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20화
42. 삽혈동맹 (1)
“내가 왜 난데없이 공신이 된 건가?”
당혹감과 불쾌감이 섞인 목소리였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이이.
회맹연 자리에서도 유난히 부담감을 드러냈던 사람이었다. 한 일도 없이 공신에 녹권되니 이용당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일까?
따지자면 공신 중에서 나와 태안 조사에 불려간 말단 둘, 그리고 태안 군수를 제외하면 이 일과 연관된 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기뻐했다. 이유가 없어도, 공신이 된다는 것은 마다할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차원에서 거부감을 드러내는 이이는 확실히 별종은 별종이었다. 나 역시 짐작은 했기에 이이를 부른 것이기도 했고.
“난데없이…… 라고 하시는데 전혀 난데없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식견이 짧아 잘 모르니 참의가 우둔한 나도 이해할 수 있도록 잘 설명해 보게.”
말과는 달리 어조는 마치 나를 이해시키지 않으면 등을 돌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딱딱했다.
“이번 중흥공신들은 모두가 공을 세워서 공신이 된 게 아닙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어찌 공신인데 공을 세우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전하께서도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앞으로 있을 노고를 위안하는 차원에서 공신을 녹권하셨다고요. 부끄러운 말입니다만, 공으로만 따지지만 이번에 녹훈될 수 있었던 사람은 한 손도 다 채우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자그마치 사십 명이나 되는 사람이 공신이 되었다.
“형님께서는 황해도 감사이십니다. 저는 곧 그 황해도의 금천으로 떠나 자회요(煮灰窯, 석회가마)를 대대적으로 확충해야 하고요. 운하 완성에 필요한 석회가 최소 30만 섬이고 운하의 성패는 형님이 감사로 있는 황해도의 선결 사업에 있다 봐도 무방합니다.”
“음…….”
“솔직히 말해, 저 혼자 발로 뛴 일에 사십 명이 녹권 됐는데 이게 합당하냐. 아니냐로 따지자면 형님이 아니라 제가 더 할 말이 많지 않겠습니까?”
과연 이이는 더 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꾹 닫았다. 석연찮은 구석은 감지했으나 물증도 없고 심증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더 따져봐야 억지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저는 형님께서 공신이 된 걸, 어째서 저에게 따지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건.”
내가 이이를 의도적으로 공신을 만들었다면 분명 이용하기 위해서다. 물론, 그게 사실이지만 이이가 관심법이라도 쓰지 않고서야 내 진의를 어찌 알겠는가?
어디까지나 석연찮은 구석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그런데 고작 의심만으로 오랫동안 호형호제한 상대방에게 ‘나를 이용하려는 게 아니냐!’는 식으로 반응한다?
의리와 도의를 강조하는 유교식 사회관에서는 배신도 용납받지 못하지만, 함부로 상대방의 배신을 의심하는 것도 용납받지 못할 행동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공을 세운 사람이건, 공을 세울 사람이건 합심하여 사업을 성공시키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공신으로 삼아준 나라에 대한 의리겠지요.”
“…….”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형님께서 먼저 불만을 드러내시니, 저로서는 솔직히 말해 서럽습니다.”
“아…….”
“아시겠지만 근래에 들어 조정이 분리됐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지인과 등을 돌리게 되었지요. 저 역시, 저에게 등을 돌린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비극을 최대한 봉합하고 두 무리를 화해시키고자 결심했을 때, 형님께서는 제 뜻에 동참하겠다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벌써 마음이 바뀌신 겁니까?”
아픈 구석을 계속해서 쑤셔대자, 결국 이이도 견딜 수 없었는지 다급히 손과 머리를 저었다.
“아닐세, 아니야. 내가……, 외방에 나가 격무에 시달리다 보니 잠깐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네. 내가 어찌 제정신으로 동생에게 안 좋은 생각을 품겠나.”
“…….”
“진심일세. 내 다시는 같은 실수를 벌이지 않을 터이니 용서해주게.”
“갈수록 나랏일에만 힘쓰기 어려워질 겁니다. 조정에 부는 삭풍도 점점 더 모질게 될 테지요. 이런 상황에서는 몸의 안정보다도 마음의 버팀목이 더 절실해지는 법입니다.”
