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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29화 (129/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29화

45. 천 냥의 차 (2)

사행 자체는 건조했다.

온갖 접대를 받는 명나라의 사신과는 달리, 조선은 명 다음가는 강국이라고는 하나 명이 워낙 넘사벽으로 강하다.

전조 고려는 황금기 시절 요나라를 격파한 뒤 국력이 비교적 약했던 송나라와 요나라 사이를 중재하며 동북아 삼강으로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 동북아 판세는 일강 일중.

변수가 없다 보니 철저하게 수직적인 관계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교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변방이 지방관들은 가까운 나라인 조선의 소식을 궁금해했다. 일부는 정치적으로 쓸 수 있는 정보를 바랐으나, 대다수는 아니었다.

인간이란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은 족속이었고 그건 중국인이라 해서 다르지 않았으니까. 단지 여흥과 호기심, 그리고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한 주제로 조선의 소식을 찾았다.

나는 반대로 명나라의 소식과 내부 사정을 전해들으며 초행인 사신의 역할에 조금씩 익숙해질 수 있었다.

달포가 자나자 사신단은 북경에 도착했다.

“허······.”

나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아무리 명나라라도 수백 년 전의 국가다. 대한민국의 수도에 비하면 화려함은 천상과 지하 사이의 간극이 있다.

하지만 이순신으로서의 인생은 조선에 국한되어 있었고 북경의 규모와 위세는 확실히 한양을 훨씬 웃돌고 있었다.

내성으로 들어서자 방대한 폭의 왕도(王道)가 사신단을 반겨주었다. 즐비한 인파 너머로, 고래등 같은 천안문의 지붕이 얼핏 보였다.

사신단은 대로를 가로지르는 대신 길을 돌아 나아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장원을 가진 저택 앞에 이르렀다.

대문에 걸린 현판에는,

[ 館同會 ]

이라고 쓰여 있었다. 읽으면 회동관(會同館). 역관들은 이곳 회동관이 조선의 사신들이 주로 묵는 숙소임을 알려주었다.

이명으로는 남쪽에 있어 남관이라고도 한다던가.

안내를 맡은 명나라의 하급 관리가 꾸벅 인사를 올렸다.

“대인, 송구하오나 조정에서 별도의 명이 있을 때까지 여기에서 머물고 계셨으면 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대인. 연락을 기다리지요.”

“예.”

하급 관리가 주먹을 말아쥐고 공수를 취하자, 나는 살짝 손을 들어 보이고는 허리춤에서 주머니를 꺼내 던졌다.

관리는 예상치 못한 선물을 다급히 받아들고는 화색을 밝혔다.

손에서 느껴지는 묵직함.

타국 사신이 고작 쇳덩이나 던져주는 않았을 터이니, 금은 바라지 않고 은만 되어도 가치는 상당할 터였다.

“감사합니다, 대인······.”

하급 관리는 거듭 예를 표하고는 물러났다. 사신단이 숙소로 진입하자 부사 이산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고작 주사 따위에게 너무 많은 재물을 준 게 아닌가?”

명나라는 은본위제도 국가. 조선처럼 현물장사를 하는 게 아니라 은화로 거래했다.

이는 엄청난 양의 은이 중국 내에서 통용된다는 뜻으로, 고작 은 조각이 고액수표를 대체하는 조선과는 시세차이가 있었다.

고작 한 주머니 분량의 은화라도 조선에서는 큰 지출인 셈이다.

하지만.

“이쪽이 재물이 펑펑 쓴다는 말이 돌아야 거머리 같은 종자들이 달라붙지 않겠습니까. 보아하니 위세 좀 부리겠다고 말도 없이 무식하게 기다리게 할 느낌인데, 그동안 시간만 죽일 겁니까?”

“그건 그렇지만······ 고작 재물에 취해 몰려드는 해충 같은 자들이라면 해는 될지언정 득이 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지요. 따지고 보자면 아조의 재상들이라고 모두 청렴한 사람들은 아니잖습니까?”

털어보면 먼지 말고도 나올 게 많은 사람이 즐비했다. 권력을 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을 향유하기 위함이다.

일국을 경영하는 지위에 오르고도 욕심이 없다면 그건 두 가지 경우 중 하나다.

