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23화
43. 지푸라기 이순신 (1)
이순신의 고립.
사림의 분당.
선조에게는 어느 쪽도 포기할 수 없었다.
고립된 채 공신이 된 이순신은 무엇이든 휘두를 수 있는 검이요, 사림의 분당은 결합된 신권이 왕에게로 향하는 일을 막는 방패가 될 터이니.
두 가지 모두 절대왕권 실현의 첫걸음이라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양쪽 모두를 취하기 어렵게 됐어.’
이순신을 공신으로 띄워 고립을 유도한 건 좋지만, 분당이 직결되면서 이순신의 몸값이 도리어 올라가는 부작용만 일으켰다.
닭 떼 사이의 고고한 학 한 마리는 시기의 대상이지만, 닭이 두 패로 나뉘어 싸우는 상황이라면 학은 영입의 대상이 되니까.
그래서 선조는,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자존심까지 꺾어가며 먼저 손까지 내밀었다.
‘하지만 이순신이 정말 나의 편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구나.’
때마침 이순신이 채비를 마치고 도성을 뜨게 됐다. 아직은 출발하기 전이고, 또 대업을 맡은 처지이므로 격려를 이유로 불러들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선조는 직접 확인할 생각이었다.
과연 이순신이 자신의 편인지를.
“전하.”
밖에서 내시가 알렸다.
“무슨 일이냐?”
“공조참의 금천군 이순신 입시이옵나이다.”
“들라 하라.”
-드륵.
정문 미닫이문이 열림과 동시에, 건장한 체구의 청년이 안으로 들어섰다.
“전하.”
절제되고 공손한 몸집.
이순신은 공손히 예를 표했으나 겉보기와는 달리 애써 불쾌함을 감추고 있었다. 그에게 선조와의 면대란 어떤 이유에서건 반길 수 없는 일이었다.
“부르셨사옵니까.”
“편하게 앉게.”
“예.”
이순신은 배려에 감사를 표하고는 무릎을 꿇었다. 선조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중임을 맡았는데.”
“예.”
“어떤가?”
“하해와 같은 은혜에 부응할 생각뿐이옵니다.”
“……진심인가?”
왕이 신하에게 진심을 추궁하는 일은, 일반적이지는 않다.
진심이 어떻건 기만하자면 못할 것도 없는 데다, 왕이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느낌만 줄 수 있으니까.
냉정하게 따지자면 순 부작용뿐인 행위였다. 그러나 선조는 거리낌이 없었다.
오래된 일이지만 이미 이순신 앞에서 추태를 보인 적도 있잖은가.
그보다도 진심으로, 선조는 이순신의 진심이 궁금했다.
“진심이옵니다. 이번 사업은 천만 백성들의 삶을 크게 좌우할 터이온데, 어찌 전력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사옵니까?”
“…….”
추궁해서 얻어낸 대답이었으나 선조는 불만족스러웠다. 사실, 처음부터 답정너 수준의 추궁이었으니.
마치 궁예가 관심법을 운운하며 신하의 진심을 추궁한 것이, 그들의 진심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굴복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던 것처럼.
선조 역시 이순신이 자신 역시 남들과 다르지 않은 범인으로서 약간의 사심은 있었다는 식으로 대답해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순신이 선조의 바람에 응했더라도, 궁예의 관심법에 응한 왕건이 결국 궁예를 배신했음을 아는 선조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분명했다.
선조가 다시 물었다.
“일신의 영달은 의식하지 않는 건가, 여전히?”
“예.”
“내가 참의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영달을 생각하지 않는다니 받아들이기 힘들군.”
“황송하오나 신에게 일신의 영달은 인식이나 의식에 앞서, 고려의 대상이 된 적조차 없사옵니다.”
“사업이 끝난 후 보상을 받지 못해도 무방하단 뜻인가?”
“무방하옵니다.”
이순신의 단호한 대답에 선조는 굳게 입을 닫았다.
사실, 과거 선조가 이순신 앞에서 추태를 보였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순신은 자신이 뭐라도 된다는 듯 오만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태연자약하게 지껄이는 것은 소위 유학자를 자처하는 거짓말쟁이들의 특기 아닌가.
선조는 이순신의 진면모를 밝혀내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분노했다.
따지고 보자면 우스운 일이었다.
선조가 바라는 이상적인 신하는, 왕이 원한다면 목숨도 바치는 맹목적인 충신이었다.
이에 그나마 부합하는 존재가 이순신(의 대외적인 평판)인데, 선조는 도리어 이순신을 의심하며 견제하고 적대해왔다.
터무니없는 이중적 태도와 종잡을 수 없다는 점에서 선조는 과연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리고 이순신은 선조처럼 통제 불가능한 존재를 증오했다.
“…….”
