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21화
42. 삽혈동맹 (2)
전직 의정부터 판서, 참판에 상의원 별제와 선공감 직장까지.
평소라면 도저히 동석할 수 없는 사람들에 한 곳에 자리했다. 심지어 말석에는 해방됐다고는 하나 전직 노비인 을룡까지 자리하고 있었으니.
고위직을 지낸 중신들은 거북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이미 회맹연에서도 똑같이 자리했다. 단지 상하석의 구분만 없어졌을 뿐.
나의 지배력을 익숙함으로 포장해 모두에게 각인시킬 생각이었고, 또 그래야만 했다. 다양한 신분과 출신을 가진 이들을 엮을 방법은 오직 영수의 카리스마뿐.
명분과 이익마저도 이 상황에서는 부차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제공들.”
나는 운을 뗐다.
“일개 참의로서 왈가왈부하기에는 송구하지만. 일등 중흥공신 제일인이자, 운하조성도감의 제조로서 감히 한마디 말씀드립니다.”
모두가 시선을 집중했다.
“이 사람을 포함해 제공들이 공신에 녹권된 이유는, 충분히들 인식하고 계시겠지만, 우리들이 맡은 일이 그만큼 중하기 때문입니다.”
새삼스러운 소리.
“하지만 우리가 응해야 할 것은, 단순히 녹권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아조는 물론 전조에서도 무수히 운하를 시도했으나 인명과 인력만 낭비했을 뿐 여전히 해마다 수십 척의 조운선, 수백 명의 인부, 수천 섬의 세곡이 망실되고 있습니다. 선비로서, 어찌 이런 상황을 방관할 수 있겠습니까?”
끄덕끄덕.
“운하 조성에 힘쓴 대가로 주어질 또 다른 녹권, 지위의 상승, 부의 축적은 분명 합당한 대가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목적이 되어서만은 안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대의를 위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조정의 무수한 선비들이 선인의 투쟁을 잊고 오늘날 정치적 이익만을 위해 당쟁을 일삼는 지금, 대조선의 운명은 오직 우리들의 손에 쥐어져 있습니다…….”
실질적인 이익을 제시하되 명분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동서 양당과 거리를 벌리고 선민의식을 심는다.
운하 조성과는 궤가 다른 이야기였으나 이곳에 자리한 사람 과반은 나에게 힘을 보태기로 약조했다. 양당의 당쟁을 극복하고 조정에 평화를 가져오기로.
그러니 새삼스러운 소리는 아니겠지.
지금부터 이어질 이야기 또한.
“현실적인 차원에서도 한 말씀 드릴까 합니다. 우리가 맡은 임무는 막중합니다. 때문에 사업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공신에 녹권되었지요. 안타깝게도, 학문적 수준과 인성은 완전히 별개의 것이며. 선비의 탈을 쓴 소인배도 많지요. 앞으로 우리들 전체에게는 물론, 일부에 대해서도 무수한 협잡이 있을 겁니다.”
끄덕끄덕.
뻔한 소리였다. 주목 받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견제가 가해지기 마련이니.
“대의를 수행한다는 중임을 맡은 우리는 사명감을 가지고 소인배들의 협잡에서 서로를 지켜주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제가 말한 대의란, 단순히 운하 조성만 일컫는 게 아닙니다. 조정의 분열이 극에 달한 지금, 오직 선한 목적으로 모인 우리들이 아니라면, 감히 말씀드리건대 사림의 분열을 봉합할 수 있는 자들은 없을 것입니다.”
“…….”
“서로에 대한 배신이 무수히 이루어지는 오늘날, 대의와 선의로 모인 사람들은 여기 이곳에 자리한 사람들뿐입니다. 지난날 입술에 피를 묻히며 동맹을 약속했으니 제공들께서는 필히 마음이 변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가 소인배로 전락하여 초심을 잃게 된다면, 다음에 우리들이 묻히게 될 피는 백마의 것이 아닐 테니까요.”
나는 웃음을 흘리고는 짝, 박수를 쳐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러자 바짝 긴장하고 있던 당여들이 일순 최면에서 깨어나듯 안도로 늘어졌다.
“이 사람은 조만간 황해도로 떠납니다. 그동안 잘들 조정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대감들, 어르신들, 그리고 참상관 분들도요.”
나는 온화한 얼굴로 당여들을 차례차례 바라보며 부탁 아닌 부탁을 했다. 다들 잘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니 절로 마음이 뿌듯해졌다.
