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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30화 (130/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30화

45. 천 냥의 차 (3)

“대인.”

마음을 돌리는 것도 잠깐이다. 임사장이 가장 먼저 미끼를 문 이유는 그가 탐욕스럽기 때문이다. 본성이 어디 가지는 않겠지.

딴 생각하는 지금 주제를 돌려야 했다.

“실은, 말씀을 드리면서도 겁이 났습니다.”

“······?”

“소인이 아무리 대인과 같은 위치에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도 대인은 대명과 황제 폐하를 위해 일하시는 분이시니, 감히 견주려 한다면 위계를 농락하는 만행이겠지요.”

“나는 괜찮네.”

“하해와 같은 이해와 배려심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나 역시 중국식으로 공수를 취해 예를 표한 뒤 말을 이었다.

“시랑께서는 실로 대인의 풍모를 가지신 분이니, 소인이 염치불고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선은 개국 이래 이백 년 동안 절실하게 염원하던 일이 하나 있습니다.”

“알지.”

“실상 소인이 사은사로서 폐하의 하사품에 사은하고자 대명을 찾기는 하였으나, 전하께서는 간절히 바라는 바가 있으시니 신하 된 자로서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임사장에게는 곤란한 주제여서일까.

그는 손을 내저었다.

“미안하지만 그 일에 대해서는 내가 도와줄 수 있다고 확답하기 어렵네. 다른 도서도 아니고 무려 대명회전인데 일개 시랑이 그대의 편의를 위해서 수정을 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나?”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무릇 신하라 함은 군주에게 진심을 다하여 충성하고 종묘와 사직의 명예와 안정을 위해 일신을 무릅쓰는 법입니다. 대인께서 현 세태에 아쉬움이 많으신데, 소인이라고 다르겠습니까?”

“음······.”

“소인의 심정은 마치 대인께서 하늘이 대명과 천자 폐하를 보우하기를 바라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간절합니다.”

임사장은 딱 잘라 거절하기는 어려웠는지 찻잔만 기울였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나는 반절은 성사되었다고 생각했다.

철벽만 아니라면 어떻게든 뚫을 방도는 있기 마련이다. 임사장이 탐욕스런 사람이라고는 하나 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을 다룰 줄 안다.

물론 다짜고짜 뇌물을 바치며 애걸복걸하지는 않을 거다.

탐욕은 충족될 수 없는 것이며 채우면 채울수록 더 깊어지는 것이니.

“대인, 소관이 무리한 청을 드렸다곤 하나 나쁜 인상을 남기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나 역시 그대의 청을 시원하게 들어주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하니, 그대 역시 나를 원망하지 않기를 바라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소인이 대인을 원망하는 일은 추호도 없을 것입니다. 언제 떠날지 모르겠으나 부디 앞으로도 좋은 사이로 지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나도 그렇네.”

임사장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회동관을 찾아온 이유가 뭐라도 뜯어먹기 위함이지 정사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으므로.

“말씀하시지요.”

내가 부드럽게 권하자 임사장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놀랐다.

“아?”

대명의 육조 시랑에 오른 임사장이었고 부패가 만연한 명나라 조정이었기에, 그가 어디를 방문한다면 상대측이 알아서 뇌물을 바쳤다.

때문에 이순신이 대놓고 의사를 불어보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말씀을 아끼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음······.”

임사장은 짧게 침음을 흘렸다. 그동안 진중한 얘기를 나누며 감정을 공유한 이순신에게, 대뜸 안면몰수하고 뇌물을 바치라고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닐세, 아니야.”

“대인, 이역만리의 사람이니 조금은 편하게 대해주셔도 됩니다.”

재촉이 있어서일까.

마음이 흔들리던 임사장은 심지를 굳히고서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조선도 사정은 비슷하겠지만 우리 대명의 관리들도 녹이 부유한 편은 아닐세.”

“그렇군요.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동국만 하더라도 전하를 보필하여 일국과 천만 백성을 경영하는 대신들도 겨우 일신을 보전할 수 있을 정도의 녹을 받는데,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지.”