불편한 침묵이 한참이나 이어진 뒤, 선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최근 공신들과 회합을 가졌다지?”
“그러하옵니다.”
“이미 회맹연에서 의식까지 치르지 않았나.”
“중임을 맡은 분들입니다. 군신의 의리도 중요하지만, 도감의 제조로서 실무와 보조를 맡을 분들에게 예와 감사를 표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운하 조성은 전적으로 참의가 주도한 일이고, 앞으로도 그럴 텐데.”
새삼스럽게 곁가지들을 불러서 무얼 부탁하냐는 질문이었다.
“그들이 이전에 주었던, 그리고 앞으로 줄 크고 작은 도움을 모두 배제한다면 설령 소관이라 할지라도 사업을 장담할 수는 없을 것이옵니다.”
“일단은 참의가 중심이라는 전제로군.”
“단언하여 송구하오나, 전제가 아니라 명백한 사실이옵니다.”
“보상은 바라지 않지만, 자신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며 겸양조차 드러내지 않겠다니. 조금은 아귀가 맞지 않는 듯한데.”
“신이 하는 일은 거문고와 같아서, 현이 없으면 소리를 낼 수 없고 받침이 없으면 현이 있어도 소리를 낼 수 없으므로 아름다운 음률에는 분명 모두가 공헌한 덕이지만, 현은 하나이나 받침은 대체할 수 있으니 기능하는 이의 비중과 경중을 냉정하게 판단하지 않으면 곧 대업을 그르치기 때문입니다.”
“흠.”
선조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다른 공신들과의 관계는 어떤가?”
“좋기를 바랄 뿐이옵니다.”
“너무 피상적이군.”
“신의 진심을 전하께서도 몰라보시는데, 어찌 신이라고 다른 사람들의 진심을 알겠습니까? 의리를 도모하였으나 그들이 제 역할을 다해낼지는 모르옵니다. 그러니 다만 바라는 것이옵니다.”
“그런가.”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지 못함을 책망하는 느낌도 있었으나, 선조는 별다른 감정 없이 무뚝뚝하게 답했다.
평소 같았으면 노골적인 불쾌함을 드러냈겠으나…….
내심 속으로는 만족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이순신의 불평은 차치하더라도 친 서인적인 공신들과 가시적인 관계가 없다는 점은, 그의 고립을 증명하는 것과도 같았으니까.
물론 고작 이 정도로 이순신의 고립을 확신할 수는 없다. 더 많은 검증이 필요했다.
“공신들 중에는 참의의 스승도, 빙조부(聘祖父, 장인의 아버지)도 있는데.”
“사업에 도움이 되어주고 또 가까운 사람으로서 버팀목이 되어주기는 하나, 두 사람 모두 조정의 논란거리에 개입하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사옵니다.”
선조가 눈을 빛냈다.
“참의는 근래의 논란거리가 많이 두렵나보군.”
“수백 년 역사를 뒤바꿀 사업을 망칠 수도 있다 생각하면, 근신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바람직한 마음가짐이로군.”
이순신이 운하 조성 사업에 진심이라는 것만큼은, 만성적인 의심병 환자인 선조조차도 인정할 정도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당상 대신의 몸으로 친히 현장까지 시찰하겠는가. 이후의 보고서 역시 선조 또한 입수해 일독해보았다.
차마 신하에게 얕보일 수 없어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각종 도면과 전문용어, 수식의 깊이는 선조조차 이해하지 못할 정도였다. 고작 책상물림이 마음이 동한 정도로 나올 수준이 아니었다.
그만큼 운하 사업에 사활을 건 이순신이었기에 당쟁에 조심스러운 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사업과 개혁이 정치 논리에 휘말려 좌초되는 건 일상사 아닌가.
“내가 노파심에 물어보네만, 혹시 참의가 사업에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 건 아니겠지?”
“그렇지는 않사옵니다.”
“편하게 말해도 되네. 짐작 가는 부분이 있으니.”
이순신이 아직 거취를 명확하게 하지 않았다면 주변인인 서인들은 물론이고 동인들까지 영입에 혈안일 수밖에 없다.
일등 중흥공신 제일인. 거기에 봉군까지 되었고 초대규모 사업의 제조까지 맡았다. 사업이 성공하면 또 그를 중심으로 공신 녹권이 있을 터이니, 이순신은 양당에서는 절대 놓쳐서는 안 될 존재였다.
“사소한 부분이긴 하옵니다만…….”
“괜찮아. 기탄없이 말해보게.”
“신을 끌어들이려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어, 다만 그것이 조금은 불편합니다.”
“거슬리겠군.”
“귀중한 인연을 두고 어떻게 거슬린다 할 수 있겠습니까?”
“중임을 맡은 사람을 당리에 끌어들이는 것이, 귀중한 인연을 상대로 할 만한 일은 아니겠지.”
