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25화
43. 지푸라기 이순신 (3)
도성.
간만의 귀환이었지만 반갑지는 않았다. 내근이 도리어 헬이어서 반년 짜리 출장이 도리어 꿀이었으니까.
“영감.”
남대문을 넘어서자 선전관이 수하들과 함께 예를 표했다. 귀환하는 김에 나와 동행한 것이라 그에게도 일정은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소관들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럼, 무운을 빌겠습니다.”
끄덕.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니 선전관은 수하들을 이끌고 먼저 떠났다. 덕분에 나만 덩그러니 놓였다. 그동안 존재감이 없었던 을룡과 함께 말이다.
녀석이 곁에서 입을 열었다.
“저택부터 찾으시지요. 아무리 입궐이 중차대한 일이라곤 하나, 피로하여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왕을 뵙는 것도 예는 아닐 것입니다.”
“그래. 저택부터 들러야겠구나.”
을룡의 제안과는 별개로 나는 처음부터 저택을 찾을 생각이었다. 선조놈을 마주하는 비극을 굳이 재촉할 필요는 없었으니.
대로를 한참이나 가로지르니 북촌 관광방에 이르렀다. 저택 앞에 멈춰서니, 귀신 같이 솟을대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영감 나리십니까?”
나는 흠칫 놀라며 답했다.
“예. 대문 열어주십시오.”
경첩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저택 식구인 머슴이 나타났다. 내가 돌아온 것을 이미 확인하였음에도, 그는 나를 발견하자 단숨에 화색을 띠었다.
“정말로 영감 나리셨군요.”
“광고하며 온 것도 아닌데 어떻게 나인 줄 알았습니까?”
“발소리가 대문 앞에 뚝 멈추는 것을 듣고는 혹시나 싶었사옵니다요. 이제는 영감께서 태안으로 떠나신 것을 모르는 사람도 없으니 말입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신기라도 들었는 줄 알았는데 다행스럽게도 아니었군요.”
“하하. 안으로 듭시지요.”
머슴은 마저 대문을 젖히고는 물러났다.
뜰로 들어서니, 인기척을 느낀 저택 식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반겨주었다.
“공자님.”
“영감님.”
“나리.”
나는 식구 하나하나와 인사를 나누고는 부탁했다.
“목욕물 준비해주시겠습니까. 며칠 내내 노상에서 지냈더니 쓰러지기 일보직전입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서두르겠습니다.”
“고마워요. 을룡 것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사람 하나를 보내니, 식모 하나가 물었다.
“식사는 어찌하시렵니까?”
“아, 그것도 부탁드리지요. 일단은 느긋하게 씻은 다음 들 생각이니 서두르실 필요는 없습니다.”
“예, 예.”
그렇게 저택 식구들은 해산했고 나는 안채를 찾았다. 내가 돌아온 것을 인기척으로 안 사람이 비단 머슴과 식모들만은 아닐 터.
장장 반년의 세월 동안 밖에 있었기에 졸지에 생과부가 된 부인과도 인사를 나누지 않을 수 없었다.
“계십니까.”
안채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물어보니,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그녀는 입구 근처에 다소곳이 앉은 채였다. 바느질이라도 하고 있었는지 너머로는 만들어지다 만 옷이 널브러져 있었다.
“돌아오셨습니까, 상공(相公).”
간만이 재회에도 부인은 반기는 기색이 없었다. 만약 그녀가 원래 흔들림이 없는 사람임을 몰랐다면, 원망이라도 하는 줄 알았으리라.
······아니, 정말로 원망하는 거 아닐라나?
조선 시대에 여인이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방법은 한정적이다. 아무리 예전부터 고립된 환경에서 사는 데 단련되있다 하더라도, 사교는 인간의 본능.
지아비가 반년을 넘게 타지에 있었으니 그동안 부인이 어떻게 견뎠을까 싶었다.
“흠흠.”
“해주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에요······, 간만에 부인을 뵈려니 미안해서.”
