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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18화 (118/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18화

41. 군신유의 (1)

“다음 식년시에 볼 예정입니다.”

이순신이 말했다.

그러니까, 이쪽 이순신 말고 저쪽 이순신.

“다음 식년시라면…….”

“병자년(丙子年)입니다.”

신립이 끼어들어 답했다. 이순신이 원래 무과 급제를 시도했던 때보다 빠른 건가?

내가 뭘 알아야 말이지.

그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과연 이순신은 병자년에 무과를 급제할 수준이 되냐는 것. 신립을 붙여준 지 몇 년 지났으니 이제는 이순신도 자신의 몫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예에 진전은 있습니까?”

내가 묻자 이순신은 진지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신 도사만큼은 아니겠으나, 감히 장담하건대 병자년 무과에는 반드시 급제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 정도입니까?”

“예. 사실, 지난 식년시에도 무과를 치러 충분히 급제할 자신이 있었으나 신 도사께서 보다 확실한 결과를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권하셔서 말았습니다.”

자신이 있다면 그편이 차라리 낫다.

무과 역시 문과와 마찬가지로 급제자들이 등수에 따라 갑과, 을과, 병과로 나눠지고 각 항목에 따라 주어지는 품계가 달라졌다.

갑과는 종칠품, 병과는 종팔품, 을과는 종구품인 식이다.

단지 문과와 차이가 있다면 일등은 있으되 장원은 없다는 정도일까. 무과에서는 일단 갑과에만 든다면 등수에 따른 우대는 없다. 자랑거리는 되겠지만.

“어려운 결정을 하셨군요.”

“다음에는 보다 높은 등급으로 급제할 자신이 있으니, 어려운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보다 높은 등급으로 급제해야 영감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하하, 부담드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만…….”

“소인이 스스로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기 싫었을 뿐이니, 개의치 마십시오.”

나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만큼 자신이 있는 걸 보면, 확실하게 실력이 일취월장한 게 분명했다.

하기야 붙여놓은 인간이 표적의 점에 맞추지 않고서는 관중으로 치지도 않는다는 신립이니. 이런 스승을 곁에 뒀으면 제자 역시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원탑 지장이 무력까지 갖추는 건가?’

천재인데 무력까지 뛰어나다니, 지금의 이순신이 한 백 년 전에만 태어났어도 먼치킨 무장이 되었겠지만 이 시대에서는 슬슬 전장에서 화살이 아닌 총알이 날아다닐 때라.

약간 빛을 바래 아쉬운 감이 있었다. 그래도 같은 값이라면 다홍치마라고 몸치 이순신보다야 몸짱 이순신이 나았다.

“좋아요. 그럼 이 공(公)의 자신감만 믿고 기대하겠습니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이순신의 호언장담이 있었고, 나는 노파심 차원에서 덧붙였다.

“무과 급제도 중요하지만, 이후에는 무예보다도 더 신경 쓰셔야 할 구석이 있습니다.”

“예. 잊지 않고 있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신립이 고개를 까닥였다. 그에게는 처음 듣는 이야기겠군. 나는 신립에게 말했다.

“앞으로 전장의 흐름이 어떻게 변할지, 신 공(公)께서는 짐작이 가십니까?”

“어…….”

신립은 느닷없는 질문에 놀란 듯 어벙한 소리를 흘리더니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실전은 겪어본 적도 몇 번 없고. 단지 최선을 다해 싸울 뿐이지요.”

“무관다운 대답이군요.”

“……대답을 잘 했다는 뜻입니까?”

“하하하. 무관답게 답을 했다는 뜻입니다.”

최선을 다해 싸운다. 무관으로서는 최적의 대답이다. 장수는 명이 떨어지면 그저 싸울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최선인 수준은 부대 지휘관까지다.

그 이상은, 그 이상을 봐야 한다.

“……?”

나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얼굴을 한 신립을 뒤로 하고 이순신에게 일렀다.

“몇 년 뒤에는 사제 관계가 바뀌겠군요. 그때는 이 공(公)께서는 신 공(公)을 늙은 아버지 모시듯 잘 챙겨주어야 합니다.”

“예.”

그리고 여전히 멍청한 얼굴을 짓는 신립.

