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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22화 (122/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22화

42. 삽혈동맹 (3)

“자, 자.”

대청으로 돌아오니 사람들이 시선이 모였다. 그동안 둘이서 뭘 했냐는 듯.

정인홍은 눈치가 보였는지 손을 숨기려 했지만, 선혈이 낭자했던 손바닥은 한 차례 씻었어도 핏기가 여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도대체…….”

말석에 있던 상의원 별제 이원익이 뒤늦게 발견하고는 묻자, 정인홍은 짧게 크흠, 헛기침하고 말 뿐이었다.

하지만 관심을 돌리기는커녕 도리어 시선을 사는 짓이어서, 여러 사람이 정인홍에게 추구하듯 시선을 보냈으나 답이 없자 나를 바라보았다.

“결의 과잉입니다.”

“겨, 결의…… 과잉이요?”

이원익은 무슨 결의를 했기에 자기 손까지 베나 싶었는지, 새파랗게 질려 정인홍에게서 조금 물러났다.

그리고 다들 내가 상석에 앉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지금. 일개 군수에 불과한 정인홍이 나에게 막대한 것이 불쾌했는지 그를 향한 시선이 곱지 않았다.

달리 말하자면 정인홍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셈이다. 원래 거지 같은 성격은 주변에 적을 만들기 유리한 법인데, 정인홍은 스스로 사리지도 않으니.

하지만 내부 갈등을 방관할 필요는 없는지라, 나는 손을 들며 시선을 환기했다.

“자, 자. 정 군수는 원래 남명 선생을 지극히 존경하여 행동으로 결의를 증명한 것뿐이니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들 없으십니다. 그보다는 상부터 들이는 것이 급선무 아니겠습니까?”

때마침 식모들이 주안상을 껸 채 대청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좌우에 자리한 사람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 공간을 만들자, 그제야 식모들이 대청으로 올라와 각자의 앞에 상을 내려놓았다.

자리가 마련되었고 모두가 건배를 위해 잔을 채우려 했다. 그 순간.

“첫 잔은 제가 따라드리겠습니다.”

내가 술병을 들고 일어섰다.

말석에 있던 사람들은 차마 참의 영감의 술을 앉아서 받을 수는 없었는지, 하나 둘 일어났다. 그러자 중간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일어났고, 졸지에는 대감급 중신들도 일어나서 영감에게 술을 받게 되었다.

평소라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참판 이준민, 판서 박영준, 전직 영의정 권철 등 대신들이 나와 이해관계로 단단히 묶인 상태라 다른 사람들은 대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군림할 생각은 없다.

이런 때일수록 다른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잘 대해주는 것이 리더의 역할 아니겠는가.

영수가 영수답기 전에, 당여들이 당여의 위치에 만족하고 충실할 때 비로소 영수가 영수다울 수 있는 법이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가까운 자리에 앉은 사람부터 두 손으로 공손히 술을 바치니, 받는 사람도 두 손으로 공손히 술잔을 받쳤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아 원래 자리에 앉으니 좌우 당여들도 조심스럽게 앉았다. 나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조선의 명운이 바로 우리 손안에 달려있습니다. 그럼, 제공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술자리는 빠르게 무르익었다. 일부러 취기를 유도하기 위해, 높은 도수 위주로 구비해 둔 명주들. 모두 조선에서 내로라는 것이었기에 부유한 중신들도 거부감 없이 잔을 기울였다.

그동안 나는 물을 채워놓은 술병과 진짜 술병을 상황에 따라 기울였다. 취기를 몰아내는 데는 구토가 직빵이지만, 상석에 자리한 내가 노골적으로 뒷간을 오갈 수는 없으니.

시간이 흘러 다들 대취한 상태가 되자, 나는 진즉 밝혔어야 할 당의 방침을 알렸다.

“제공들께서도 아시겠지만, 조정은 양분되어 하루도 그치지 않고 서로에 대한 공격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엮여봐야 도움이 될 건 하등 없으니, 당분간은 중신들의 편에 서서 서로를 지키는 데만 집중해주십시오.”

대취한 승지 허엽이 말을 절며 따졌다.

“주, 중신들의 편에 서겠다는 건, 대세에 편승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양당의 분쟁이 날로 겨…… 격화되는 상황인데 과연…… 올바른 일인지.”

좌의정 박순과 척을 진 허엽이다.

