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19화
41. 군신유의 (2)
경복궁, 늦은 밤.
사방에는 석등과 위사들을 둘러놓고, 구름 한 점 없는 달밤의 은하수는 연못의 파문마다 일렁였다. 그 가운데 경회루에서는 좌등을 켜켜이 깔아둔 채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계단에 이르자 입구를 지키는 내시가 외쳤다.
“위국민사진충중흥공신 제일인, 금천군 이순신 납시오!”
오늘은 공신회맹제가 있는 날이었다.
정작 사업인 운하 조성은 아직 첫 삽도 뜨지 않은 상태였으나, 졸지에 나는 나라를 위하고 (위국) 사직을 보전하였으며 (민사) 충성에 애쓰고 (진충) 나라를 다시 일으킨 (중흥) 공신이 되어 있었다.
역대급 설레발이 아닐 수 없었다.
뭐, 운하를 최대한 띄우려는 선조의 수작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겸사겸사 믿을 수 있는 지지층을 확보할 의도도 있었겠지.
선조에 의해 녹권된 공신들은, 선조의 존재로 인해 공신의 정당성이 생기니. 사실상 같은 배를 탄 신세라 힘을 합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잔대가리는…….’
계단 끝에서 경회루 이층에 다다르자, 나와 함께 공신에 녹권 된 자들이 일어나서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삼의정을 제외하면 대체로 나의 사람들이다.
선조는 자신이 믿고 쓸 수 있는 장기말을 원했겠지만, 이들은 공신으로 만든 건 왕이 아니라 나다. 그리고 그들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금천군.”
이등공신 공조판서 박영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모두에게 인사를 올렸다.
일방적으로 은혜를 입어 공신이 된 자들이 태반이라, 은근히 부담스러워 하는 자도 많았으나 반대로 희희낙락 반기는 자도 많았다.
특히 전 영의정 권철.
그는 손녀사위를 잘 둔 덕으로 집에서 시간이나 까먹다 돌연 이등공신이 되었다.
정계 복귀를 간절히 원하던 권철에게는 내가 단순히 ‘손녀사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손녀사위님’이나 다름없겠지.
“안으로 들게.”
마지막으로 입을 연 사람은 영의정 홍섬이었다. 나와 같은 일등공신이었고, 나 다음으로 녹권에 이름이 올라간 제이인이었다.
그는 왕의 바로 왼편 자리에서, 맞은편을 향해 팔을 뻗고 있었다.
No. 2의 자리.
일반적인 상황에서 일개 참의가 영의정보다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없으나, 오늘의 행사는 공신회맹제다. 이 순간만큼은 제일인인 내가 제이인인 홍섬보다 높았다.
“염치불고하고.”
나는 공신 사이를 저벅저벅 가로질러 No. 2의 자리에 착석했다. 그러고 다른 공신들과 인사를 나누니 바깥의 내시가 외쳤다.
“주상전하 납시오!”
주인공의 등장은 늦는 법. 모든 공신이 도착하고서 인사를 나눈 다음에야 태평하게 나타나는 선조였다.
그는 휘황찬란하게 늘어진 곤룡포와 금으로 장식된 옥대를 차고 나타났다. 오늘을 위해서 준비했다는 듯, 평소보다 때깔이 좋아 보였다.
“전하.”
나는 여러 공신과 함께 일어나 왕에게 예를 표했다.
선조는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받아주고는 상석에 자리했다. 방석 하나 깔렸을 뿐인 공신들의 자리와는 달리, 받침대가 깔려 공신들이 바라보려면 살짝 고개를 들어야 하는 자리였다.
곧 죽어도 왕인 인간이 신하와 같은 높이인 자리에서 궁둥이 깔고 앉을 수는 없다는 거다.
“앉으라.”
선조가 자리하고 착석을 윤허하자, 공신들 역시 자리에 앉았다.
모두의 시선이 선조를 향할 동안 선조는 구석에 자리한 내시에게 시선을 보냈다. 이에 내시가 밖을 향해 무어라 중얼거리니 바깥에 자리한 악공들이 착, 하는 집박(執拍, 음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신호)과 함께 연주를 시작했다.
즐겨야 할 것은 귀만 아니라는 듯 궁인들이 상을 하나씩 껴안은 채 계단을 올라왔다. 가장 상석에서부터 하석까지 힘 빡 들어간 주안상이 하나씩 놓였다.
자리가 완성되자 선조가 병을 들며 말했다.
“일단 잔들 채우지.”
어명에 나를 포함한 공신들은 각자의 잔을 채웠다. 그리고 맞추기라도 한 듯 양손으로 잔을 포개 들었다.
선조 역시 비록 한 손이었으나 잔을 높이 든 채였다. 그는 제신들을 둘러보고는 선포하듯 고개를 들고서 말했다.