“나랏일로 바쁘셨는데 미안하실 게 무어 있단 말입니까? 소첩은 괜찮습니다.”
“제가 안 괜찮아서 그래요.”
내가 너무 미안한 게 우스웠던 걸까. 부인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세간에서 말하길 웃는 얼굴에 침은 못 뱉는다지만······.
나에게는 부인 앞에서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그래서일까.
부인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그게.”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 사은사 정사로 임명되어서요······. 다시 몇 달 동안 도성을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경찰 앞에서 죄를 자백하는 죄인의 심정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흐뭇하게 걸려있던 부인의 미소도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
잘못했습니다.
때마침 머슴이 목욕 준비가 끝났다고 알려왔다. 나는 부인에게 인사하고는 피신하듯 안뜰을 벗어났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목욕도, 식사도 마친 나는 사랑방에서 드러누운 채였다.
상경하느라 며칠이나 노상에서 지냈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눈썹은 천근이었고 엉덩이는 만근이었다.
전신에 힘이 쭉 빠진 상태로 머리는 당장이라도 이부자리 깔고 누워서 꿀잠 한 판 때리라고 악마의 유혹을 속삭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초인적인 정신으로 방을 나섰다.
덜컥.
사랑방의 인기척을 들은 걸까. 맞은편 별채의 방문도 열리더니 을룡도 나타났다.
“······!”
“······!”
나와 을룡은 서로를 마주하고는 사이좋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분명 저택에 귀환했을 때만 해도 멀쩡했던 을룡이 반쯤 죽어있는 게 아닌가. 눈 아래에는 그림자가 짙게 껴 있었고 어깨도 축 늘어져 있었다.
아마 을룡도 나에게서 똑같은 인상을 받았겠지.
“영감, 무척이나 피곤해 보이십니다.”
“너도 마찬가지야.”
“쉬지 않으시고요?”
“뇌물이라도 구해다 바쳐야 할 상황이라.”
“누구에게 말입니까?”
“안방마님.”
“아.”
그날 안방마님은 노리개 3개를 받았다.
* * *
다음 날.
조금이나마 피로를 청산한 나는 관복을 갖추어 저택을 떠났다. 당연하지만 선조와 면대하기 위함이었다.
시간이 점심 즈음이라 그런지 육조거리는 한산했다.
광화문을 거쳐 궁 안을 잠시 거니니 왕이 평소 업무를 보는 사정전(思政殿)에 도착했다. 주변을 위사들이 지키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선조는 여기 있는 듯 했다.
“영감.”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밝은색 비단옷을 걸친 장년인. 허리를 숙인 채 걷는 종종걸음과 수염 없이 맨들거리는 턱을 보아하니 신분과 역할이 분명했다.
“무슨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전하께서 이 사람을 예조참판 겸 사은사 정사로 임명한다는 교지를 받들고, 태안에서 막 올라온 참입니다.”
“마침 안에 계십니다. 안내해드리지요.”
내시는 따라오라는 듯 발길을 돌렸다. 뜰을 가로질러 사정전 복도를 잠시 거니니, 내시가 미닫이문 앞에 멈춰 섰다.
입구 좌우로 젊은 내시들이 지키고 선 곳.
나를 안내해 준 내시가 안쪽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전하, 금천군 이순신 입시이옵나이다.”
“들라 하라.”
별 감흥이 없어 보이는 목소리.
드륵, 하고 미닫이문이 좌우로 열리자 선조가 나타났다. 단호하게 정제된 어조와는 달리 눈빛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안쪽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서니 뒤편으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꾸벅 허리를 숙여 왕에게 예를 표했다.
“신 이순신, 돌아왔사옵나이다.”
“앉으시게.”
선조는 맞은편으로 손을 뻗으며 자리를 권했다. 마치 나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이미 방석도 깔려 있었다.
모종의 신호이기라도 한 걸까.
입궐한 직후 어찌하여 바로 자신을 뵈지 않았냐고.
