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27화
44. 뚝배기 (2)
일이 실패할 경우에는 대가리를 내 손으로 깨주겠다!
그야말로 미친 소리였다.
이번 사은사가 맡은 역할은 단순히 황제에게 예를 표하는 게 아니다. 바로 종계변무! 200년 조선 역사 내내 성사된 적이 없었던 초유의 중임이었다.
그런데 하루 만에 성사될 가능성이 있겠는가?
언젠가는 성사될지 모르지만 그게 지금일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다. 아무리 거금을 만질 수 있더라도 판돈으로 목숨 삼을 일은 전혀 아니었다.
사행(使行, 사신행)이 이게 마지막은 아니잖은가?
“······.”
“······.”
“······.”
역관들은 차마 응할 수 없었다.
“이런, 오호통재라.”
금천군은 금월부(金鉞斧)의 뭉툭한 날을 손바닥에 툭툭 치면서 입맛을 다셨다.
“어째 응하시는 분이 없으십니다. 일이 성사만 되면 공신에 봉해져 자자손손 무한한 영예를 누릴 수 있을 터인데.”
“······.”
“이 사람에게 앞다투어 찾아온 것은 이를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하하하.”
금천군은 애석하다는 듯 웃고는 말을 이었다.
“이제 물러나도 소용이 없습니다. 제공들의 존함이 명부에 기재되었는데, 어떻게든 사신단을 수행할 역관이 모집되지 않으면 이 사람은 명단을 전하께 바치고 이 중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고 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
“······!”
“······!”
진퇴양난! 자원한다면 명국 구경을 한 다음에는 삼도천 구경을 하게 될 터인데, 그렇다고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간 단체로 사이좋게 삼도천 구경하는 수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노회한 역관 중 하나가 무릎을 꿇으며 통곡했다.
“아이고, 금천군 영감. 어찌 소인들에게 목숨을 걸라 하시옵니까?!”
“종계를 변무하는 일은 아조의 이백 년 된 숙원인데, 아직까지 성사되지 못한 사람은 목숨까지 걸어가며 진지하게 임한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럼 영감께서는······.”
생략되었으나, 목숨을 걸 생각이냐는 물음이었다. 그 순간.
-꽝!
폭음처럼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금천군의 손에 들려있던 금월부가 대청 한가운데 꽂혀 있었다.
아무리 날이 뭉툭한 의장용이라도 쇳덩이로 만든 물건이다. 힘을 실어 던지면 마루를 파고드는 건 일도 아니다.
사람 대가리 깨먹는 것도.
“공께서는 이 사람을 우습게 생각하시는군요.”
“예, 예?! 아, 아, 아니옵니다!”
“대업을 앞두고 감히 망발이라니요. 이 사람이 아무리 유학을 배운 선비라고는 하나, 공께서 이러시면 제가 인명(人命)을 하늘에 바치는 수가 있습니다.”
얼굴 만면은 밝았고 목소리는 다정했으나, 내용이 무척이나 살벌했다. 같잖은 소리를 하면 너부터 죽이겠다는 소리였으니.
“······.”
상대방은 운하 사업을 진행하고, 공신까지 된 금천군. 게다가 왕의 신임을 받아 종계변무의 일까지 일임하게 되었으니, 작정하면 역관 대가리 몇 깨먹어도 무방했다.
또 금천군이 공허한 말로 겁박할 사람이던가.
그가 회령에서 두 번이나 여진족의 지휘관이 되어 일선에서 싸웠다는 것을, 선조사를 충실하게 한 역관들이 모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살 만큼 산 사람이라도 두개골 변형에 이은 뇌 손상으로 죽음을 맞기를 원치는 않는 법.
감히 금천군에 항거한 노 역관은 바로 대가리를 숙이며 자비를 청했다.
“주,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살려만 주십시오······.”
“제공들께서 일에 진심으로 응할 생각도 없이 뇌물로만 사행에 낄 생각을 했을 때부터, 이미 다들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
“하지만 이 사람은 손에 피 묻히는 일을 즐기지 않으니, 당장 제공들의 머리에 위해가 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역관들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노 역관이 헛소리를 하는 바람에, 이 자리에서 누구 하나 죽는 줄 알았으니까.
이제야 팔자가 피려나 보다, 싶어 희희낙락 웃으며 저택을 찾아온 사람에게는 극도의 단맛에 이은 염전 이상의 짠맛이었다.