“……?”

나는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신 공(公)께서도 아시겠지만, 운하 조성은 엄청난 규모의 공사가 될 겁니다. 동원되는 사람만 해도 만 명은 넘을 테고요.”

전국팔도의 땡중 칠천에 태안의 백성 삼천. 그리고 공사가 본격화되면 탄력을 위한 증원까지 계획이 잡혀 있었다.

그리고 이만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으면 어떻게든 분란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태안군에 소속된 한 줌 병력으로는 만 단위 인력을 전부 통제할 수 없었다.

“운하조성도감에서 조만간 오위도총부에 병사들을 요청할 예정이에요. 신 공께서는 이제 도사에 오르셨으니 충분히 현장 담당을 맡으실 수 있으실 것 같은데, 괜찮다면 맡아주시겠습니까?”

“당연히 응해야지요. 소관이 영감께 진 빚이 어디 한둘입니까.”

“흠, 저는 신 공께서 저를 위해 움직여주신다면, 저는 개의치도 않는 마음의 빚 때문만이 아니라 각별한 사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아.”

“빚을 더신 다음 이 사람은 아는 척도 안 해주시려는 건 아니지요?”

짓궂은 표정을 하며 은근히 물어보자 신립이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영감 말씀이 옳습니다. 소관과 영감이 또 어떤 사이인데…….”

“농이에요. 농.”

“쩝. 영감께서는 어르신답지 않게 사람 놀리시는 걸 좋아하십니다.”

“하하하. 연배가 연배라. 아직은 장난이 좋을 나이입니다.”

나는 밖을 향해 일렀다.

“주안상 셋 부탁하네.”

그리고 신립과 이순신을 향해 말했다.

“사람이 셋이 간만에 모였으면 술을 마셔야지요.”

“항상 대접만 받아 죄송합니다.”

신립이 송구스럽다는 듯 말했다.

“이건 이 사람이 황해도 금천에서 무사 귀환하기를 기원하는 대가입니다. 공짜 술 아니에요.”

“황해도 금천이요? 태안이 아니라요?”

“석회 수급 때문에 금천을 먼저 들러야 합니다. 조달해야 하는 석회가 최소 30만 섬이나 되는데, 무작정 태안에 삽부터 뜰 수는 없죠.”

“아, 거기서 석회가 많이 나는가 보군요.”

“전국의 석회 중에서 삼분지 일은 그쪽에서 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른 삼분지 일은 황해도고요.”

이미 노천 광산과 자회요(煮灰窯, 석회가마)가 곳곳에 있어, 금천에서 할 일이라곤 확장공사가 전부다.

생산량을 확충하면 조운선이 황해도의 금곡포창에서 실어 태안 북쪽에 설치될 임시 창고에 하역될 예정.

그리고 갓 만들어진 신선한 석회를 운하 건설에 투입하는 거다. 산지직송이지.

“노고가 많으십니다.”

“나랏일 하는데 나만 고생하는 것도 아니고……. 선심 쓸 생각이라면 위안을 주지 말고, 오늘 하루 즐기는데 전력을 다합시다. 그게 이 사람에게는 진짜 위안이니.”

“예. 전력을 다해 응하겠습니다.”

“소인도.”

신립과 이순신이 웃으며 답했다.

* * *

공신들은 나중에 회맹연(會盟宴)과 뒤풀이 때 만날 수 있으니,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여유를 보다 알차게 보내기로 했다.

“오!”

그 누구보다도 나를 따뜻하게 반겨주는 목소리.

“아버지.”

“우리 참의 영감께서 친히 찾아오실 줄이야.”

“민망합니다, 아버지.”

“하하하. 너는 장차 나를 대신해 대를 이어갈 아들인데 내가 농 삼아서 후대 한 번 못 해주겠느냐.”

“형님들도 계신걸요.”

“에라이!”

형님 소리가 나오자 손부터 저어버리는 아버지였다.

“네 위로 넷이나 있는데 어찌 한 녀석이라도 형이 되어 막내의 반도 못하는 건지. 이 아비가 네 덕에 웃고 형들 때문에 우는구나.”

“다들 저보다 더 크게 되시려고 그러나 봅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에 그럴 조짐이라도 볼 수 있으면 여한이 없겠구나.”