“내가 왕에 오른 뒤로, 이렇다 할 공을 세우지 못해 명종대왕에게 죄스러운 마음이 한순간도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 그대 제신들이 각고하여 마침내 나라를 중흥시킬 방책을 내니,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그대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앞으로 있을 격무를 위안하고자 중흥공신으로 삼으니, 그대들은 군신의 예를 다시 한번 맹세하고 음복으로 새기되 이 자리를 빠짐없이 즐기라.”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들라.”
나는 허리를 꾸벅 숙인 뒤, 고개를 돌리고 잔을 기울였다.
자리의 격식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상등품. 은은한 단맛과 함께 약재 특유의 독특한 냄새가 입안을 채웠다.
그리고 상에 놓인 고기 산적을 안주로 삼으니 그런대로 혀가 즐거웠다.
각자 두어 점씩 안주를 맛보았을 즈음 곁의 어좌에 자리한 선조가 입을 열었다.
이쪽을 향해서.
“참의.”
“전하.”
“자리는 어떤가. 마음에 드나?”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예전에는 나와 그대 사이가 선인들의 말씀인 군신유의(君臣有義)에 충실하지 않았을 수는 있으나, 이제는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지.”
“그러하옵니다.”
“부디 옛일은 잊고서 나의 윤길보와 등우가 되어달라.”
윤길보는 주나라 선왕을 도와 나라의 ‘중흥’을 도왔던 자였으며, 등우 역시 한나라 광무제를 도와 나라의 ‘중흥’을 도운 자다.
꼴에, 내가 중흥공신이라고 펀치라인 비슷하게 중원의 옛 중흥공신들을 언급한 것이다.
‘이렇게 영입을 시도하나.’
선조가 나를 공신으로 만든 이유는 자신의 치적이 될 운하를 띄우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를 군계일학으로 만들어 정계 인사들에게서 분리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동서 분당은 선조가 염원해오던 일이겠으나 자칫 내가 한쪽 당파에 영입되어 중진으로 성장할 수도 있는 상황.
나를 고립시키려던 선조로서는 서둘러 나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
부담스럽지만, 나에게는 희소식이다.
왜냐?
‘여기 있는 인간 태반이 이미 나의 편임은 전혀 인지하지 못했구나.’
이 따위 영입 시도가 의미하는 바는 오직 그것뿐이다. 나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서인과 동인들처럼 왕 역시 모르고 있다.
원래 비수란 숨겨져 있을 때가 가장 치명적인 법.
나는 웃으며 선조에게 답했다.
“전하, 본래 신하와 인군은 휴척(休戚, 평안과 근심)을 같이 하는 법이옵니다. 과거의 일을 상고하자면 오히려 전하께서는 소신을 믿어주셨기에 거리낌 없이 대해주셨던 것인데, 어찌 신하된 자로서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사옵니까.”
“그리 생각해준다니 실로 기쁘다. 참의가 사직을 표하였을 때는 과인이 부덕한 탓으로 알았는데, 그렇다면 당시에는 어찌하여 관직을 내려놓기로 하였는가?”
“나이도 학문도 부족한 사람이 사소한 공을 세워 분수에 맞지 않은 자리에 올랐사옵니다. 이러한 마당에 대과에서 과분한 성적을 거두기까지 했으니, 어찌 스스로 두려워하고 염려하여 근신하지 않을 수 있겠사옵니까?”
“참의와 같은 사람이 어찌 소인들을 두려워한단 말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바로 소인이기 때문이옵니다.”
예를 들자면, 선조라던가.
“참의는 전장에서도 거친 야인을 이끌고 적을 격파한 경력이 있어, 담대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면모로다.”
“…….”
“유능한 관리가 소인배들의 질시로 일하지 못하게 된다면, 어찌 군주 된 자로서 당당할 수 있겠는가?”
보호자라도 자처하겠다는 건가. 하기야, 그것처럼 확실하게 상대방에게 빚을 지우는 방법도 없다. 때마침 명분도 있고.
선조가 보채듯 말했다.
“당장 필요한 도움은 없나?”
“아직은 없사옵니다.”
“큰 사업을 맡아 다방면으로 노고가 많아질 터다. 내가 왕으로서 당당할 수 있도록, 필요할 때는 거리낌 없이 도움을 청하도록 하라.”
적당히 마무리를 짓는 선조. 여기는 나와 왕만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슬쩍슬쩍 나와 선조 사이의 대화를 의식하는 시선이 한둘이 아니었다.
“망극하옵니다.”
내가 예를 표하자 선조도 더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구경할 거리도 없어져서인가. 주변은 다시 각자의 무리가 나누는 잡담으로 시끄러워졌다. 선조는 왼편으로 시선을 돌려 홍섬과 말을 나누었다.
나는 조용히 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술자리가 막바지에 흐르고, 각자 상에 놓인 안주도 밤바람에 싸늘하게 식었다. 선조는 물론 주변 공신들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올라와 있었지만, 자제를 해서인지 쓰러지는 사람은 없었다.
행사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으니까.