사람이 새파랗게 질려서 죽을 정도의.
“사신단을 수행할 역관 여덟. 정원이 갖춰지지 않는다면 말씀드렸듯 극단적인 방법을 시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왕에게 일러바쳐 싹 다 인생을 막장의 구렁텅이로 잡아 처넣겠다는.
사신단 편성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역관들은 이미 벌을 받을 명분이 충분한데, 다들 자기 발로 직접 찾아와 뇌물수수의 증거까지 바친 상태였다.
“으으, 금천군 영감. 소인에게는 여우같은 부인과 토끼 같은 자식이 있습니다요.”
“소인은 늙은 어머니까지 모시고 있습니다요!”
“금천군 영감!”
“금천군 영감······!”
“어흐흑!”
인생이 꽃처럼 피려다 껌종이처럼 찌그러진 역관들은 그저 자비만 구걸할 뿐이었다.
“너무 걱정들 하지 마십시오. 이럴 줄 알고서 이 사람이 방도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
역관들이 의아해할 동안 금천군은 곁의 진녹색 도포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가 먼저 꾸벅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영감.”
“여기 역관 중에서 여덟 명의 사람이 자원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솟을대문과 담을 넘지 못하게 해라.”
콘클라베(Conclave)라는 서구의 아름다운 관습이 있다.
1268년 교황 클레멘스 4세의 선종 이후 3년 동안이나 차기 교황 선출이 지지부진하자, 로마 시민들이 추기경을 한곳에 가둬놓은 것이 시작이었다.
금천군은 자원을 받는다곤 했으나 9할 9푼 확률로 그의 손에 의해 사망할 것이 분명한 사신단 수행을 제정신으로 자원할 사람은 없으므로, 이 같은 방식을 취한 것이었다.
“혹여라도 감히 피신하려는 자가 있거든, 멍석을 말아 흠씬 두들겨 팬 뒤 양다리를 분질러 다시는 같은 실책을 저지르지 못하게 해아 할 것이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영감.”
진녹색 도포 사내는 꾸벅 허리를 숙였고 역관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죽을 자리를 마련해놓고 자원하여 정원이 차기 전까지 억류를 하겠단다.
게다가 탈주라도 한다면 떡이 되도록 패고 다리까지 분지르다니, 실로 노비들도 못 받을 (나쁜 쪽으로) 극진한 대우였다.
열탕을 채 맛보기도 전에 멱살이 잡힌 채로 냉탕 깊숙이 처박힌 역관들은, 그 숨이 막히고 목이 메는 황송함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 * *
여름 초.
날이 너무 좋아 햇빛은 쨍쨍한데 역관들에게 허락된 것은 오직 흙바닥과 변소가 전부였다.
그들 주변에는 저택 머슴들이 몽둥이를 들고서 혹시나 있을 탈주자를 경계하고 있었다. 한없이 비천한 그들이었지만, 뒷배가 금천군이어서인지 눈빛이 형형했다.
아전들은 자신의 어설픈 권위를 그들 앞에서 시험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대신,
“나는 너무 늙어서 이번 사행은 너무 부담스럽네!”
“무슨 소립니까?! 금천군 댁까지 찾아와 뇌물을 바쳐놓고는 이제 와서 발을 빼겠다는 겁니까!”
“오래 사행을 수행한 사람으로서, 이제 첫 사행을 떠나시는 영감의 노고가 걱정되어 안부 차 찾아온 것뿐일세!”
“뭔 같잖은 소립니까!”
일각에서는 노소(老少)로 따지고 있었으며,
“자네는 50년 묵은 귀중한 인삼을 바쳤다며? 그게 아까워서라도 자원을 함이 어떻겠나.”
“아무리 재물이 좋아도 목숨만 하겠는가? 자네야말로 은화를 한가득 바쳤으니 아까워서라도 역관을 자처해야지!”
“난 아깝지가 않아!”
다른 한쪽에서는 누가 더 아까운 상황인지를 두고 따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많다거나 뇌물을 많이 바쳤다고 하나뿐인 목숨에 미련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서, 논의는 여전히 지지부진 한 채였다.
그러고 몇 시진이나 흘렀을까.
뜰에 모인 역관들은 떠들 기력도 없어져 모조리 흙바닥 위에 드러누웠다. 어두워지는 하늘을 공허하게 바라볼 뿐.