과민반응일 수도 있겠지만······. 설령 추측이 사실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나아가 방석 위에 자리하니 선조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외지에서 사업을 전담하느라 고생이 많았겠군.”
“신하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옵나이다. 더군다나 신이 주도한 일이옵니다. 마땅히 결자해지함이 옳을 것이옵니다.”
“미련이 남아 있는 것 같은데.”
“일의 경중을 생각하면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신이 직책과 거처를 옮기는 일은 상책이라고는 사료 되지 않사옵니다.”
“인정하네. 사업의 경중을 생각하면 참판을 명예직으로 옮기고 계속 태안에 두는 편이 상책임을, 나라고 어찌 모르겠나?”
알면서 왜 그랬냐?
나는 무언으로 추궁했다.
선조가 답했다.
“하지만 나라에 중요한 사업이 오직 운하만 있는 건 아닐세.”
“하오나 운하를 맡을 적임자는 오직 신뿐이옵니다.”
이건 일을 맡아 황해도 금천으로 떠날 때도 했던 말이었다.
거문고에 소리가 나는 것에는 모두의 공이지만, 받침이 될 수 있는 자는 많아도 현이 될 수 있는 자는 오직 나뿐이라고.
“이만하면 도감의 사람들도 사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을 텐데. 혹시, 참판만 운하에 대한 지식을 전유했던 건 아니겠지.”
“그렇지는 않사옵니다. 허나 사업이 진행되면서 운하에 대한 이해도가 늘어난 사람이 도감의 아랫사람들만은 아니겠지요.”
나 역시 이전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게 되었으며 총책의 적임임은 여전히 나라는 소리였다.
사실 선조는 지랄 맞은 놈이기에 면전에서 이렇게까지 강짜를 부리는 것은 과했다.
하지만 운하에는 나만 아니라 선조의 정치적 목숨이 달려 있었다. 물론 사업이 실패한다고 그가 어좌에서 끌어 내려지지는 않겠지만, 한동안은 아가리를 닫고 있어야 할 터였다.
이만한 사업을 망쳐놓고도 근신하지 않고 절대군주 흉내를 내다간 그때는 진짜 끌려 내려질 수도 있으니.
물론 선조의 안위는 내 알 바가 아니다.
문제는 이 사업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를 띄워준 선조가 쭈구리가 되면 나 역시 타격을 피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를 선조도 알고 있어서일까.
“그래, 그래······.”
용케도 지랄하지 않고 수긍했다. 하지만 할 말이 없지는 않았는지 조금은 힘이 들어간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참판이 맡은 사업을 떠나 국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굴포운하는 이미 안정적인 상태에 접어들었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 종계(宗系)의 변무(辨誣)에 대해서는 참판도 알고 있으리라 믿네.”
어찌 모를까.
그래서 일하다 말고 불려왔는데.
선조의 말마따나 국가적인 시야에서 경중을 따지자면 궤도에 올라간 굴포운하보다도, 진전이 없는 종계변무가 더 중차대한 일인 건 맞다.
만일 미국이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기록한다면 과연 대한민국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겠나. 그것보다 더한 게 종계변무의 일이었다. 다른 시대도 아니고 조선시대에 창업군주 태종대왕의 족보가 상국인 명나라의 역사서에 잘못 기재되었으니까.
“어찌 신이라고 모르겠나이까. 다만 우려스러울 뿐이옵니다.”
“무엇이?”
“신은 여태껏 단 한 번도 명을 다녀온 적이 없사옵니다. 그런데 대뜸 명으로 가서 작은 일도 아니고, 종계변무의 일을 재촉하시라니요. 이건 신도 감히 성과를 낼 수 있으리라 확언할 수 없사옵니다.”
일을 맡긴 왕에게 나는 이거 못 한다고 장담하는 것도 우습긴 한데······. 이게 명백한 사실 아닌가?
“어찌 나라고 모르겠나? 하지만 도저히 믿을 사람이 없어서 자네를 시키는 것이야!”