“알지…….”
“다른 사람도 아닌 형님이라면, 부디 끝까지 제 편으로 남아주셨으면 합니다.”
“……약조하겠네.”
나는 그제야 안도한 얼굴로 이이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어디까지나 말뿐인 약조이지만 이 시대에서 사나이의 말은 천 근 금과 같았다.
과언이 아니라, 정말로 자치통감에 장부일언허인(丈夫一言許人) 천금불역(千金不易)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이가 뒤늦게 태도를 바꾼다면 그것대로 또 아픈 구석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셈이다.
‘이외로 순진한 사람이야.’
내가 이이를 부른 이유는, 고작 흔들리는 그의 마음을 다잡기 위함만이 아니었다. 때가 됐는지 누군가 대문을 두드렸다.
“이제야 하나 둘 오려나 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이만 조금 일찍 부른 것이지만. 나는 의사를 물어보는 을룡에게 고개를 끄덕여 대문을 열게 했다.
그동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을 맞을 준비를 했다.
“아, 손녀사위!”
권철이었다.
전직 영의정인 그는, 관직을 내려놓은 뒤로 한동안 존재감 없이 살았으나 최근 이등공신이 되어 부쩍 살맛이 난 듯했다.
“강녕히 지내셨습니까.”
“덕분에 강녕히 지냈네.”
“어째, 십 년은 젊어지셨습니다.”
“그래?”
권철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는 나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이번에 내가 영중추부사에 제수된다는군.”
달리 말하면 중추부 영사. 정일품 관직이다.
비록 국초 이래 중추부는 끊임없이 실권을 빼앗겨 오늘날에는 늙은이 격리소나 다름없었으나, 일단 관직을 얻었다는 점이 중요했다.
지금 좌의정과 우의정인 이탁, 박순도 전직 의정이었다가 다시 지내고 있으니까.
권철 역시 공석이 생기면 다시 의정에 오를 수도 있었다.
“경하드립니다.”
“필요한 일 있으면 말하게. 썩어도 준치이니.”
“더 날아오르실 겁니다.”
“그래야지.”
권철은 나를 껴안고 등판을 툭툭 두드린 다음 물러났다.
“자리는?”
“선착순입니다.”
“다른 손님이 와서 상석을 빼앗기 전에 가서 차지해야겠군.”
때마침 열린 대문 너머로 공조판서 박영준이 들어왔다. 그는 과거 권철과는 나를 두고 서로 영입하고자 싸우던 관계였으나, 같은 배를 탄 입장이 되어서인지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공판.”
“대감…… 손녀사위를 잘 두셨습니다. 이 사람이 먼저 낚아챘어야 하는데.”
“참의만 한 사람을 날로 먹을 수야 있나. 이미 내 사람이니, 후회해도 늦으셨소이다.”
“하하하. 어디 연 만들 구석이 정실 자리 하나 뿐이랍니까?”
박영준은 나에게 다가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잘 지냈나?”
“물론입니다.”
“공신이 되니……, 기분이 묘하군. 엄청 대단한 일이 벌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단 말이지.”
“의정 자리에 한층 가까워지셨는데, 그건 대단한 일이 아니립니까?”
“예로부터 용의 꼬리가 되느니 닭의 머리가 되라고 했는데 이제와서 의정 자리에 오르면 무슨 소용인가?”
“하하하…….”
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처음 그를 영입했을 때, 박영준은 나와 동등한 위치에 서고자 했다.
어떻게 이조판서까지 오른 자신이 고작 정삼품 참의에게 머리를 숙일 수 있겠는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후원자 입장이기까지 했는데.
하지만 오늘로 완전히 입장을 인식한 것처럼 보였다.
“용의 어깨 자리는 비어 있습니다. 닭대가리보다야 그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참의 말이 맞네.”
“안으로 듭시지요. 선착순이라, 그새 손님이 들어와 상석을 차지해 버리면 면이 안 섭니다.”
“빨리 자리해야겠군.”