서인 중진들과 두터운 연을 가진 박순도 사실상 서인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 그와 척을 져놓고 한배를 타라는 것은 마치 숙이고 들어가는 형세가 되어, 허엽으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중신들 역시 이루고자 하는 바가 정의고 대의라면 편승이 아니냐는 물음에 확언을 드리기 어렵겠습니다만, 제가 승지께 물어보지요. 오늘날 중신들이 과연 대의와 정의를 위해 젊은이들과 대립하는 것입니까?”

“……다, 당연히, 아니지.”

“그렇다면 단호하게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편승이 아닙니다. 설령 행보를 같이하더라도, 목적지가 다르다면 결국에는 갈라지게 마련이니까요.”

“그, 그런가……?”

“어디까지나 불필요한 견제와 공격을 피하기 위한 처신일 뿐입니다. 대의와 정의를 쫓지 않는 중신들에게 동질감을 느낄 필요는 없어요. 이 사람이 제공들에게 당부드릴 것이 있다면, 불필요하게 인연을 만들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야 서인 뒤통수를 때릴 때 깔끔하게 때릴 수 있거든. 서인과 동화되어 끈적하게 녹아든 사람이 있으면 처치 곤란이었다.

“으, 으응…… 난 걱정하지 말게.”

더 물어보지 않고 술잔이나 기울이는 허엽이었다. 대취한 마당에 복잡한 생각이란 너무나도 귀찮고 힘이 드는 일이었으니.

‘좋아, 좋아.’

허엽에게 해준 말로 대강 그림이 그려진 사람도 있겠지만…… 차치하고서 나는 당여들에게 앞으로의 행보를 친절하게 설명해줄 생각이 없었다. 힘의 차이는 바로 정보의 불균형에서 오는 것이니.

오직 나만 배가 나아갈 방향을 알아야 타륜 역시 내가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다들 똑똑한 인간인지라 제정신인 상태에서 당의 행보와 방침을 알렸다간 장기적인 플랜에 대한 질문, 정책에 대한 의문 제기가 안 들어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비몽사몽하여 기억도 제대로 안 날 게 뻔하면서도 대취한 인간들에게 당의 방책을 밝히는 것이었다.

나중에 긴가민가해서 더 물어보고 싶을 때쯤에는 나는 이미 도성을 떠난 뒤일 테니까. 까란 대로 깔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도록.

물론 일방적인 관계가 불편해 당을 떠날 수 있지만…… 이쪽은 사림 분열의 봉합이라는 대의도 있고, 사업을 완수하면 또 공신에 녹권된다는 패도 있었다.

첫 삽도 안 뜬 마당에 공신이 되었는데 일이 끝나고서야 공신이 안 될 수가 있나.

이만하면 약점을 정말 세게 잡아놓은 셈이다.

명분도 실리도 이쪽이 동, 서인을 모두 능가하는데 누가 감히, 어떻게 당을 배반한단 말이냐?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술잔을 기울였다. 혀끝에 느껴지는 무향 무취 무미의 맹물임에도 무척이나 달게 느껴졌다.

“…….”

한참이 지나.

술이 안 들어간 지도 제법 되어, 다들 숙취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휘고하와 나이고하를 막론하고 전부 개가 되어 널브러진 상태.

칼까지 들고 설쳤던 정인홍은 아예 옆자리 을룡을 껴안고 자고 있었다. 을룡은 양반 어르신의 뜨거운 포옹에 잠은 다 잤다는 듯, 두 눈을 말똥말똥 뜬 채로 꼼짝 않고 있었지만.

“자, 자.”

그나마 맹물로 가라를 친 내가 비교적 멀쩡한 정신으로 박수를 치자, 소수의 깨있던 사람이 각자의 옆 사람을 흔들어 일으켰다. 그렇게 여기저기 좀비마냥 죽어가는 소리와 함께 하나둘 일어났다.

여전히 반개한 눈을 끔뻑이며 아래만 쳐다보는 인간이 태반이었지만.

“후식을 가져와 주겠나?”

을룡에게 부탁하자, 을룡은 이제 살았다는 듯 몸을 기댄 정인홍을 밀쳐내고 도망갔다. 그리고 정인홍이 반대편 류성룡에게 기대는 와중에…….

단잠에서 깬 권철이 이마를 쓸어내며 물었다.

“후, 후식?”

“예.”

“뭔가?”

청기와를 올리고 동판까지 두른, 휘황찬란한 저택에서 지내는 권철. 그 역시 미식에는 제법 조예가 있겠으나 나를 당할 정도는 아니다.

