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17화
40. 탁란 (2)
“오셨나?”
이산해가 물었다. 예상외로 밝은 얼굴. 의금부에서 추고를 당한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원망하는 경우를 대비했건만.’
추고의 결정적인 원인은 왕 앞에서 다른 신하와 원색적인 비난을 주고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발점은 나와의 약속이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보단,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남에게 잘못을 돌리는 것이 쉽다.
‘그런데 도리어 나를 반길 줄이야.’
냉정한 판단인가.
동인과 서인의 싸움이 격화된 이 시점에서 나까지 척을 질 수는 없다는.
내 예상이 맞다면 이산해는 불쌍하게도 착각에 빠져 있는 셈이었다. 나에게는 나만의 세력이 있고, 앞으로 한동안 서인의 일원으로 위장하겠다는 계획까지 정해져 있으니.
이산해가 설령 엎드려 절을 하더라도 내가 동인에 가담할 가능성은 추호도 없다.
‘물론 냉혹한 현실을 굳이 가르쳐줄 필요도, 없지.’
나는 이산해에게 인사를 올렸다.
“이제야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죄송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약조를 지켜주시느라 노고가 많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아무리 염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건 다행이로군. 들어오게. 거기 서 있지 말고.”
“예.”
방으로 들어서니 이산해가 서안을 밀어냈다.
그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듯, 연신 입술을 움찔거리다 입을 열었다. 하지만 가까스로 나온 말은 무척이나 공허한 질문이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
말은 붙이고 싶은데 딱히 꺼낼 말이 없을 때 으레 건네는 것이, 바로 근황에 대한 질문이었다.
하다못해 간만에 닿은 연락이면 모르겠으되 같은 도성에서 사는 사람에게 근황을 물어보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산해도 느끼는지 어색한 미소가 만면했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사업은?”
“그것도요. 다행스럽게 운하조성도감의 제조로 임명되어 다른 사람 눈치는 안 보고 사업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연한 처사일세. 참의가 아니면 누가 제조가 되어 도감을 이끌 수 있겠나?”
당연한 소리였지만, 정계는 당연하지 않은 일이 이익에 의해 뻔히 벌어지는 바닥이기도 했다.
이해도라고는 추호도 없는 떨거지가 감투를 쓰고 공훈을 받아먹는 일이야 늘상 다반사 아닌가?
그나마 나의 경우는, 바늘도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나만 사업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무난하게 제조가 될 수 있었다.
‘삼의정 늙은이들에게 일등공신 자리를 내어준 덕이기도 하고.’
나는 동시에 공신도감의 일원이기도 했다. 사업을 일으키는데 도움을 준 사람들은, 모두 나를 중심에 두고 있었으니까.
여차하면 내가 공신도감의 제조가 될 수도 있었지만 객관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의정 대신 아래의 자리에 놓이게 됐다.
이게 내가 말한 ‘이익에 의해 벌어진 정당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나마 미리 점지해둔 이등공신, 삼등공신들이 별말 없이 접수되어 다행이었다. 문제는 대가였다. 공신도감 구성원 일부가, 자신들과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 몇을 끼워넣고 싶어했다.
‘여튼 방앗간 기웃거리는 참새마냥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요.’
끼어들 때, 빠질 때 분간을 못하고 욕심을 드러내니, 그 추한 광경을 보기 힘들 정도였다.
아마 이산해라고 다르지는 않겠지. 오히려, 그가 지금 가장 관심있을 분야가 바로 공신 명단에 있을 동인의 비율이었다.
‘0%……, 라고 단언할 수 있겠지만.’
꺼낼 때는 꺼내더라도 포장이 필요했다.
사실, 내가 이산해를 찾아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는 내가 서인을 선동해달라 부탁했음을 당사자로서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관리 해주지 않으면 이산해는 나의 역린이 된다.