“오늘 같은 날에 술이 빠질 수는 없겠지요.”
나는 을룡에게 부탁한다는 듯 손을 내밀고는, 맞은편에서 뚱한 얼굴을 한 태안 군수를 바라보았다.
“정 공(公). 잠시 이야기 나눌 수 있겠습니까?”
“예……. 원하신다면.”
“그럼.”
주위 사람들에게 양해를 부탁하고 일어나니 정인홍도 따라왔다. 내가 찾은 곳은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저택 뒤쪽.
주안상 준비를 위해 식모들이 분주히 오가는 사이 나는 입을 열었다.
“군수께서는 영 탐탁지 않으신 듯한데요.”
“예. 참의께는 죄송하지만, 원래 임기가 끝나면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 후학이나 기를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졸지에 중임을 맡게 되었으니.”
“흐음, 이런 말씀 드리기는 죄송하지만. 낙향이 최선입니까?”
정인홍의 시선이 좁아졌다.
질문이 불쾌하다는 듯.
하기야, 자기가 이렇게 하겠다는데 남이 왈가왈부한다면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낙향이라는, 대부분의 사람은 원치 않을 선택을 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무슨 뜻입니까.”
“정 공은 혈연만 없다뿐이지, 남명 선생의 적자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정 공 역시 남명 선생을 무척이나 받들고 계시고요.”
남명 선생과의 관계를 강조하니, 언제 정색했냐는 듯 얼굴에서 힘이 풀리는 정인홍이었다.
단순한 사람이로군.
대놓고 남명 선생의 유품이라는 경의검을 차고 다니는 사람인지라, 구슬릴 방도도 역시 뻔했다.
“어째서 탐탁지 않아 하시는지 압니다. 정 공께서는 사림의 분열을 불쾌해하시고, 때마침 제가 보여드렸던 모습 역시 그런 사람의 분열에 적극적으로 관여되려는 것으로 보였겠지요.”
“잘 아시는군요.”
“명확히 짚고 넘어가자면, 오해입니다.”
믿기 어렵다는 표정. 고작 말 뿐인 부정을 어떻게 신뢰한단 말인가?
정인홍의 반응이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말을 이었다.
“나아가 군수께서도 남명 선생을 존중하신다면 이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셔야 합니다.”
“소관이 어째서요? 참의께서는 남명 선생님이 숨겨놓은 제자라도 된답니까?”
“안타깝게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남명 선생님까지 언급해가며, 제가 그 뜻에 따르지 않는다고 하시는 겁니까?”
“예.”
나의 당당한 대답에, 정인홍은 이게 무슨 뻔뻔한 만행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이 사람이라도, 선생에 대해서라면 남들이 아는 만큼은 압니다. 남명 선생께서는 출사하면 경륜을 펴야 한다고 강조하지 않으셨습니까?”
“…….”
“경의검에는 안으로는 밝히고 밖으로는 결단하라는 뜻이 있는 줄로 압니다. 남명 선생께서 정 공에게 경의겸을 맡긴 이유는, 오늘날처럼 정 공께서 결단해야 할 시기가 이름을 예지하셨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외인(外人)인 참의께서 남명 선생의 의중을 짐작한다는 것도 소관에게는 달가운 일이 아니지만, 설령 남명 선생이 그러한 뜻으로 물려주셨더라도 결단이 의미하는 바가 참의를 따르라는 뜻은 아닐 겁니다.”
여전히 거부감이 느껴지는, 단호한 목소리였다.
“글쎄요?”
“남명 선생께서 말씀하시길, 난세에는 벼슬을 하지 않으셔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지금처럼 감언이설이 있을 때 결단하여 물리치고, 낙향하여 후학이나 기름이 옳지 않을는지.”
“후학을 길러서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한평생 제자들과 함께 초야에 파묻혀 공허하게 철학이나 주고받을 생각입니까? 선비가 뜻을 품었으면 세상에 나와 천리를 펼쳐야지, 어중간하게 세속과 산림(山林) 사이에 어중간하게 발을 걸친 채 좌우에 시선을 주는 것은…….”
“말씀이 심하십니다!”
발끈하는 정인홍.
“퇴계 선생께서 언젠가 남명 선생께 처신이 어중간하다 지적한 적이 있는데, 정 공(公)께서는 도리어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 퇴계 선생이 남명 선생에게 자신의 흠결을 전가했다며 비판하는 마음이 내심 있음을 압니다.”