이 시대의 아버지라면 모두가 선망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인손(李仁孫). 아들 다섯 형제가 모두 공신이 되고 의정부 대신까지 지내어, 당대의 광주 이씨를 최고 명문가로 만든 당사자였다.

그러나 모두가 이인손처럼 될 수는 없었다. 다섯 아들 중 한 사람이라도 관리가 되기는커녕, 모두가 한량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으니까.

그럼에도 아버지은 제법 오랫동안 이인손을 선망하셨던 게 틀림없었다. 때마침 아들도 딱 다섯이겠다, 막내도 어린 나이에 관문에 올라섰겠다.

위의 형들도 차례차례 막내를 뒤따라 번듯하게 관복을 걸치기를 기대하셨겠지만…….

이제는 회의적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아버지의 모습에 나는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어머니께도 인사드리고 오겠습니다.”

“그래. 사랑방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예.”

나는 꾸벅 인사를 올린 뒤 안채를 찾았다. 사방은 조용했다. 혹시라도 주무시나 싶었지만 밖에서 인사를 올리자 부드러운 화답이 있었다.

“순신이니?”

“예.”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도 없이, 먼저 방문을 열고 나를 맞아주는 어머니였다.

어머니께서는 마치 죽다 살아온 사람이라도 보듯 깜짝 놀란 표정으로 손을 뻗어 나의 뺨을 만졌다. 거친 촉감.

“그간 강녕히 지내셨습니까.”

“이 어미야 네 덕분에 항상 즐겁게 지낸단다.”

“진즉에 찾아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송구합니다.”

“대신 지금에라도 이렇게 찾아오지 않았니.”

“…….”

나는 여전히 뺨을 놓지 않는 어머니의 손을 포개 쥐었다.

“아버지께 인사드리러 가야겠어요.”

“그러려무나. 오늘 바로 돌아갈 거니?”

“한숨 자고 가겠습니다.”

“그래. 간만에 돌아온 김에 밥도 먹고, 예전에 지내던 별방에서도 한 숨 자고 가렴. 네 형들도 다 독립해서 많이 쓸쓸하구나.”

“……앞으로 좀 더 자주 찾아뵐게요.”

나는 천천히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어머니께서 별방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확인한 뒤 발을 돌렸다.

사랑방으로 들어오니 아버지께서 약간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네 어머니는 어떻더냐?”

“기뻐하셨습니다.”

“그래. 다행이구나.”

막 만났을 때 너무 기뻐한 것이 부끄러웠던 걸까. 어색한 무심함이 우스웠다. 예전에는 마냥 무섭기만 했던 아버지였는데.

“소자는 며칠 뒤에 황해도로 떠납니다. 그 뒤에는 바로 태안으로 가고요.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족히 반 년은 있어야 할 듯 합니다.”

“바쁘게 되었구나.”

“중임을 맡아서요.”

“얘기는 들었다. 운하조성도감의 제조가 되었다지?”

“예.”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게 되었구나.”

“……예.”

아버지는 코로 조용히 숨을 흘렸다.

“가문의 명예가 걸린 일이다. 스스로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태종대왕의 피가 흐르는 우리 집안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실수하지 않도록 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잠시 말이 없더니, 어려워하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고맙구나.”

“예?”

“곧 공신이 된다는 말을 들었다.”

“아직은 말뿐입니다.”

“전하께서 어디 허투루 말씀을 뒤집으시겠느냐.”

“…….”

“너의 소식을 듣고 친척 모두가 기뻐하였다. 나는 부친의 묘소를 찾아 마침내 우리 집안이, 왕족의 후광을 벗어나서도 자립할 수 있은 어엿한 반가임을 알렸지. 공신 정도면, 누가 감히 우리 집안을 업신여기겠느냐?”

“…….”

“네가 내 아들인 게 자랑스럽구나.”

“소자도 소자가 아버지 아들인 게 자랑스럽습니다.”

어색한 침묵.

“……흠흠.”

아버지께서는 헛기침을 흘렸고, 나는 이 상황을 은근히 부끄러워하는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자는 염치 불고하고 이만 별방으로 돌아가 쉬겠습니다.”

“그러려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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