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왜 이순신이죠-126화 (126/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26화

44. 뚝배기 (1)

-웅성웅성.

여전히 새벽별이 반짝이고 있거늘 관광방 흰 벽돌담 집 앞은 분주했다.

도성을 강타한 소식이 있었다. 운하 조성의 건으로 농담 조금 보태서 명성이 사해를 울리게 된 공조참의 이순신이 명나라 사신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선조가 자신의 대에서 종계변무의 끝을 볼 생각이라는 사실은 공공연히 알려져, 거듭된 실패 끝에 무엇으로 타개를 시도할까 호사가들은 궁금해하던 차였다.

이때 등판한 이순신의 이름은 일각에게는 신선한 반전이 되었다.

명나라를 가본 적도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이순신을 끌어다 쓸 생각을 했냐는 거다.

하지만 반대로 너무 뻔하다는 반응도 있었다. 작금의 조정은 분열되어 싸우기만 할 뿐, 능력과 대의를 갖춘 자가 드물어 처음부터 적격은 이순신이었다는 거다.

어쨌거나 호사가들의 다양한 반응은 도성 전체에 이순신의 명국행을 알리기에 충분했다.

이에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들은 서촌에 모여 살던 중인들, 그중에서도 특히 역관들이었다. 소식이 퍼지기 무섭게 새벽부터 바리바리 뇌물을 싸서 이순신의 저택을 찾은 것이었다.

“이 영감은 어떨 것 같나?”

“청렴한 사람으로 명성이 쟁쟁해서 걱정은 되는군.”

“이보시게······.”

잡담을 나누던 두 역관은 입과 귀를 맞추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원래 그런 사람이 더 탐욕스러운 법일세.”

“······그런가?”

“이 세상에 욕심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 삼의정은 물론이고 재상, 당상대신들도 함에 은화 한가득 채워서 바치면 껌뻑 죽는 것을.”

반오십의 역관은 비릿하게 웃으며 들고 온 보따리를 들었다. 곱게 포장된 보자기 안으로 사각형의 묵직한 덩어리가 비쳤다.

그러자 맞은편의 역관의 얼굴에는 당황이 비쳤다. 함의 내용물을 짐작하기란 쉬웠고, 그에 반해 자신이 가져온 뇌물은 너무나도 보잘 것 없었다.

“어어······.”

“무얼 가져왔나?”

반오십 역관이 비릿한 웃음과 함께 물었다. 젊은 역관은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에라이, 한심한 사람 같으니. 일단 사신단에 동행만 한다면 수십 배는 남겨먹을 수 있는데 어설픈 뇌물로 한 자리 차지하려고 했나?”

젊은 역관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집안이 부유하지 않아서, 딴에는 뇌물이랍시고 마련한 것도 크나큰 지출이었다.

어디 가서 무시받을 정도로 허접한 성의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맞은편 반오십 역관이 끌어안은 한 보따리 은화 앞에서는 한없이 초라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오래 역관을 해본 몸으로서, 자네에게 큰 가르침을 하나 주자면, 한 번이라도 사신단에 들어가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으니 그 한 번에 기둥뿌리도 뽑아 바칠 각오를 하게.”

“······!”

젊은 역관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꾸벅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는 어딘가로 뛰어갔다.

그를 떠나보낸 반오십 역관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보아하니 빈한한 집안 같은데, 기둥뿌리를 팔아먹는 대도 은화는 보기 힘들 터였다.

괜히 반평생 역관질의 정수가 녹아든 조언을 해준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경쟁자가 될 수 없을 것 같아서.

주변을 보니 전전긍긍하는 역관들 사이로 무뚝뚝하게 있는 자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이야말로 진짜 경쟁자였다. 심지어는 노복까지 동원해 재물을 짊어지고 온 녀석도 있었다.

그쪽에서도 시선을 느낀 것일까.

노년의 두 역관은 동종업자에 대한 경의와 경쟁자로서의 경계를 담아 서로에게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얼마나 되었을까······.

-끼익.

대문이 열리더니 진녹색 도포를 입은 사내가 나타났다.

역관 중 하나가 예를 표했다.

“영감 어르신.”

그러자 역관들 중에 있던 몇몇이 비릿하게 웃었다. 첫 인사부터 잘못 해서야, 설령 억만금을 가져와도 밉상을 피할 수 없었다.

과연 진녹색 도포의 사내는 헛소리를 한 역관을 상대로 손짓했다. 물러나라고.

“······?”

역관이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짓자 진녹색 도포 사내가 말했다.

“가시라고.”

“······예, 예?”