그래놓고 이황과 똑같이 어중간한 위치에 남을 생각이냐는 지적이었다.
정인홍 입장에서는 의외겠지. 과연 그도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들어서인지,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진 채였다.
“……!”
대학자인 퇴계 이황을 내심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
당연하지만 공공연히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면식이라곤 태안에 조사차 왔을 때 협조한 정도인 정인홍으로서는 놀랄 수밖에.
하지만 나는 조식, 정인홍과 연이 있는 공조참판 이준민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평소 정인홍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하지만 내가 상대방의 약점을 쥐고 있다는 것만 강조해서는 안 된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
스스로가 원해서 나를 따르게 만들어야 했다.
“정 공께서는 난세라 물러난다지만, 적어도 남명 선생께서는 할 말은 하고 물러나지 않았습니까?”
단성현감사직소(丹城縣監辭職疏).
줄여서 단성소(丹城疏). 또는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과거 명종이 조식을 단성 현감에 제수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조식이 관직을 거부하면서 올린 소가 바로 오늘날 단성소라 부르는 명문이었다.
조식은 단성소를 통해 조선의 폐해와 명종의 실책과 무능, 문정왕후의 개입을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자칫 왕과 왕대비를 능멸한 죄로 죽을 수 있었음에도 목숨을 걸어가며 통렬하게 비판한 조식에게는 수많은 지지자가 생겨났고, 바로 그중의 하나가 오늘날 수제자를 자처하는 정인홍이었다.
“그런데 남명 선생과는 달리 이대로 조용히 낙향하겠다는 건 도피 이상으로는 안 보입니다. 그리고 남명 선생의 수제자인 정 공이 이렇게 못난 모습을 보이면 그 폐혜가 정 공의 명성에 누를 끼치는 정도로 끝날 것 같습니까?”
“…….”
“이보세요, 정 공. 하다못해 그대가 불편해하게 생각하는 퇴계 선생의 제자마저도 이 못난 세상을 고쳐보겠다고 저와 대의를 약조한 마당입니다. 그런데 남명 선생의 수제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대의라는 명분을 코앞에 두고서도 도리어 뒷걸음질을 치겠단 말입니까?”
정인홍은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으나, 시원하게 반격해 오지는 못했다.
“남명 선생도 목숨 걸고 당시 세태를 비판했습니다. 그렇다면 정 공께서도 목숨을 걸어봐야죠. 고작 조정이 돌아가는 구석이 더럽다고 도망친단 말입니까? 언제부터 나랏일이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마는 애들 흙장난으로 전락했습니까? 지금 물러나시면, 정 공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으실지 몰라도 저나 퇴계 선생의 제자에게는 겁쟁이로 기억될 겁니다. 그리고 웃으며 얘기하겠지요. 남명 선생의 학문은 거기서 끊겼다고.”
내가 빈정대자, 정인홍이 갑자기 나를 밀쳤다.
“……?”
그리고 허리춤에 찬 경의검을 뽑아드는 게 아닌가!
미쳐서 나를 회라도 뜨는 줄 알았으나, 대신 정인홍은 왼손으로 경의검의 날을 붙잡았다. 그리고 검을 끌어내니 선혈이 뚝뚝 흘러내렸다.
‘뭐야, 이 미친 짓거리는?’
그런 생각이 드는 찰나. 어렵사리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나에게, 정인홍이 피가 흘러내리는 주먹을 내밀며 말했다.
“소관을 도발하려는 것이라면, 참의께서는 성공하셨습니다. 스승님의 존호를 모욕하셨으니, 말씀대로 소관이 목숨 걸고 칼춤 한 번 쳐도 무방하겠으나…….”
꿀꺽.
“스승님의 명성에 누를 끼치기는 싫으니 관두겠습니다.”
“이대로 도망치셔도, 남명 선생의 명성에 누를 끼치기는 매한가지인데.”
겁대가리 없이 도발을 거니, 주륵! 정인홍이 주먹에 힘을 줬는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아플 터임에도 그는 내색도 하지 않고 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나를 따르겠다는 건가.
‘미친놈, 따를 생각이라면 곱게 따르겠다고 할 것이지 그렇다고 자기 손을 베어?’
전성기 시절의 이이도 못 할 짓이었다. 하지만 불같은 성정을 보아, 사람 놀라게 만드는 재주는 차치하더라도 나중에 쓸 만한 용처가 생길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