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28화
45. 천 냥의 차 (1)
북촌 관광방, 흰 벽돌담 저택.
역관들은 비단 안에만 갇혀 있지는 않았다. 그들의 가족과 지인들이 대신 목숨을 바칠 대체제를 수소문한 끝에, 몇 명의 역관들이 금천군의 저택을 찾았다.
그러나.
“······?”
저녁 즈음부터 하나둘 모인 역관들은 이제 밤이 되어 여섯 명이 되었다.
목숨을 걸고 사행할 역관을 구한다는 말에, 작게는 출세부터 크게는 대의를 위해서까지 모였거늘 정작 저택의 대문은 한없이 굳게 닫혀있었다.
처음에는 대문까지 두드려가며 항의를 표했으나 주인은 나오지 않고 진녹색 도포의 사내만이 나와 기다리라 할 뿐.
하지만 날이 꼬박 새도록 기약 없는 기다림에 세 명이 떠났다. 그러고도 남은 여섯 명이라, 각자 이유는 달랐으나 사행에 참여하겠다는 열망만큼은 분명했다.
지금 목숨을 걸지 않으면 한평생 사행에 동행할 수 없을 수도 있는 자들이었기에.
그러는 동안, 안에서는······.
“영감.”
을룡이 이순신을 찾았다.
“슬슬 받아주시지요. 그새 한 명이 또 돌아갔습니다.”
“그럼 여섯 명 남은 건가?”
“예.”
“이만하면 충분하겠군.”
역관들에게 목숨을 걸라는 조건은 가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조에게도 말했듯 그동안 사신단에 동행했던 역관들은 염불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많았다.
원 역사에서 종계변무가 성사되었던 것은 역관의 공이 컸다고 알려져 있다.
역관 홍순언이 기방에서 몸을 팔던 규수에게 사정을 듣고는 몸을 취하지 않고 공금으로 지원을 해주었다가, 후일 규수를 후처로 삼은 예부상서 석성에게 큰 호감을 사 종계변무가 단숨에 해결됐다는 식의 미담 말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자면 홍순언 이야기는 야사에 불과하다. 하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지는 않는 법. 이런 이야기가 돌았다는 것은 그만큼 역관의 역할이 컸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고작 장사해서 남겨 먹을 생각이나 하는 놈들을 역관이랍시고 데려간다?
‘쌓아 올리는 건 쉽지만 무너뜨리는 건 쉽고 순식간인 법이지. 내가 실패해서 ‘천하의 이순신도······’ 따위의 평판이 도는 순간 지금 이뤄놓은 것의 절반은 잃는 셈이야.’
진지하게 임할 수밖에 없었다. 명 황제도 중원을 경영하기 위해서는 수십만 관료들의 도움이 필요하듯, 나 역시 대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사명감과 진지함으로 무장한 수행원들이 필요했다.
-덜컥
대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끝까지 버티고 있던 역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체로 젊었으며 의복은 간소했다. 한창 열의가 있을 때이나 뜻을 이루지 못하 불만이 많을 몰골들이었다.
“······금천군 영감.”
여섯 역관이 인사를 올렸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례하게 들리겠지만, 다 검증을 위한 일이었으니 노여움은 풀어주셨으면 합니다.”
“노여움이랄 게 있겠습니까.”
중인 나부랭이에 불과한 역관들이었다. 그들 중에서도 박한 대접을 받아 목숨까지 걸게 된 여섯 역관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이 감히 공신에 군호까지 가진 금천군 이순신에게 불만을 토로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솔직하게 자신의 치부가 될 수 있는 말을 선선히 그리고 공손하게 밝히는 금천군의 모습에 여섯 역관은 경외심 비슷한 감정이 일었다.
“별채로 모시게. 밖에서 기다리시느라 다들 지치셨을 터이니, 모심과 대접에 부족함이 없게 해주게.”
이순신은 을룡에게 일러 여섯 역관을 쉬게 한 다음, 뜰에 모인 채 이제 살았다 싶은 역관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자신을 대신할 희생양이 마련되었으나 정원이 두 명 부족한 것을 의식해서인지, 안도한 얼굴에 시선이 닿을 때마다 벼를 베듯 고개가 푹푹 숙여졌다.
“사람이 목숨을 거두는 일은 가볍지 않은 것이고, 사사로이 거두는 것은 천륜을 우습게 아는 것이니, 어찌 목숨 걸 것을 강요하겠습니까. 제공들을 억류한 것은 자원할 자들을 모으기 위한 방책이었을 뿐이니, 부디 노여워하지들 마셨으면 합니다.”
선두의 역관 중 하나가 답했다.
“아, 아니옵니다. 소인들이 가진 뜻이 작아 금천군 영감의 원대한 뜻에 부응하지 못하여 송구하기만 할 뿐이옵니다.”