유니콘과 비슷하게 환상의 존재쯤으로 인식되는 군자(君子)거나, 나처럼 누릴 게 많은 세상에 살다 와서 이런 쌍팔년도에서는 딱히 물욕이 없거나.

특히 명나라는 조선 이상으로 녹봉이 비현실적이다. 그래서 생계형 비리라는, 미래라면 발언자를 총살해 마땅할 개소리가 이 시대에서는 정당화되는 면이 있었다.

불가피하게 비리를 저지를 수밖에 없어, 별 생각 없이 바늘을 훔치며 시작한 비리가 결국에는 소를 훔치는 비리로까지 번지지만.

뭐.

명나라 사정을 내가 애통해할 건 아니고 단지 사실이 그러니 이용하겠다는 것이었다.

“명이라먼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을 겁니다. 사람의 입은 싸고 마음은 가벼운 법이지요. 주사가 다시 찾아오는 한이 있더라도 뭐가 걸려들기는 할 겁니다.”

“으음······.”

이산해는 이런 식의 일 처리가 영 달갑지는 않았는지 짧게 침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라고 뾰족한 방도가 있는 건 아니었다.

과연 내 예상대로 됐다.

바로 다음 날 입질이 왔다.

“나는 예부시랑 임사장(林士章)이라 하네.”

예부시랑이라면, 명 조정의 핵심 관직인 육조 예부의 이인자다. 굳이 따지자면 예조의 이인자인 참판을 지내는 나와 같은 처지인 셈이다.

물론 ‘대명’의 예부시랑이 조공국 조선의 예조참판과 같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임사장은 오만하거나 거만한 기색 하나 없이 홀로 소탈하게 찾아와 호의적인 미소를 내비쳤다.

하지만 그것이 임사장의 인품이 좋아서는 아니리라. 뇌물을 받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가급적 홀로 행동하고 상대방에게 최대한 호감을 사는 것이 중요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음!”

임사장은 뒷짐을 진 채 만족스러운 듯 반응하고는 제 집처럼 회동관을 찾았다.

회동관은 사신단을 수용하기 위함인 만큼 최소한의 시설은 갖추고 있었다. 정문부터 깔린 돌바닥은 정면은 손님 응대가 가능한 정방(正房)이 갖춰져 있었다.

조선으로 따지자면 대청마루와 같은 곳.

다만 외부인 응대를 중히 여기는 명이기에, 사랑방 사이를 잇는 가교 역할이 중점인 대청마루와는 달리 정방은 별개의 구역으로서 오히려 좌우 사랑채를 합친 것 이상으로 컸다.

뜰이 잘 보이도록 정면 미닫이를 전부 개방하니 바람이 선선하니 좋았다. 나는 보다 매끄러운 대화를 위해 쉬고 있던 통역 중 하나를 불러들였다.

이 시대의 한자가 곧 중국어이기에 기본적인 회화는 가능했지만, 괜히 필담이나 통역까지 동원해가며 대화를 하는 게 아니었다.

“대인.”

“공(公).”

나와 임사장은 서로 예를 표한 다음 커다란 원탁 양 끝에 자리했다.

먼저 입을 연 쪽은 용무가 있었던 임사장이었다. 하지만 대놓고 뇌물을 언급하기에는 껄끄러웠는지, 주제는 달랐다.

“명성이 드높은 이 공(公)을 직접 마주하니, 실례되는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솔직히 놀랐소이다.”

“어째서요?”

“생각보다 젊어서 말이오. 전조 고려부터 시도하던 일을 끝내 성사하여 공신까지 되었다기에, 원숙한 노신일 줄 알았소이다.”

“실망하셨다면 송구할 뿐입니다.”

“그런 건 아니고.”

임사장은 손을 내저었다.

내가 말했다.

“소인도 놀랐습니다.”

“자금성의 위용에?”

“하하. 그보다는, 소인의 보잘것없는 이름이 대국에까지 알려졌다니 의외라서 말이지요.”

“동국에서 사신이 온다는데 정사와 부사가 누구로 오는지는 알아야지 않겠나. 당연히 알아봐야 할 일이고, 때마침 이 사람은 예부의 시랑이니 더더욱 잘 알아야지.”

“중차대한 일을 하시는군요.”

“뭐, 그렇지.”

임사장은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소국의 사신이 대국의 중신에게 아부하는 것은 뻔하디뻔한 행위였으니까.