박영준을 보내니 기다렸다는 듯 다음 손님이 들어왔다. 혹시, 담장 너머 일렬종대라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참의.”
“대감.”
이번에는 노수신이었다.
“보아하니 공신들이 모이는 것 같던데. 내가 이런 자리에 껴도 되는지 모르겠군.”
“대감께서는 공신이 아니십니까?”
“글쎼……. 내가 공신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지는 못하겠군.”
“대감께서는 저를 이끌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림의 어른이시고요. 어느 면으로 보나, 공신이 되실 자격은 충분합니다.”
노수신과 유희춘의 영입은 공신으로 만들기 전에 이루어졌다.
두 노신은 을사사화의 피해자로 오랫동안 유배당해 있다가 선조 즉위와 함께 돌아온 경우로, 전 영의정 이준경과 마찬가지로 당쟁을 극히 우려하였으나 대세를 거스를 힘은 없었다.
선조의 편애로 높은 관직은 착실히 밟아갔으나 그 대가로 주변에 힘이 되어줄 사람이 적었기 때문. 적을 이리저리 옮기다보니 같은 편을 만들 수가 없었던 거다.
‘을사사화 희생자들을 트로피 삼으려는 선조가 의도한 바이기도 하겠지만.’
그런 그들에게 당쟁의 격화를 억제하고 사림의 분열을 봉합하자는 나의 제안은 마음을 흔들고도 남았다.
결과적으로 노수신과 유희춘은 나의 대의를 지지하기로 했다. 그동안 선조에게 가장 큰 정당성을 안겨주었던 을사사화 희생자들이 나를 지지하게 된 것이다.
‘내가 당장 선조와 대치하지 않는다는 것도 주효했지만, 애초에 선조가 을사사화 희생자들을 가지고 놀았으니.’
놈은 그게 맹점이었다.
사람을 가지고 놀아도……, 상대가 도리어 원하게 만들어야지. 기술도 없이 지위만 믿고서 폭거를 저지르니 상대방을 움직일 수는 있어도 따르게 하지는 못하는 거다.
“대감, 듭시지요.”
“그래.”
노수신에 이어 유희춘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다음은 스승인 김성일이었다.
“허어…….”
김성일은 전직 의정, 판사, 감사가 켜켜이 자리한 안쪽을 보더니 질린 듯 탄식을 흘렸다.
“내가 잘못 찾아온 건 아니겠지?”
“아니에요. 잘 찾아오셨습니다.”
“이제 참하관 티를 벗어낸 나를 대감, 영감들과 한데 모아놓겠다고?”
“대신 제 스승님 아닙니까.”
“제길, 그럼 자네가 빠지면 나는 뭐가 되는 건가?”
“하하하. 뻔한 질문을 다 하십니다. 사간원 정언이지요.”
정육품 관직. 아무리 삼사 중 하나인 사간원의 관직이라지만, 당상대신들 앞에서는 한없이 쭈구리가 될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난생처음으로 둔 제자가 스승을 잡아먹을 놈일 줄이야…….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자네 춘부장의 부탁은 단숨에 거절했을 걸세.”
“아들로서는 공신이 되는 게 아버지에게는 최고의 효도요, 제자로서도 공신이 되는 게 스승께는 최고의 예우지요. 그 이상이 있다면, 스승까지 공신으로 만드는 것일까요.”
내가 빙긋 웃자 김성일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 자네 똥 굵네. 어디에 자리하면 되나?”
“편하신데 앉으십시오. 선착순입니다.”
“적어도 참판과 우승지 영감도 오실 텐데?”
삼의정이 낄 자리는 아님을 아는군. 나는 웃으며 말했다.
“격식 차리는 자리 아닙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영수인 내 앞에서는 관직이 뭐건 품계가 뭐건 다 똑같은 당여임을 알리기 위함이지만.
금천 다음에는 태안에서도 몇 달은 일해야 할 텐데 그전에 피아구분과 상하구분은 시켜놔야지 않겠는가?
대략적인 지시도 내려놓고.
“흠……. 그럼 제자만 믿고 편한데 자리하겠네.”
“예.”
나는 안쪽으로 팔을 뻗으며 김성일을 배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