“······.”
“원접사(遠接使), 변무사(辨誣使) 경력이 있는 이후백도 성과를 내는 데 실패했네. 선대왕들도 받았던 공허한 약조와 위로에서 끝났을 뿐이지. 속대명회전(續大明會典)이 편수하는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기회가 있을지 몰라!”
선조는 언성을 높이며 신경질적으로 서안을 때렸다.
그동안 평정을 지켰음에도 제 분에 못 이기는 상황이 되자, 본모습을 보이고야 마는 선조였다.
“최선이었던 이후백이 실패했는데, 내가 어찌 지푸라기라도 잡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참판은 그동안 맡은 일이라면 모두 기대 이상을 보여주었어. 그래서 내가 믿고 다시 중임을 맡기려는 것일세!”
“······.”
“급작스러운 건 알겠지만 신하로서 왕을 신경 써줘야지!”
“신이 말씀드리고자 했던 바는, 소임을 맡지 않겠다는 게 아니오라 분명 신보다 나은 적임자가 있을지 모르겠다는 차원에서 우려를 표한 것이었사옵니다.”
“그 적임자가 실패했기 때문에 참판을 고른 걸세!”
선조는 이견은 듣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답하고는 말을 이었다.
“전권을 맡길 터이니 사신단의 구성, 출발할 길일, 경로, 일정은 알아서 해도 좋아! 너무 여유 부리지만 않으면 돼. 하지만 돌아올 때는 고작 말뿐인 교서보다도 확실한 게 있어야 할 거야.”
“······.”
나는 입과 턱을 쓰게 매만졌다. 이전 사신들도 못 해낸 일을 대뜸 나보고 해내라니.
아무리 자율성을 보장하더라도 성과는 앞서 말했듯 알 수 없었다. 종계변무는 우리 쪽에서 하는 게 아니라, 저쪽에서 해내는 것이니.
오랜 침묵이 있었고 선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금천군?”
“하명하시옵소서.”
“가타부타 말이 있어야지.”
염병, 들을 생각이 있어야 뭔 말을 하지.
나는 입맛만 쩝 다시고는 답했다.
“감히 청하옵건대, 약조를 해주시옵소서.”
“무슨 약조?”
“일이 성사되면 모두를 공신으로 녹권하시겠다고 말이옵니다.”
“종계 변무만 확실하게 된다면 고작 공신 녹권뿐이겠나?”
선조는 오히려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사실, 일의 경중을 따지자면 종계변무 역시 운하 사업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사신단의 생사여탈을 저에게 맡기시옵소서.”
“······뭐?”
“모두가 목숨을 걸고 하지 않으면, 설령 신이 최선을 다하더라도 미련이 남을 것이옵니다. 된다면 무방하겠으나 안 될 일이라면 미련이 남지 않도록 철저해야지 않겠사옵니까.”
“실패한다면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어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그럴 일은 없겠으나 태만한 마음으로 사신단에 동행하는 자는 없어야지 않겠사옵니까. 특히 통역 등 곁가지가 사사로운 마음을 품고서 동행한다는 것은 전하께서도 아실 것이옵니다.”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매 사신이 명을 찾을 때마다 어떻게든 사신단에 끼어들어 사무역으로 한탕하려는 자들이 부지기수였으니까.
이미 통역 등 중인들이 모여 사는 서촌에서도 부유함이 북촌을 능가하는 곳이 부지기수라, 그들인 다른 방면으로 사신단 곁가지들의 귀감이 되고 있었다.
물론 그런 사무역이 조선의 시장을 활성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지만, 마음이 콩밭에 있어서야 무슨 일을 해내겠나?
선조는 짧게 침음하고는 말했다.
“부월을 내리겠다.”
부월이란 전장을 나서는 장수에게, 명을 불이행하는 자를 왕 대신 참하라는 전권이임의 상징!
일개 사신단 정사에게 그 부월이 맡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