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24화
43. 지푸라기 이순신 (2)
“제조 영감.”
집무실을 찾아온 유영경이 물었다.
“말씀하세요.”
“소관이 전반적으로 도안을 살폈사온데, 의아한 점이 하나 있어 여쭙고자 하옵니다.”
이순신은 개의치 말고 물어보라는 뜻으로 짧게 손짓했다. 이에 유영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송구하오나, 소관은 수문의 존재는 운하 수로의 수평을 맞추고 수면의 높낮이가 다른 각 운하 끝의 선거(船渠) 사이를 잇기 위함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런데요?”
“이러한 효용 없이도 수로 중간중간에 의의 없이 존재하는 수문이 많은 듯하옵니다. 감히 도안을 살펴보니 대부분의 수문이…… 별다른 이유 없이 설치되는 듯하여.”
“그래서요.”
“이러한 수문들을 최소화한다면 인력은 물론 공기와 자재를 크게 단축할 수 있을 듯하여 감히 아뢰게 되었습니다.”
“…….”
나는 조용히 콧바람을 내쉬었다.
유영경의 지적은, 적어도 그의 안목에서 보기에는 합당하게 들려진다. 기능도 없이 존재할 뿐인 수문을 왜 만든단 말인가?
품만 많이 들고 번거롭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나라고 이유 없이 이런 수문들을 만든 게 아니었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곡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만, 이 사람이 수문을 아무런 이유 없이 배치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나는 보채지 않았다.
가만히 대답을 기다리니 유영경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제조 영감께 심모원려를 어찌 식견 짧은 소관이 짐작조차 할 수 있겠사옵니까…….”
“음.”
이 정도 수준의 사소한 의문 제기야, 이대로 끝낼 수도 있었다. 도감 밑에 한두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서 돌아가며 한마디만 해도 나는 바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하는 실무진들이 의문을 가져서 계획과는 달리 공사를 진행한다면 그것대로도 문제다.
생불인 내가 중생들을 친절히 계도 해줘야지 않겠나.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해주신 말씀대로, 대부분의 수로는 장식과 다를 바가 없지요.”
“하온데 어찌…….”
“하나만 물어보겠습니다. 만일 필요한 수문만 남겨놓았을 때, 수문과 수문 사이에 보관된 물의 양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건…….”
유영경은 질문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수문을 줄이자는 이야기인데, 왜 수문과 수문 사이의 물이 얼마나 되냐는 물음이 나온단 말인가.
가늠하기는 어렵겠지만 분명한 것이 하나 있다면 수문과 수문 사이의 물은 거의 호수를 만들고도 남을 터였다.
수면을 안정시키고 조운선이 충분히 통과할 수 있도록 넓이와 깊이가 상당했으므로. 그것이 몇 리(里) 구간으로 이어지니 뻔했다.
“그렇다면 하나만 더 물어보겠습니다. 운하에 금이 생겨 누수가 발생해, 즉시 보강이 필요하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뻔했다.
물속에서 시멘트가 굳을 수는 없으니 수로의 모든 물을 흘려보내고 작업을 해야겠지.
달리 말하자면 운하에 있던 방대한 물을 덧없이 낭비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펌프랄 것도 없는 이 시대에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고지대의 저수지뿐임에도 말이다.
그래서 운하 조성 사업은 동시에 저수지 확장도 겸하고 있었다. 가뭄이라도 생겨 끌어올 물이 없어지면 운하 전체가 마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
유영경은 뒤늦게 이해했는지 탄식을 흘렸다.
“하지만 임시로 격벽을 만드는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한정적인 자원으로 어떻게 침수를 완전히 막을 격벽을 만들겠다는 건지도 의문이지만…… 설령 그리 만들어도, 신뢰하기는 힘들지요. 작업 도중에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대형 참사로 번지지 않겠습니까?”
애먼 작업자들이 졸지에 을지문덕 만난 당나라 군사가 되는 수가 있었다.
“유비무환이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기능하지 않을 수문임에도 미리 만들어두자는 것이지요.”
특히 침하에 대비해서 말이다.
태안의 지질은 암반으로 인해 땅을 깎아서는 운하를 만들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튼튼하지만, 그럼에도 침하는 발생할 수 있다.
구조물이 이질적인 지반에 걸쳐 있어 비틀리는 경우, 지하수가 존재해 지반이 가라앉거나, 구조물의 무게에 지반의 수분이 빠져나가면서 주저앉는 등.
온갖 사유로 발생하는 것이 침하라 극히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기초공사랄 것도 없는 조선 시대 건축술을 감안하면 더더욱.