날이 늦어 사방에는 밥 짓는 냄새가 가득했다. 역관들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자 저택의 머슴과 식모들도 돌아가면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
“······.”
“······.”
역관들에게는 밥도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감히 항의하는 자는 없었다.
매를 들고서 주변을 지키는 노복들은 번까지 만들어가며 감시의 끈을 조였다. 누구도 굳이 본보기가 되기를 원치 않았다.
하지만 역관들이라고 믿는 구석이 없지는 않았다. 실낱같은 희망이지만, 이렇게까지 날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다면 가족들이 눈치채고서 찾지 않겠는가?
천하의 금천군이라도 소식이 외부로 일파만파 퍼진다면 부담감을 가질지 몰랐다.
과연,
-쿵, 쿵!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있었다.
진녹색 도포 사내는 먼저 사랑방을 찾았다. 노비 출신이라더니, 공신이 되어 명예직을 받고도 상전을 모심이 실로 극진했다.
사랑방 방문이 열리고 금천군이 나타났다. 역관들은 시선을 피했다.
“열어줘라.”
금천군이 일렀다.
역관들의 기대와는 달리, 전혀 부담감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대문이 열렸다.
저택을 찾아온 자는 이십 대 중반의 청년. 그는 한데 모인 역관들을 발견하고는 당혹하더니 개중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곤 외쳤다.
“아, 아버지!”
이에 노 역관은 펑펑 눈물을 흘리면서 아들을 찾았다. 하지만 감동적인 부자상봉은 사이로 끼어드는 노복에 의해 가로막힐 수밖에 없었다.
청년은 천한 노비 따위가 (사실 노비는 아니었지만) 감히 자신과 아버지를 막음에 항의하려 했으나, 노비들의 기세가 실로 흉흉했다.
아버지조차 감히 항거하지 못하고 물러났으므로 청년 역시 냉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죽어가는 다른 역관들 너머로, 금천군이 흥미롭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
청년은 침을 꼴깍 삼키고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것이.”
노 역관은 말을 가리기로 했다. 금천군이 가한 위협을 코앞에서 토로했다간 찍힐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야 당장은 목숨을 건지더라도 무슨 소용이겠나?
“금천군 영감께서 사행(使行)을 자원할 사람이 나올 때까지 돌아갈 수 없다고 하시는구나.”
“······예?”
청년은 의아했다. 그 사행을 하고자 재산을 바리바리 싸서 금천군의 댁을 찾아간 아버지가 아니셨던가.
그러고서 찾아오라는 금천군의 연락을 받자 체통도 지키지 못하고 방방 뛰어가며 기뻐하지 않았던가?
“자원하시면 그만 아닙니까?”
“아니다, 이놈아! 영감께서는 종계변무가 성사되지 않으면 역관을 부월로 때려 죽이시겠다는데 어떻게 자원을 한단 말이냐!”
“······.”
“그래서 지금 누구도 나서지 않아 저택에 갇힌 지가 족히 서너 시진은 지난 듯하구나. 기쁜 마음에 이 아비가 조반까지 거르고 나왔더니,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다.”
“제, 제가 금천군께 청해보겠습니다.”
“의미 없느니라! 차라리 다른 역관들에게 알려 자원할 자를 수소문하거라. 여기서는 나설 사람이 아무도 없는 듯하니······.”
정식 역관이 되었지만 일이 없어 빈둥대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일단 목돈이라도 있어야 뇌물로 바치고 사행에 참여할 수 있다. 미래로 따지자면 투자금인 셈이다. 하지만 모두가 투자금을 가진 건 아니었다.
사행에 끼지 못하니 큰돈을 만지지 못하고, 큰돈을 만지지 못하니 뇌물로 바칠 여유가 없어 사행에 끼치지 못한다.
악순환의 연속!
개중에서는 분명 목숨이 걸린 일이라도 어떻게든 이 악순환을 깨려는 자가 있을지도 몰랐다.
“아, 알겠습니다!”
청년은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허둥지둥 저택을 빠져나갔다.
이후로도 저택에 갇힌 역관들의 가족과 지인이 찾아왔다가, 앞선 부자와 비슷한 대화를 나누고는 가장을 대신할 희생양을 찾기 위해 흩어졌다.
금천군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