물론 이산해 설령 나에게 적의를 품고서 일의 전말을 알리더라도, 나는 능히 반박할 수 있다. 물증은 없고, 그때쯤 나는 서인의 편에 서 있을 테니까.
무고로 몰아가는 건 일도 아니다.
단지 이산해와 그렇게 척을 지고 싶지 않았다. 내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처음 이산해와 마주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나에게 힘이 되어준 지인과 적이 되는 걸 즐기지는 않는다.
“그런 차원에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만.”
“……? 말하게.”
“운하 사업은 비단 국가만의 아니라 저에게도 숙원 사업이기도 합니다.”
“잘 알고 있네. 참의께서 사업을 성사시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아마 도성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 걸세.”
“그게 독이 된 듯합니다.”
이산해는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눈가를 좁히다, 가닥이 잡혔는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노신들이 자네의 약점을 잡아 무슨 일이라도 저질렀단 말인가?”
“저는 괜찮습니다만, 대사간께서 어떻게 느끼실지…….”
“말해주게. 나도 괜찮으니.”
“예. ……후.”
나는 어려운 결정이라도 내렸다는 듯, 과장되게 한숨을 토해내곤 입을 열었다.
“과분하게도 공신도감의 구성원이 되어 나름의 역할을 맡아준 사람들을 추천했습니다만. 몇몇 분들은 제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도 공신으로 추천을 하더군요.”
“……그래?”
“지금 조정이 돌아가는 형세를 완전히 모르지는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공신으로 만드려 하니, 억울하면서도 죄송합니다.”
“자네가 무엇을 잘못해서 죄송해한다는 말인가…….”
“사업이 시행되는 데 결정적으로 도움 된 분은 대사간이십니다. 그런데 어떠한 은혜도 갚지 못한 상황에서, 엉뚱한 사람들만 공신이 되고자 하니 어찌 저라고 불쾌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업을 걸고넘어지니 차마 큰 소리를 낼 수 없어, 도리와 의리를 다하지 못함이 죄스러운 것입니다.”
“음.”
이산해가 짧게 침음을 흘렸다.
자신은 물론 어떻게든 동인 인사를 공신으로 만들고 싶었을 이산해. 그에게 서인들이 사업을 인질로 잡고 자신들의 인사를 공신으로 만들고 있음은 치명적이고도 놀라운 소식이다.
물론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나 관련자의 입으로 나오는 말을 직접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괜찮네. 그보다도 사업과 무관한 사람이 공신이 된다니 참으로 놀랍군. 그들은 중종대왕 시절 문정(文正, 조광조) 선생이 어찌하여 위훈삭제를 시도하였는지 모르는 것 같아.”
“문정 선생의 유지를 이었다는 사람이 이익에 매몰되어 실수를 저지르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실수라니? 추태겠지. 참의는 노신들의 모습에 실망한 모양이지만 지금 참의가 보는 광경이야말로 노신들의 실체라네. 단지 오늘날에 이르러서 큰 이익이 걸리자 본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지.”
“…….”
“걱정하지 말게. 나는 그들과는 다르니. 사업과 무관한 사람이 공신이 되려 한다면, 철저하게 검증을 요구하는 수밖에. 이쪽은 나에게 맡기고 참의는 지금 맡은 역할에 집중하게.”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문정 선생의 유지를 이은 선비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네.”
이산해는 사림의 정의를 위한다는 듯 말했지만, 그라고 이익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사업 성사에 공을 세운 사람들이 공신이 되는 경우는 어쩔 수 없어도, 공을 세우지 않은 서인들이 공신이 되어 동인의 적이 되는 경우만큼은 막아야 했다.
그것이 동인에게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니까.
‘바로 아랫놈들을 시켜 예비 공신 명단의 검증을 요구해야겠군.’
이산해는 그렇게 생각했다.
정확히 이순신이 바라는대로!
‘예상대로인가.’
한동안 제삼당 당여들이 서인을 연기했다곤 하나, 이전부터 동인에게 맞서온 구 서인들의 유대감을 파고들 정도는 아니다.