“송구합니다. 이러한 이유가 있는지도 모르고 감히 소관이…….”
유영경이 사과하자 나는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물어봐 주어서 고맙습니다. 이 사람이 공조의 참의이고 운하조성도감의 제조라고는 하나, 이만한 공사는 난생처음이고 참고할 전례도 없습니다. 실수한 구석이 있을지 모르니 앞으로도 의문점이 생긴다면 기탄없이 물어보세요.”
“……예.”
유영경은 송구하다는 듯 허리를 숙였다. 혹시나 한 건 하나 싶었다가 망신만 당한지라, 다시 나설까 궁금도 했지만.
“그럼, 해 떨어지고 나서 봅시다.”
“알겠습니다. 송구했습니다. 그럼 소관은 이만…….”
유영경은 허리를 꾸벅 숙여 예를 표하고는 물러났다.
그리고 홀로 남게 되자, 나는 몸을 틀어 옆으로 늘어졌다.
이따금 발생하는 이런 일들만 제외한다면 도감의 총책치고는 바쁘지 않다. 운하 공사는 플랜이 이미 다 짜여 있다. 유사시의 상황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알아서 굴러간다.
현장을 찾아봐야 의전이니 뭐니 차질만 생길 뿐.
서면보고 위주로 일하다 보니 일 자체는 무척이나 여유로웠다.
“도성에 안 올라가고 한평생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네.”
눈치 볼 놈도 없겠다, 태평하게 다리까지 꼰 채 눈까지 감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도성에서는 조회다, 조참이다 새벽 별 보며 입궐해서는 선조 앞에서 중신들과 어전회의를 거치며 하루가 시작 된다.
대체로 말을 아끼는 편이지만 한 시진은 꼬박 서 있다 보니 다리도 저리고, 회의 도중 언급이 되거나 직무와 관련되는 주제가 나오면 안 낄 수가 없다.
그러다 회의가 파하면 쉬지도 못하고 등청.
당상관이지만 당상관 중에서는 막내라는, 이중적인 위치라 주어지는 일도 많다. 중간관리직의 설움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다르다.
공신 녹권에 봉군까지 더해져 품계도 올라 이제는 종이품. 관찰사와 동급이지만, 충청도 관찰사는 어명을 받아 나에게 전적으로 협조해야 하는 상태였다.
그야말로 이곳에서는 내가 왕이요 곧 법!
부디 선조가 나를 부르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 *
“이런 제기랄.”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는 소식이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권철! 나의 처조부 되는 사람이다.
어떻게든 정계 복귀를 바라더니 최근에는 기어코 영의정으로 부활했다.
좋은 소식이다만 오래전의 일이고, 지금 나에게는 비보만이 있을 뿐이었다.
“…….”
편지의 말은 길었지만 요약은 이러했다.
올해 초 명을 다녀온 성절사(聖節使)가 하사품을 받아와, 이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자 사은사(謝恩使)를 보내게 되었는데 내가 사은사 정사(正使)로 낙점되었다는 것이었다.
밖에서 일하는 사람을 갑자기 명으로 보내겠다니 실로 뜬금이 없으나, 내막이 있었는데 이번 사은사는 원래 역할처럼 황제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실은 조선과 명 사이의 오래된 외교 문제인 종계변무의 진척을 위함인 것이었다.
‘이런 지능 박살 난 발상을 하다니…….’
상식인인 나로서는 일선 지휘관, 기술자의 성과만 내온 나를 중차대한 외교 문제 해결에 투입하겠다는 건 정말 개 짖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 시대에서는 전문화에 대한 개념이라고는 추호도 없었다.
기획재정부 비슷한 호조의 장관으로 임명된 사람이, 바로 다음 날 국토교통부 비슷한 공조의 장관으로 재배치되는 일도 부지기수로 일어나는 게 바로 조선이었다.
이 시대 인간들 기준에서 재능이란 머리 쓰는 일 or 몸 쓰는 일이 다인 것이다. 전자면 문관적성이고 후자면 무관적성이고, 그게 끝이었다.
외교전문가?
기술전문가?
알 바냐, 다.
‘무협지에서도 만류귀종 타령은 헛소리거늘 현실에서 이러고 있으니…….’
졸지에 운하가 완공될 때까지 탱자탱자 태안에서 썩으려던 나만 벼락 맞은 셈이었다.
물론 국토교통부 차관보인 내가 반년이 넘도록 타지에서 일하고 있으니 어떻게든 변화가 있으리라곤 예상은 했다.