별다른 감흥을 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다.

“소인 역시, 조선에서는 대인과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음.”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말을 할 수 없다면 기능의 구 할은 의미가 없는 법이지요. 그런 차원에서, 실상 황제의 후설(喉舌, 목구멍과 혀)이란 사례감(司禮監)이 아니라 예부에 어울리는 이명이지요.”

“맞는 말일세!”

임사장이 일순 진지해져 답했다.

조선에서도 왕의 목구멍과 혀라는 이명을 가진 조직은 있다. 왕명을 출납하고 공문을 취합하는 승정원이다.

명나라에서는 사례감이 조선의 승정원과 비슷하며, 승정원의 업무는 물론 다른 방대한 직무들도 함께 수행했다.

승정원과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승정원은 정식 관료들이 구성하는 반면 사례감은 환관들로 이루어진 기구라는 점이다.

환관정치로 대표되는 명나라 정계인 만큼 명나라의 환관 조직은 무려 12감(監), 4사(司), 8국(局)으로 방대하며 구성원만 해도 무려 10만에 이른다.

이중 12감의 수장기구가 바로 사례감이었다.

사례감의 권력과 권한은 외교부문에서도 실무기관인 6부의 예조를 능가해서, 내가 사신단 정사로서 황제에게 올린 공문도 예부 다음으로 사례감 소속의 문서방을 거치게 되어 있다.

달리 말하자면 예부가 승인한 공문도 사례감이 반려하면 끝이라는 뜻이고, 이는 사실상 사례감이 예부보다 상위의 기관이라는 방증이었다.

심지어 사례감 문서방은 황제에게 올라갈 글을 검열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가졌다. 저들 마음에 안 들면 수작질을 부려 글의 의도를 정반대로 조작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예부시랑 임사장은 불만을 드러냈다.

“정식으로 관료가 된 사람들이 고작 환관들을 수발드는 형세가 되었으니, 실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네. 후한의 환관들을 다 합쳐도 오늘날에는 발끝도 미치지 못할 터인데!”

소위 ‘이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 식의 한탄이었다.

“대국이 이런 사정에 처해있다니,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필경 정식으로 관직을 지내는 관료들은 한평생 학문을 갈고 닦은 수십만 응시자 중에서 지옥 같은 경쟁을 치러 관료가 되었는데, 어찌 능력도 학문도 없는 환관에게 짓눌려 그들의 눈치만 봐야 한단 말입니까?”

“흥, 환관들이 능력과 학문만 없나?”

“염치도 양심도 고환도 없긴 합니다.”

“큭.”

임사장은 짧게 웃음을 흘리곤 말했다.

“일개 신하로서는 단지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할 뿐이지. 피를 토하는 한이 있어도 통렬하게 한마디는 하고 죽고 싶지만······.”

“지킬 사람이 많은 분이 가벼이 목숨을 거는 것도 의리는 아니겠지요.”

“후.”

임사장은 자기 뜻을 그대로 말해주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숨을 토해냈다.

“대국이 되어 모범을 보여도 부족하거늘, 동쪽의 조선만도 못한 상황이라니.”

지금의 명도 정식 관리들에게는 지옥 같은 상황이지만 사실 지금 황제가 태업황제로 유명한 만력제임을 고려하면 전망은 더욱 어두웠다.

만력제가 태만을 일삼을 동안, 황제를 모시며 그의 권력과 권한을 대행하는 환관들의 세는 더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노고가 많으십니다.”

“······노고뿐이겠나.”

나는 수행원을 향해 손짓했다. 그는 찻잔을 내와 나와 임사장 앞에 내려놓았다.

붉은색의 달큰한 냄새가 나는 차.

한숨을 쉬던 임사장이 물었다.

“무언가?”

“조선에서는 왕에게도 진상되는 양질의 대조(大棗, 대추)와 꿀로 만든 차입니다. 심신을 안정시키는 데 많은 도움이 많이 됩니다.”

“음.”

임사장은 찻잔을 기울고는 썩 만족스러웠는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군······.”

뇌물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은, 한껏 토해낸 세태에 대한 통한과 분노로 흩어진 지 오래였다.

적어도 한동안은 쓸데없는 생각을 안 하겠지.

나 역시 찻잔을 기울였다.

달달하니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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