때마침 내시 하나가 어좌 곁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회맹의 제단이 마련되었사옵니다.”
“알았다.”
선조는 딱딱하지만 조용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리고 내시가 물러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만하면 제신들에게도 충분히 위안이 되었겠지?”
왕이 일어났는데 신하가 멀뚱히 앉아서 구경할 수만은 없는 법. 모두들 부산하게 일어나 왕에게로 시선을 집중했다.
그 가운데에서 선조가 말을 이었다.
“마침 회맹의 제단이 준비되었다 하므로, 제신들은 나와 함께 의식을 치르도록 하자. 내가 먼저 내려갈 터이니 취기에 실수하는 일 없도록 서두르지 말고 차례차례 내려오도록.”
“예.”
선조가 먼저 공신들 사이를 가로질러 계단으로 사라지니, 다음 타자인 나는 뜨거워진 뺨을 때려 취기를 쫓아내고는 술상을 넘었다.
계단을 내려오니 멀지 않은 곳에 커다란 대접과 함께 제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또 어둠 속에서 빛나는 눈동자가 한 쌍 있었다.
‘의식용 제물인가…….’
잘 길러진 백마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추호도 모른 채, 땡그란 눈을 하고서 나를 바라보았다. 별로 흥미가 가는 인간상은 아니었는지, 백마는 푸릉 콧바람을 내쉬고는 고개를 돌렸다.
뒤이어 차례차례 공신들이 내려와 대접 좌우로 대오를 갖추자 선조가 제신(祭臣)에게 시선을 보냈다. 이에 제신이 대접을 공손히 받들고 백마에게 나아가니, 곧 히히힝, 하는 말의 단말마가 야밤의 공기를 울렸다.
잠시 뒤.
제신은 거무죽죽한 피가 흥건히 담긴 대접을 가지고 돌아와 원래 자리에 놓았다. 그리고 제물의 간과 털을 뽑아 화로에 불사지르니, 선조가 손을 모으고서 입을 열었다.
“조선국왕 연(昖, 선조)는 중흥공신을 거느리고 감히 황천의 상제와 종묘, 사직과 산천의 여러 신령들에게 고합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나라에서 군신과 붕우를 가지는 것은 가정에서 부자(父子)와 형제를 가지는 것과 같으니, 마땅히 신의와 성실로 마음을 굳게 맺어서…….”
선조의 맹세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가만히 지켜보니, 의외로 왕 노릇이라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몇 분짜리 맹세를 한 치의 틀림도 없이 외워야 하니까.
“……우리의 자손에게 이르기까지 대대로 이 맹약을 지킬 것이니, 혹시 변함이 있으면 신(神)은 반드시 벌하소서. 천지신명이 밝게 포열하여 있으니, 각기 맹세를 공경하여 힘쓰고,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맹세를 다한 선조는 왕으로서 먼저 백마의 피를 담은 대접을 입에 기울였다. 그리고 대접을 물리니, 입에는 붉은 선혈이 낭자하게 흐르고 있었다.
‘다음 차례는 나인가.’
일등공신 제일인. 당연하게도 제신(祭臣)은 대접은 나의 앞으로 가져왔다.
나는 은근히 내미는 대접을 공손히 받아 입으로 기울였다. 그리자 확, 하고 입안을 때리는 비릿한 생피의 맛.
술기운이 확 달아날 정도로 역겨웠으나 나는 몇 모금이고 피를 들이켰다. 그리고 대접을 내려놓으니 종전에 대야에 담긴 피는 반절은 사라진 뒤였고 입에는 피는 묻다 못해 줄줄 흐를 정도였다.
조커도 나를 본다면 형님으로 모실 정도!
의식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선조는 놀라워하며 물었다.
“내 참의가 혼자서 피를 다 마시는 줄 알았다.”
“신령의 앞에서 인군과 공신의 의리가 자자손손 이어가기를 맹세하는 의식이 아니옵니까? 신은 오늘날의 회맹이 영구불변하기를 바랐을 뿐이옵니다.”
“하하, 그럼 나도 피를 더 마셔야겠군.”
선조가 농담조로 말했으나 왕의 말은 천근과도 같은 법. 한 바퀴 돌았던 대접은, 나를 의식한 공신들 때문에 이미 바닥을 드러냈으나 선조는 얼마 남지 않은 피를 마저 마셨다.
그리고 제단에 올린 울창주(鬱鬯酒)를 음복하여 의식을 끝맺으니, 부산스러워진 분위기 속에서 공신들은 하나둘 왕에게 예를 올리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일등공신 제일인인 나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가 선조에게 깊게 허리를 숙이고는 물러났다.
그리고 경회루의 불빛이 아득하게 멀어질 즈음, 나는 사모를 벗고 밤바람을 쐬었다.
‘이 세상에 신령이 어디 있나?’
있었다면 태조 이성계부터 벼락을 맞아 죽었을 거다. 그 인간도 공양왕에게 중흥공신으로 녹권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