난데없는 축객령에 역관이 얼을 타자, 주변 역관들은 경쟁자를 없앨 기회가 왔다 싶었는지 눈총과 핀잔을 날려댔다.

“가시라지 않나?”

“아니, 갑자기 왜······.”

“저분은 금천군 영감이 아니라 영감님 댁의 별채에 기거하는 다른 분이시라네!”

즐거움까지 묻어나는 통렬한 지적에 실수한 역관은 그대로 새파랗게 질렸다. 금천군이 어리다는 것만 대충 알고 있다가 벌어진 초유의 낭패였다.

하지만 어쩌겠나. 역관질은 현실인 것을.

주변 역관들이 결례니 무례니 하며 한두 마디씩 하자 실수한 역관은 도망치듯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정리되자 진녹색 도포 사내가 역관들을 향해 말했다.

“한 분씩 금천군 영감을 뵐 수 있도록 하겠소. 모쪼록 소란 없이 순서를 정해 들어오도록 해야 할 것이요. 영감께서는 잡음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신 분이니.”

“예.”

역관들은 공손하게 답했다.

누구를 사신단에 동행시킬지를 정하는 사람은 오직 금천군뿐. 그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은 사람은 적어도 이 자리에는 없었다.

순서는 이견 없이 정해졌다. 선착순이다. 자신보다 일찍 온 사람은 몰라도, 자신보다 늦게 온 사람은 안다.

혼란은 벌어지지 않겠지.

진녹색 도포의 사내가 역관들을 내려다보자 그들 중 하나가 예를 표하며 계단에 올라섰다. 진녹색 도포의 사내가 말했다.

“따라오시오.”

두 사람은 뜰을 거닐었다.

최초로 금천군의 저택을 찾은 역관은, 사실 소문을 접한 그 순간부터 미리 준비해둔 뇌물을 끌어안고서 바로 금천군의 저택을 찾았다.

덕분에 일등으로 도착······!

자신만 준비한 게 아니었는지 실로 간발의 차였다. 하지만 아무리 간발의 차라도 일등은 일등이고 이등은 이등이다.

그리고 역관은 자신이 얼마나 금천군에게 잘 보이고자 노력했는지를 아낌없이 밝힐 예정이었다.

“영감.”

금천군은 대청 안쪽에 앉아 있었다. 들었던 대로 역시나 젊었다. 얼굴에는 호의적인 미소가 걸려있었으나 눈빛은 날카로웠다.

고작 딱지치기 따위로 그만한 나이에 참판에 오르고 국가의 대사업을 맡은 게 아니라는 듯.

하지만 역관은 기죽지 않았다. 재화 앞에서도 평정을 유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므로.

뇌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찾아온 역관들에게 문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역관은 이미 가장 큰 관문은 넘었다고 생각했다.

“소인 인사드리겠습니다. 정육품으로 역관을 지내고 있는 박재륜이라고 하옵니다.”

“그런가.”

“금천군 영감께오서 이번 사은사의 정사로 발탁되셨음을 경하드립니다. 중임의 전권을 맡으셨다는 건, 그만큼 전하께오서 깊은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는 방증이겠지요.”

“흠.”

“소인이 감히 잔말이 많았군요. 아, 대과를 갑과 삼등으로 급제하신 영감 앞에서는 그다지 자랑거리가 될 수 없음을 압니다만, 소인은 역관이 될 때 열아홉 명 중에서 오직 세 명만이 뽑히는 갑과로 급제하였사옵니다.”

금천군의 시큰둥한 반응이 이어졌지만 역관은 아부에 자기 PR을 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뇌물이 비등할 때는 능력 순으로 골라질 터이니.

“여기.”

역관이 신줏단지 모시듯 정성스럽게 포장한 뇌물을 들어올리자, 금천군은 턱짓하여 진녹색 도포 사내에게 대신 받도록 했다.

내용물 자체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역관은 조심스럽게 잡설을 덧붙였다.

“어렵게 귀한 것으로······ 오십 년 묵은 인삼입니다. 금천군 영감께옵서 공사가 다망하시어 원기가 상하셨을까······, 소식이 들리자마자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와 주제넘게 바칩니다.”

“신경 써줘서 고맙소이다.”

그동안 시큰둥했던 금천군의 감사 표현!

역관은 자신이 어렵사리 구한 인삼이 힘을 발휘했음에 기뻐했다. 뇌물로나 실력으로나 자신은 분명 상위권이었다.

* * *

며칠 뒤.

모(某) 역관은 싱글벙글 웃으며 자택을 나섰다. 반오십의 노 역관의 조언을 듣고 다급히 집안의 예물을 끌어모아 바쳤는데, 그 성의가 통한 것이 분명했다.