“그리 생각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사람에게 전해주신 물건들은, 철저하게 공무를 위해 사용하겠습니다. 그 공을 전하께도 상주 드릴 터이니 미련 갖지 말아주시기를.”
“······.”
이제 살았다 싶어서일까. 뒤늦게 무위로 돌아간 값비싼 뇌물들을 아쉽게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행색에 비해 진귀한 뇌물을 바쳐 그 타격이 크리라 예상은 했다. 하지만 부정한 방식으로 쓸 재물을, 옳은 방식으로 쓰고 그 공이 밝혀질 것을 감안하면 투정 부리기도 힘들었다.
이미 손을 떠난 재물을, 나라를 위해 쓰겠다는데 꼽다고 돌려달라고 할 수는 없잖은가. 그러다간 진짜로 대가리가 깨지는 수가 있었다.
“제공들이 이 사람 거처에서 노고가 많으셨으니, 진심 어린 대접으로 사죄해야 마땅하겠습니다만 지금은 자리를 불편해하실 분이 많을 터이니 강요해서는 안 되겠지요.”
이순신은 대문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럼.”
축객이었다.
이제 여섯 자원자를 상대해야 하니 당신들에게 볼일은 없다는 뜻.
한탕 하려다 졸지에 고생만 실컷 한 역관들은 파도 앞에서 쓸려나가는 모래처럼 저택을 빠져나갔다.
족히 2, 30인은 되는 사람들이 사라지자 뜰은 단숨에 한산해졌다. 그동안 그들을 억류하느라 자리를 지키고 있던 머슴들도 피곤했는지 설렁설렁 해산했다.
“을룡.”
“손님을 모셔오겠습니다.”
이름을 부르는 정도였으나, 그것으로 의사는 충분히 전해졌다. 을룡은 별채에서 한숨 돌리고 있던 역관들을 데려왔다.
“금천군 영감.”
“함께 대업을 논할 사람을 모셔놓고 쓸데없이 분주하게 만들어 송구합니다.”
“아닙니다. 소인들은 부정한 자들이 벌을 받는 모습에 기뻐했고, 영감의 풍모에 다시금 놀랐습니다.”
그동안 사행을 전유하며 산더미 같은 부를 축적해온 자들, 그리고 그들처럼 되기 위해 기둥뿌리까지 뽑아와 뇌물을 바친 자들이 일벌을 받는 모습은 실로 통쾌할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이순신은 가볍게 웃고는 대청 안쪽을 향해 뻗었다.
“안쪽에 자리하시지요. 대업을 논해봅시다.”
* * *
며칠 뒤.
이순신의 입김이 다분히 들어갔으나, 일단 관상감 관원들이 정한 길일이 되자 사신단은 왕과 중신들의 배웅을 받으며 육조거리를 떴다.
정사 이순신, 부사 이산해.
여기에 역관 여섯과 통사, 의원, 서원, 화원과 군관과 공노비들로 사신단이 구성되었다. 동행한 갑사들은 사신단을 조선 국경까지 호위하기 위함이었다.
“내가 선택을 잘했는지 모르겠군······.”
부사 이산해가 말했다.
그는 나와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고 어전에서 운하를 반대했으나, 사업이 궤도에 오르고 성과까지 보이자 역풍을 맞고서 입지가 부쩍 축소된 상태였다.
때문에 당초 노땅들을 몰아내어 진급 적체를 해소하고 정계 중심에 진입하려뎐 이산해는 졸지에 옷 벗기 일보 직전의 상황까지 몰린 상태였다.
동인의 영수로서는 기능하고 있었으나 타개책이 정말 절실한 상황.
덕분에 설득은 어렵지 않았다.
“부사. 이미 천릿길의 첫걸음을 떼어버렸는데 뒤늦게 후회를 하셔도 방도가 있겠습니까?”
“끄으응.”
“이 사람만 믿고 따라와 주시지요. 설마 제가 부사를 곤혹스럽게 해드리고자 동행을 부탁했겠습니까.”
“······이번에도 계책은 있으시겠지?”
“생각해둔 바는 있지만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지요. 저쪽에서 응해줄 생각이 있으면 신산귀모의 수를 쓰더라도 효용이 있겠습니까.”
“으으.”
나의 냉혹한 대답에 이산해는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그로서는 대안이 없는 상황으로 내몰려, 처음부터 나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부사직을 자의로 응했다고 보긴 힘들었다.
여전히 불안해하는 것은 그 때문이겠지.
쿨시크 이산해 답지 않게 빌빌거리는 모습은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나중에 잘 다독일 필요가 있겠군.
새벽에 출발해 사행을 재촉까지 했으나 사신단은 고작 파주에 이르러 짐을 풀었다.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도보로 움직이는 데다 예를 갖춰 움직이는 집단이기까지 해서, 사실상 하루에 100리가 한계였다.