“예로부터 수신제가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하였는데, 일신은 물론 가정부터 안정시키지 않고는 나라를 편안하게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물론 나라의 녹을 받아 먹고 사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이 일신과 가정의 안정을 해칠 정도로 적어서는 도리어 나라를 해치게 되겠지요.”

임사장은 쓰게 침음했다.

녹이 박함을 밝힌 이유는 은근슬쩍 뇌물을 청하기 위함이지 맞는 말이나 듣기 위함은 아니었기에.

하지만 들려온 대답은 정론이라서 뭐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임사장은 곤혹한 심정을 숨기며 애꿎은 찻잔만 돌렸다.

“대인. 곤란한 상황에서도 나라를 위해 힘쓴다는 것은 분명 노고가 크지만 영광은 더욱 클 것입니다. 그래서 소인 역시 사신을 자처하여 이역만리까지 온 게 아니겠습니까?”

“이 공(公)······.”

임사번이 말을 이었다.

“오랜 시간 교제해온 것은 아니지만 그대가 군자의 자질이 있음은 알겠소이다. 마음도 맞으니 만일 그대가 조선이 아니라 대명에서 태어났다면 나와 깊은 우애도 가질 수 있었을 거요.”

“영광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대명의 조정은 군자 된 도리만으로 돌아가지는 않소이다.”

돌려가며 말했음에도 정사 이순신은 뇌물을 내놓기는커녕, 생각조차 않는 듯했다.

임사장은 그런 이순신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으나 눈치가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정론적인 태도에 갑갑함도 느꼈다.

단순히 뇌물을 주지 않아서만이 아니다. 분명 그것도 이유 중 하나지만, 쓸데없이 바람직하기만 한 태도로는 그가 원하는 일을 이룩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부패가 만연한 명나라에서 뇌물은 인사치레와도 다르지 않았다. 그저 맞는 말만 해서는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게 분명했다.

“내가 공이 마음에 들어서 해주는 충고요.”

“음······.”

이순신은 고심하듯 짧게 침음하고는 답했다.

“대인께서 소인에게 진심어린 조언을 해주시니 실로 무한한 영광입니다. 어쩌면 소인의 말이 오만하게 들리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임사번은 말해도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저었다.

“많고 많은 오랑캐 중에서 유일하게 중원의 학문을 받아들여 대명을 따르게 된 동방예의지국이, 아무리 간절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설령 왕도가 있다 하더라도 소인은 조선과 조선국왕 전하를 대표해 온 만큼 몸가짐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음······!”

무엇이 상책인지를 알지만 자신은 조선과 조선국왕을 대표하는 몸이기에 그럴 수 없다는 대답.

역시나 정론이었으나 임사번은 감탄 어린 침음을 흘렸다. 그래서 미워할 수가 없었다.

고관인 임사번은 그동안 여러 번 조선의 사신을 접해보았으나 이순신과 같은 자는 진정 처음이었다.

“후.”

임사번은 뇌물에 대한 생각은 접어버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는 잘 마셨소이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나는 조선에서 온 사신단이 평안하게 지내는지 확인 차 온 것인데 공을 보아하니 문제가 없는 듯하오.”

“하늘과 같은 대인께서 조공국의 사신단을 위해 친히 발걸음 해주셨다니, 망극할 뿐입니다.”

“일이 성사되기를 기원하겠소.”

“감사합니다.”

뒷짐을 지고 회동관을 찾았던 임사번이었으나, 돌아갈 때가 되자 공수를 취하는 그였다.

그렇게 임사번이 떠나자 그동안 숨죽인 채로 회담을 지켜보고 있던 이산해가 튀어나왔다.

“실로 경이로운 처사였네, 금천군! 분명 주사가 거금의 사례를 받은 것을 전해 듣고 찾아왔을 텐데, 은화 하나 쥐여주지 않고서 돌려보내다니?”

“가져온 재물은 거덜이 나도 무방합니다. 용처가 중요할 뿐이지요.”

“그렇다면 어째서 청탁을 하지 않았나? 시랑의 성품이 그렇게 나빠 보이지는 않았는데.”