내가 준비한 후식은 완전히 별세계의 것이었으니까.

“마음에 드실 겁니다.”

잠시 후.

을룡이 상 하나를 가져와, 그 위에 놓여있던 접시를 사람들 앞에 하나씩 돌렸다.

이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사람들이 나름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쪽에 자리한 인삼 당절임이야 부유한 자라면 흔히 접할 수 있는 후식이지만, 반대편에 놓인 떡 비슷한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병아리처럼 샛노란 색상에 푹신푹신한 감촉. 그리고 위아래 얇게 깔린 갈색의 얇은 층. 마치 밀가루를 뿌려둔 듯 소복하게 깔린 하얀 가루.

좌우 사람들은 이게 뭐냐는 듯 젓가락으로 살살 눌러보다 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가수저라(加須底羅)라고.”

쉽게 말하면 카스테라(Castella).

재료는 단순하고, 또 품이 많이 들어간다 뿐 비슷하게 만들자면 난이도 자체는 낮은 편이다.

오히려 만드는 것보다, 주재료임에도 이 시대에서는 전량 수입인 설탕을 마련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이건……?”

권철이 잔에 담긴 새하얀 액체를 가리켰다.

“제호라고. 어렵게 마련한 겁니다.”

깔쌈한 이름과는 달리, 단순한 우유였다.

원래 제호(醍醐)란 불교에서 우유를 거듭 정제하고 숙성하여 가까스로 얻어낸 유제품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그게 뭐든 간에 카스테라랑 곁들이는 우유와는 비할 수 없겠지.

그리고 애초에 이 시대에서는 ‘우유’라는 단어를 쉽게 말할 수도 없었다.

송아지에게 돌아가야 할 우유를 사람이 취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있어서, 구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사회 통념상 거부감도 컸다.

“흠…….”

그래서일까.

권철은 수상하다는 듯 후식 그릇을 내려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처음 보는 후식에, 제호라는 말까지 나와서인지 선뜻 들지 못하고 있었다.

술기운도 거의 깬 상태.

나는 보채듯 손을 내밀어 모두에게 권했다.

“먼저 정과(正果, 당절임)부터 맛보시고, 가수저라 한 귀퉁이를 맛보신 뒤, 제호로 입가심을 하십시오. 그게 이 사람이 추천하는 순서입니다.”

“음, 그럼.”

후식의 정체에 대해 물어보았던 권철이 가장 먼저 나섰다.

그는 조용히, 품위있게 인삼정과를 맛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최상품 인삼으로 만든 정과다. 권철에게는 만족스럽지만 익숙하기도 한 맛이었다.

다음에는 가수저라.

특이한 질감의 덩어리를 젓가락으로 떼어 입으로 넣으니, 권철의 눈이 화등잔처럼 떠졌다.

“……!”

이어 잔을 기울여 우유로 목까지 축이니, 그대로 승천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허, 허억?!”

“영중추부사 대감. 맛이 어떻기에 놀라십니까?”

“내가 일흔을 살았지만 이처럼 혀의 호사를 누려본 적은 처음일세!”

권철은 대답과 함께 누가 뺏기라도 한다는 듯 서둘러 젓가락을 놀렸다. 아예 한 손에는 카스테라를 집은 젓가락에, 다른 손에는 우유를 담긴 잔을 쥐고 있을 정도. 궤장까지 받은 일흔의 노신이 보이기에는 부담스러울 정도의 천박함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어찌 권철의 잘못이란 말인가.

카스테라와 우유의 조합은 실로 악마의 후식이라 봐도 무방한 것을.

과연 몇몇 사람들은 두려움까지 섞인 표정으로 카스테라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권철이 ‘먹지 않을 것이라면 달라’고 체통 없이 욕심까지 부리니, 호기심을 못 이겨 결국 젓가락을 드는 사람이 하나둘 생겨났다. 그리고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양옆 사람의 호기심에도 불을 질렀다.

“허어…….”

“허허!”

“어떻게 이런?”

앞다투어 찬탄이 이어졌고 모두가 입가심을 끝냈다.

어디에서도 맛보지 못할 진귀한 혀의 호사! 술이 다 깬 뒤 뒤늦게 반성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한 번 당했는데 두 번은 못 당하랴?

나는 비어버린 후식 접시들을 확인하곤 좌우 당여들에게 인사했다.

“오늘 이 사람과 어울려 주시느라 노고 많으셨습니다. 모두에게 조정과 동료들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삽혈동맹, 야합.

성공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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