객사에 도착하자 이산해는 하루 꼬박 움직이며 자신이 부사가 됐음을 체감했는지, 허탈함과 중압감이 섞인 묘한 감정을 드러냈다.
“정말, 오늘 하루만큼은 모든 옷을 벗어 던지고 냇가에 몸을 던지고 싶군.”
“그런다고 죽을병이 걸리기라도 하겠습니까.”
“나, 나는 들었네. 일이 실패한다면 전하께 받은 부월로 동행한 사람들의 머리를 모두 깨어 죽인다며?!”
“제가 아계의 머리를 깨 죽이기라도 하겠습니까.”
“······으으.”
나는 양해를 구하고 잠시 객사를 나서, 관아에 비축되어 있던 청주를 몇 병 가져왔다.
“사이좋게 둘이서 마시지요.”
“내일도 일찍 출발해야 할 텐데, 술을 마셔서야 제때 일어날 수 있겠나?”
“달포짜리 사행입니다. 하루 정도 여유 부린다고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나는 주안상도 없이, 덜렁 가져온 도자기 잔 하나를 이산해에게 건넸다.
우려를 표하던 그였으나 막상 잔을 받아들자 한 잔 마셔야겠다는 듯 직접 잔을 채워 털어 넣었다.
“흐으으······.”
“어떻습니까?”
“이렇게 된 김에 취해야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네.”
최대한 빨리 기절하겠다는 생각인지, 재촉하듯 다시 잔을 채워 입에 터는 이산해였다.
나는 굳이 제지하는 대신 함께 잔을 기울였다. 그러고 얼마나 지났을까. 이산해는 얼굴이 빨개진 채 신세한탄을 시작했다.
“내가 어쩌자고 운하를 반대했는지.”
따지자면 운하 반대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내가 이산해에게 바랐던 것은 서인을 운하 찬성으로 유도하는 것이지 동서인의 전면전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러나 이산해는 당시 서인 영수였던 심의겸과 노골적인 비방까지 벌였고, 결국에는 왕명으로 의금부 체험까지 했다.
실질적인 처벌은 받지 않았으나 덕분에 권위가 실추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운하사업이 착실하게 성과를 내자 공격까지 받아 이산해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추락을 거듭했다.
감정의 동요로 필요 이상의 일을 저지르고 감당이 가능한 선 이상의 대가를 치르게 된 셈이었다.
하지만, 그걸 굳이 지적할 필요는 없다.
“아계, 이 사람과 약조한 바가 있어 그대로 이행했을 뿐인데 어찌하여 자책하십니까?”
“······.”
“아계께서 자책을 하신다면 약조를 걸었던 이 사람이 죄를 짓게 되잖습니까. 지금 아계께서는 이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시는 중입니다.”
이산해는 차마 나를 불편하게 할 생각까지는 없었는지, 더 한탄하지는 못하고 신음만 흘렸다.
“이 사람이 아계를 부사로 추천한 이유는, 아계께서 인의로서 약조를 지켜주셨기에 이 사람 역시 인의로서 보답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이 성사될지는 금천군께서도 장담할 수 없잖은가.”
“장담은 할 수 없으나 자신은 있지요. 실패할 것을 우려했다면 어째서 아계께 부사를 청했겠습니까?”
“······후.”
“아계께서 최근 고생하시게 된 것은 이 사람의 책임이 큽니다. 그렇다면 응당 책임을 갚는 게 도움을 받은 사람으로서 해야 할 도리겠지요. 제가 설마 아계게 폐를 끼치려고 모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아닐세.”
“아계께서도 공신이 되어보셔야지요.”
사신단이 구성되고 떠나기 전, 선조는 모두의 앞에서 천명했다.
종계변무가 진전을 보인다면 정사와 부사는 물론이고 수행한 자들도 공신으로 삼고 상을 내리겠다고.
“제가 아계를 공신으로 만들겠습니다. 혹 일이 잘못된다면 죽어서라도 이 사람과 이 사람의 후손을 저주하시고, 잘된다면 죽어서라도 이 사람과 이 사람의 후손에게 은의를 표해주십시오.”
그러자 이산해가 중얼거리며 답했다.
“공신이 되기만 하면…… 공신이 되기만 하면 내가 금천군에게 무엇인들 못 해주겠나? 그렇게 되지 못할 것이 두려워서 그렇지······.”
불안해하던 이산해는 한동안 술잔을 더 기울이다 침소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자.
이산해는 나보다 일찍 깨어나 나를 깨웠다. 늦게 일어날 것을 걱정했던 당사자가 말이다. 마음을 옥죄고 있던 감정을 취중에 한껏 풀어내서인지, 이산해는 평소처럼 진중한 캐릭터로 돌아와 있었다.
추태를 부린 것이 부끄러웠는지 시선을 피하는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