“…….”
“제신들에게는 내가 엄포를 놓을 터이니 사업에만 집중하시게. 참의 말마따나, 운하는 나라의 수백 년 대계라 보아도 무방하니. 도움은 못 될지언정 방해는 말아야 도리거늘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군주된 도리로서 중재해야지 않겠나?”
“성은이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그래……. 바쁜 사람을 내가 오래 붙잡아두었군. 황해도에 가더라도 필요한 도움이 있다면 서찰을 보내게. 승정원에는 검토하지 말고 바로 올리라고 말해두지.”
“각골난망하옵나이다. 하면, 신 이순신.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가게.”
이순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물러났다. 그렇게 인기척이 사라지자 선조는 간만에 평온한 마음으로 어좌에 늘어졌다.
* * *
금곡포창.
본래 황해도 지역의 세곡을 경창으로 옮기는 핵심 시설이지만, 거듭된 확장공사로 이제는 석회까지 옮기게 됐다.
“영감.”
다가오는 자가 있었다. 일대 조창의 책임자인 ‘우도 수운판관’이었다. 종오품으로 낮지 않은 자리이나, 녹봉이 없는 전형적인 한직이었다.
수확철이 아님에도 격무에 시달려서인지 무척이나 피곤한 기색임에도, 얼굴에서 결의가 묻어나는 이유도 그 때문이리라.
운하 조성의 전 단계인 석회 생산 및 수급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으니까. 실수만 않는다면 출세는 예정되어 있었다.
“판관.”
“조운선들이 출항 준비를 마쳤습니다.”
수운판관의 보고대로, 금곡포창과 연결된 부두에는 여러 척의 조운선이 다음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초도 석회 생산분을 현장으로 보내기 위한 최초의 선단이었다.
“알겠습니다. 사람들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 이만 가봐야겠군요.”
“재차 드리는 말씀이라 송구하지만, 기왕이면 육로를 이용하시지요. 해상에서는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모릅니다.”
중요한 사업인 만큼 첫 선단의 출항 역시, 오랫동안 일기를 관측한 끝에 결정되었음에도 판관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능숙한 뱃사람도 장담할 수 없는 게 바다이기에.
“석회 수급은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입니다. 도감의 제조인 이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직접 경험해봐야지 않겠습니까.”
“정 그러시다면 어찌 소관이라고 부득불 말리겠습니까. 부디 별고 없으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예. 괜히 걱정만 끼쳐드리는 것 같아 송구하게 됐습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수운판관은 어찌 자신이 조정 대신의 사과를 들을 수 있겠냐는 듯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가시지요.”
“예.”
포구로 나아가니, 여러 관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행들 외에 현지 수령인 황해감사 이이와 배천군수도 있었다. 배천이 금곡포창에서 멀지 않은지라, 길안내 겸 나에게 눈도장을 찍고자 동행한 듯했다.
두 사람과 가볍게 시선을 맞추니 이이가 입을 열었다.
“참의.”
“예.”
“이제 떠나시는군.”
“그동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모두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참의가 감사할 것이 어디 있나.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나겠지.”
“…….”
“태안에 가면 언제쯤 다시 볼 수 있겠나?”
“반 년 정도는 거기에서 일해야지 않겠습니까.”
“참의는 너무 열성적이라 탈이야.”
“국가의 명운이 달린 사업이니 허투루 할 수 없을 뿐입니다.”
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신 녹권의 일로 잠시 도성에 머무를 때는, 크게 내색하지 않았으니 혼란스러웠다. 이순신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게 아닐까.
삼의정은 배제한 채 좌장이 되어 공신들과 회합을 가지고, 구설수를 만들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중신 세력에 편승하라는 권고 등은 찝찝한 뒷맛을 남겼다.
하지만 다시 이순신을 의심하지 않기로 약조하였으므로 내색할 수 없었을 뿐.
그러나 최근 몇 달 동안 황해도에서 함께 일하면서 이이는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찝찝함을 완전히 걷어낼 수 있었다.
적어도 이순신은 이 일에서만큼은 철저하게 진심이었다.
협잡 없이 성실하게 사업을 이끌어나가는 모습에, 처음에는 형을 자처했던 이이마저도 존경심이 들었을 정도였으니.
“고생하시게.”
“감사께서도요.”
이이는 갓을 살짝 숙이며 예를 표했고, 이순신은 일행과 함께 조운선에 올라탔다. 닻을 끌어올리고 노로 땅을 밀어내니 배가 점차 바다로 나아갔다.
출렁이는 조운선. 펼쳐지는 돛. 멀어지는 지평선.
이순신 역시 이이에게 갓을 살짝 숙여 예를 표하고는 선수를 바라보았다. 선단이 망망대해를 가로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