덕분에 판서와 참판 둘이서면 외롭게 내가 해야 할 일까지 떠안았을 테니까.
하지만 실직을 명예직으로 빼주는 정도로만 생각했지, 아예 판이한 역할을 맡길 줄은 몰랐다.
‘가만 봐라, 내가 사신단 정사가 된다는 것은 공사에서도 손을 떼게 되는 게 아니냐? 운하조성도감 제조 자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개판도 이런 개판이 따로 없었다.
시대적 한계도 분명히 있었지만 이 시대 사람들이라고 바보인 것은 아니라서, 누군가에게 재능이 있다면 거기에 능통하니 그 일을 맡겨야 한다는 발상 정도는 당연히 한다.
그럼에도 내가 뜬금없이 사은사 정사로 빠진 것에는, 선조의 영향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
굴포운하 공사계의 숙원사업이라면 종계변무는 외교계의 숙원사업이기 때문이다. 성사만 된다면 왕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게 된다.
그래서 선조는 이전부터 종계변무를 진전시키고자 애써왔다. 고작 두 해 전만 하더라도, 이후백과 윤근수를 보내 종계변무를 성사시키려 하지 않았나.
그러다가 도리어 욕만 먹고 돌아오자 타개책으로 나를 골랐을 가능성이 9할 9푼 9리에 수렴하고 있었다.
하나만 집중해도 모자를 판에 욕심 하나는 더럽게 많은 놈이었다.
그리고 과연 보름 뒤.
선전관이 찾아왔다.
“금천군 영감.”
수하들과 함께 태안 관아를 찾은 선전관은, 나의 앞에서 꾸벅 허리를 숙였다.
“전하의 교지를 받들어왔사옵니다.”
“그렇습니까…….”
내가 무릎을 꿇어 왕의 뜻에 예를 표하자 선전관이 교지를 펼쳐 낭독했다.
“운하조성도감 제조 행 공조참의 금천군 이순신은 왕의 뜻을 받들라. 그대는 문무(文武)에 다방면으로 능통하여 맡은 직임마다 기대 이상의 역할을 수행해 왔으며 마침내는 왕을 보필하여 나라의 숙원이었던 운하 사업을 일으켜 하루도 빠짐없이 진전을 보이므로, 대업은 이미 성취된 것과 같아 심히 만족스럽다…….”
아주 대놓고 이만하면 할 만큼 했으니 나와서 내 명령을 들으라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윤이(尹彛)와 이초(李初)가 무고하여 태조대왕의 선조를 잘못 기록한 바가 이와 같으므로 여러 대왕께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셨으나, 성취하지 못하여 중임이 나에까지 이르렀는데 오늘날에 당하여 금천군이 있어 왕이 깊게 믿고 의지하므로 중임을 맡기고자 하니, 금일부로 금천군을 가정대부 예조참판으로 제수하고 사은사 정사로 임명하므로 금천군은 속히 도성으로 올라와 왕명을 받들도록 하라.”
선전관의 낭독이 끝나자 나는 네 번 절을 올려 관직 제수에 감사를 표하고는 일어나 교지를 받들었다. 그러자 선전관이 입을 열었다.
“영감?”
“말씀하십시오.”
“바쁜 일이 없으시다면, 감히 소관이 영감을 보필하고자 하옵니다.”
“음…….”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일정이 생기니 한 게 없어도 벌써부터 피곤해지는지라, 며칠 쉬고 출발할까 싶었으나 선조의 똘기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전 회령판관을 지낼 때 선조가 어중간한 관직에 제수한 적이 있었다.
그때 벌여놓은 일이 많다고 마다하고는 임기가 다한 뒤에 도성으로 돌아왔었는데, 그동안 잊지도 않았는지 선조가 대놓고 따져 물은 적이 있었다.
‘여튼 미친놈 아니랄까 봐.’
제 딴에는 나한테 아쉬운 구석이 있어서인지 살짝 성격을 죽이고 있었지만, 어디 선조가 양반인가? 심기를 거슬렀다간 지랄할 게 분명했다.
“도감의 관리들에게 해둘 말이 있으니, 해가 진 뒤나 다음날에 출발하도록 합시다.”
“서두를 필요 없으십니다, 영감.”
“그럼 내일 출발합시다.”
“예.”
나는 관아 아전들에게 객사 안내를 맡기고는, 집무실로 돌아와 벌러덩 드러누웠다.
태안에서의 꿀 같은 휴식도 여기까지요, 내일부터는 지옥으로의 귀환이었다. 게다가 사신행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