공신도감의 노신들은 보다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서인 인사를 명단에 집어넣고자 했고, 그래서야 이쪽이 제출한 명단에서 일부가 빠질 수도 있었다.
나는 그걸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서인의 시선을 돌리기로 했다. 지금 그들은 내가 제출한 ‘위장 서인’과 구 서인들을 경쟁시키고 있지만, 동인이 판에 끼어들어 구 서인의 명단 등재를 방해한다면 어떻게 될까?
동인이 가열차게 명단에 등재된 관리들의 검증을 요구할수록 서인들은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들이 집어넣으려는 구 서인은 확실하게 공을 검증할 수 없는 데 반해, 운하조성도감의 제조까지 오른 나는 나의 ‘위장 서인’들에게 어떤 공이라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나아가 서인들은 지금 명단에 올라간, 그나마 지킬 수 있는 ‘위장 서인’들을 지키고자 전력을 다할 터였다.
마치 탁란한 뻐꾸기 알을 목숨 걸고 지키는 딱새처럼 말이다.
‘석연찮은 구석이 느껴지더라도 다른 선택지는 없지. 어설프게 건드리려다 나의 위장 서인들이 등이라도 돌리면 그것대로 골치거든……, 하하.’
다 차린 밥상이 너무나도 탐스러웠나 본데, 남이 끓인 라면에 젓가락을 가져대는 놈은 그 자리에서 맞아 죽어도 마땅한 법이다.
그리고 지금은 서인이 죽어 마땅한 경우였다.
양보는 삼의정 늙은이들이 공신 명단에 오르는 것까지.
그 이외는 오직, 철저하게, 나만의 것이다.
“대사간…….”
나는 몸을 일으켜, 이산해의 두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 의금부에서의 고생 탓인지 까슬까슬해진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가, 갑자기?”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거, 걱정하지 말게! 흠흠.”
“이 은혜, 뼈에 새겨두고 어떻게든 보답을 하겠습니다.”
“선비로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일세.”
“받은 은혜는 반드시 갚는 것도 선비로서의 덕목입니다.”
“흠흠.”
마다하지는 않는 이산해였다.
최종적으로는 이순신을 동인에게 끌어들일 생각이 있었던 이산해에게는 오히려 바래 마다치 않은 상황이었다.
단지 실제로 벌어지는 상황은, 이산해가 이순신에게 조종당하는 것이었지만.
* * *
한 번 불이 붙은 당쟁은 쉽사리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산해와 심의겸 쌍방을 향해 탄핵하는 상소들이 줄을 이었고, 또 동인에서는 공신도감이 내정한 예비 공신 중 일부가 정당하지 않게 명단에 올랐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싸움이 그치지 않을 동안.
나는 진원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간만의 친우를 만났다.
“영감!”
“그간 강녕히 지내셨습니까, 영감.”
신립.
그리고 이순신.
태안으로 떠나기 전에 만나둬야 할 사람들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니까. 또 주변에는 징그러울 정도로 많은 문관들과는 달리, 몇 없는 무관과 예비 무관이기도 했다.
“도사…….”
내가 능글맞게 인사를 건네자, 신립이 얼굴을 붉혔다.
“알고 계셨습니까.”
“누구 소식인데, 당연히 알아야지요.”
최근 신립은 오위도총부 도사로 영전했다. 품계는 종오품.
“덕분입니다.”
“하하하……. 그럴 리 있겠습니까. 다 신 공(公)께서 노력하신 결과지요.”
“영감께서 저를 회령에서 이끌어주지 않으셨더라면, 제가 아무리 노력했어도 벌써 도사에 오르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제가 신 공(公)에게 아무리 계기를 주었어도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셨다면, 역시 도사에 오르기는 어려웠겠죠.”
나는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안으로 듭시지요, 두 분 모두.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특히, 이 공(公)의 무과 준비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궁금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