충격을 줄 수 있지요.”
나는 원탁에 놓인 환도를 집어들었다.
“전권이 있는 장 수보를 찾아가야겠습니다. 이 사람도 바라는 일은 아니나 이것이 최선이라면, 해야지요.”
이에 이산해가 물었다.
“그, 금천군. 어찌하여 환도를 챙겨 우리 모두에게 겁을 주시는가?”
“이 사람은 사행에 동행하게 될 사람들에게 당부드린 말씀이 있습니다. 일이 성사되지 않으면 죽음도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요.”
“······!”
“아무리 하늘과 같은 권세를 누리는 대명의 섭정이라도 뜰이나 계단에 충신의 핏자국을 남기고 싶지는 않겠지요.”
누구라도 적은 있기 마련이니.
천하의 장거정이라도 트집 잡힐 거리를 만들고 싶지는 않을 터였다.
“이보게, 금천군! 종계변무가 아무리 숙원이고 대업이라지만 죽음으로서 대명의 대신을 겁박한다면, 애초에 일이 성사될지도 의문이지만 성사되더라도 후환이 클 걸세!”
“이대로 돌아가 봐야 개쪽입니다. 더군다나 전하께 부월을 받았으니 설령 사신의 직을 맡았더라도 마음은 일선에 나선 장수와 달라서도 안 되겠지요. 제가 부사 포함해서 다들 양지바른 곳에 묻어드리겠습니다.”
“나, 나, 나도 죽이시려는 겐가?!”
이산해가 절박한 표정이 되어 물었다.
“순번이 다 되면 부사께서도 각오하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
“그럼.”
다들 각오하라는 말은 새삼스러웠다.
환도를 챙겨 일어나는 그 순간!
맞은편 대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사람이 등장했다.
“이 공(公)!”
예부시랑 임사번이었다. 일전에도 찾아왔던 그는, 나를 무척이나 반갑게 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