금천군의 가노가 저택으로 오라 전했으니까.

역관 시험에는 가까스로 합격해 마찬가지로 역관이었던 아버지의 유지를 잇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동안 사신단에 동행한 적이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던 모(某)였다.

그렇게 집안의 얼마 없는 재산만 까먹기를 몇 년.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고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마침내 사신단에 동행하게 되어, 아버지도 이뤄내지 못한 숙원을 마침내 자신이 이룩하게 되었다.

“부인, 이제야 우리 집안이 피려나보오!”

역관 모(某)는 못난 지아비를 뒷바라지하느라 고생만 한 부인에게 고마움을 한껏 표하고는, 꽃단장까지 하고서 거처를 나섰다.

골목에는 드문드문 북촌의 저택보다도 휘황찬란한 노 역관들의 거처가 있었으나 역관 모(某)는 부럽지 않았다.

이제는 자신이 그런 저택에서 살게 될 터이니.

그렇게 싱글벙글 어깨춤까지 추어가며 북촌 관광방, 금천군의 저택에 도착하니 이게 웬일?

“······?”

“······?”

“······?”

한두 명도 아니고 족히 서른 명은 될 것 같은 역관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사신단에 딸려가는 역관의 숫자는 일반적으로 여덟 명 내외다. 애초에 역할이 그렇게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정사 통역 두 명, 부사 통역 두 명. 그리고 서장관의 통역 두 명에, 말을 관리하는 통역 하나, 마지막으로 물건을 관리하는 통역 하나.

그러니 사은사의 정원이 모두 갖춰질 경우 여덟 명이라는 뜻이고, 정사 혼자서 달랑 갈 경우에는 네 명, 심지어는 셋까지도 줄어드는 수가 있었다.

물론 필요에 따라 늘어날 수는 있지만 서른 명이나 되는 역관이 우르르 몰려갈 가능성은 한 없이 0으로 수렴했다.

아무리 아랫사람 챙기기를 좋아한다는 금천군이라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기행이 일어날 수는 없잖은가?

“······.”

“······.”

“······.”

덕분에 역관들은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도통 이해하지 못하고 멍청한 얼굴로, 뒤늦게 희희낙락 왔다가 절망한 동료들을 마주할 뿐이었다.

그러고 얼마나 지났을까.

-끼이익.

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며칠 전 새벽에 보았던 진녹색 도포의 사내가 나타났다.

당시와는 별개로, 역관들은 완전히 다른 이유로 진녹색 도포 사내에게 목말라 있었다. 개중에 선두에 있던 역관이 물었다.

“저, 저기.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자세한 사항은 금천군께서 친히 설명해주실 것이오. 다들 들어오시오.”

“······.”

이번에는 한 사람씩이 아니라 모조리 들어오란다.

역관들은 잔뜩 긴장한 채, 입을 한가득 채우는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질서정연하게 뜰로 입장했다.

금천군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대청에 앉아 있었다.

역관들은 다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으나, 그러다 눈에라도 날까 싶어 다들 죄지은 사람처럼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고 아래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러던 중.

금천군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불어 모아 다들 당혹스럽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들 나에게 성의를 표현했던 사람들인데 어찌 쉽게 목숨을 걸라 할 수 있겠습니까?”

“······?”

역관들은 의아했다.

목숨을 거는 일이라니?

물론, 사신행은 쉽지 않다. 오가는 도중 예물을 갖춘 사신단을 노리는 도적도 있고, 또 명 황제의 명에 의해서 사신이나 수행원이 유배를 당하는 일도 있었다.

역관들이라고 인생을 날로 먹지만은 않는 셈이다.

하지만 멀쩡히 살아서 돌아오기만 한다면 백 배 천 배는 남겨먹을 수 있는 장사라 뻔뻔히들 목숨 걸고서 사신단에 끼려는 것이었다.

사신이나 수행원이 죽기까지 하는 경우도 정말 드물었고.

그것을 금천군이라고 모를 것 같지는 않았다. 역관들은 조심스럽게 시선을 올려, 금천군에게 의문 어린 표정을 보여주었다.

금천군이 답했다.

“내가 주상전하께 부월을 하사받아서, 일이 성사되지 못할 경우에는, 동행한 자들 머리통을 이 부월로 친히 깨뜨려 죽일 생각이라 말입니다.”

어느새 금천군의 손에는 금으로 도금된 의장용 도끼, 금월부(金鉞斧)가 쥐어져 있었다. 금천군은 뭉툭한 도끼날을 매만지며 싸늘하게 웃고 있었다.

“······!”

“······!”

“······!”

역관들은 자신들의 인생이 지금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음을 깨닫고서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