“웃는 낯에 침을 뱉을 수 없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재물을 주게 되더라도, 상대방이 진심으로 도와줄지는 미지수인데 어떻게 청탁을 권한단 말입니까? 안될 말이지요.”

사신이 재물을 통해 일을 성사시키고자 했다는 사실이 알게 되면, 질 나쁜 거머리들만 더 들러붙을 터였다.

그리고 가져온 모든 재물을 털린 채 빈손으로 돌아가게 되겠지.

명나라 대신들은 기본적으로 갑 중 갑이다. 재물을 취하고 아무런 대가를 행하지 않아도 어떻게 사신 따위가 불만을 토로할 수 있겠는가?

긁어 부스럼 만들 이유가 없는 자들을 돈으로 사겠다는 건 하책이었다.

그래서 이쪽에서는 철벽을 치는 거다. 내가 재물을 명나라 대신에게 푼다면 그건 청탁을 위한 뇌물이 아니라 노고의 대가뿐이다.

물론, 약간의 기름칠이 필요하다는 것까지는 부정하지 않겠다.

“물론 예부시랑의 인품이 아주 최악은 아니었습니다. 대놓고 뇌물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돌려 말했을 때 이 사람이 응하지 않자 억지를 부리지도 않았지요. 딴에는 조언도 해주었으니 이 사람의 인상도 나쁘지는 않게 박힌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다행일세. 하지만 이미 돌아갔는데 어쩔 수 있겠는가?”

“차차 친해지기로 합시다. 아군으로 만들면 적어도 방해는 안 될 테니까요. 대추차가 마음에 든 듯한데 하나 보내지요.”

이에 이산해가 나섰다.

“금천군께서는 손님 응대로 고생했으니 시랑에게 대추차를 보내는 건 내가 하지.”

“일단 거처만 알아봐 주십시오. 정성껏 쓴 편지도 같이 붙이면 효과가 더 클 테니까요.”

“알았네.”

이후, 몇 명의 명나라 대신이 더 찾아왔다. 떨거지들도 몇 있었지만 그들은 뇌물보다는 거래를 원했다.

후자의 사람들은 여지만 남겨둔 채 적당히 응대한 뒤 돌려보냈고, 명나라 대신들은 임사번과 같은 방식으로 성향을 떠보았다.

대놓고 뇌물을 요구한 삼분지 일은 먹고 떨어지란 식으로 약간의 푼돈을 쥐여준 뒤 돌려보냈으며, 또 삼분지 일은 내가 뇌물을 주지 않자 미련이 없었는지 곧장 발을 돌렸다.

마지막 삼분지 일은 나의 정론적인 태도에 질려 하면서도 약간의 호감이 생겼는지 호의적인 조언을 몇 가지 해주고는 떠났다.

그들에게는 금액적으로는 크지 않아도 직관적인 인상을 줄 수 있는 식품, 기호품 등을 편지와 함께 보냈다.

그런대로 바쁜 며칠이 지나고.

황실에서 환관이 찾아왔다.

“대인.”

말단 환관이었을까. 태도는 정중하였으나 막상 체격과 의복은 부유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흘러내릴 듯한 피둥피둥한 살집은 물론 의복은 최고급 비단으로 만들어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났으니 말이다.

“무슨 일입니까?”

“폐하께서 뵙고자 하십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나와 부사 이산해, 그리고 엄선된 역관 둘은 의복을 갖추고 환관의 안내를 받아 나아갔다. 일행은 오래지 않아 명나라의 정전인 태화전(太和殿)에 이르렀다.

중국 사극으로나 접했던 태화전이다. 그것을 두 눈으로 직접 목도하니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분명 조선의 정전인 사정전은 물론 경복궁 전체도 훌륭한 건축물이었으나 명나라 궁궐의 위용은 그보다 한층 위에 있었다.

실로 현 시대 최대 최강 국가의 수도에 어울렸다.

드넓은 박석을 가로지르고 삼 층의 계단을 언덕처럼 오르니 마침내 태화전 내부가 드러났다.

“조선국 사신 정사 이순신, 부사 이산해 입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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