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16화
40. 탁란 (1)
언쟁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말리던 사람도 듣고만 있던 사람도 질릴 정도가 되어서야 선조가 나섰다.
“그만.”
참으로 무성의한 중재였다.
물론 말싸움이 격화되다 못해 이제는 잿가루만 남아 소강상태가 되었으니, 구구절절 중재할 것도 없었다.
단 한 단어만으로도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기에는 충분했으니.
“감히 어전에서 원색적인 비난을 일삼다니!”
“……송구하옵니다.”
“송구하옵나이다.”
두 사람이 깊게 허리를 숙이며 사죄했다. 사실, 두 사람이라고 모두 선조를 향한 감정이 편치 않았다.
불만 붙여놓고 빠진 주제에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서 구경만 하다, 양쪽의 기력이 다해 알아서 정리되는 분위기에 끼어들었으니.
하지만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밉보이기라도 했다가 왕이 상대의 편을 들어줄 수도 있었으므로.
“감히 왕 앞에서 국가의 중대사를 두고 사적인 감정으로 분란을 일으킨 죄는 면할 수 없다. 의금부에서는 대사간 이산해와 이조참의 심의겸을 추고하라.”
“……예.”
마침 의금부제조를 겸하고 있던 좌의정 이탁이 대답과 함께 허리를 숙였다.
분쟁이 일단락되자 선조는 자리에서 일어나 좌우 대신들을 향해 선포했다.
“의정부 대신들의 공론을 쫓아, 굴포운하는 승인하겠다. 재상들과 육조 당상들은 논의하여 공신도감과 운하조성도감을 설치하고, 이 일에 공을 세운 자의 명단을 지어 올릴 것이며 반드시 운하를 성사시켜 선대왕들의 한을 풀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망극하옵나이다.”
좌우에 시립한 제신들이 예를 표하자, 선조는 이만하면 됐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일 회의는 여기서 파하겠다. 해산하여 각자의 직무를 다하라.”
그렇게 선조가 자리를 뜨니, 무겁게 가라앉았던 근정전의 분위기가 탁 풀렸다.
끝을 보지 못한 채 의금부의 추고만 당하게 생긴 이산해와 심의겸은 서로를 향해 이를 갈았다. 그리고 자신이 당당하다는 것을 과시라도 하듯, 앞다퉈 근정전을 나섰다.
‘이산해도 마냥 예전 같지는 않군.’
선조가 의도했다곤 하나 이토록 감정적으로 나올 줄이야.
서인을 도발하는 선에서 끝내고자 했거늘 아예 양당의 전면전을 시작한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어쨌거나 두 사람이 사라지자 남아있던 대신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노골적인 시선부터 은근한 의식까지, 한두 사람도 아니고 죄 이러니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선조는 나를 과하게 우대하여 고립을 의도하였으나, 동인과 서인의 분쟁이 전면전으로 확전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순신은 양당 갈등의 중심이 된 굴포운하 사업의 유일무이한 책임자였으며, 동시에 공신 녹권이 확정된 사람이었다.
고작 그 하나만을 공신으로 삼기에는 많이 빈약하다. 구색을 갖추고자 얻어걸려 녹권 될 사람이 한둘이 아니리라.
문제는 굴포운하는 온전히 이순신만의 사업이었고, 때문에 누구를 공신으로 만들지도 온전히 이순신에게 달려 있었다.
‘모두가 시기하는 군계일학에서, 당쟁의 흐름을 좌우할 캐스팅 보트가 됐다는 뜻이지.’
내가 동인에게 공신을 몰아주느냐, 서인에게 공신을 몰아주느냐에 따라 막 시작된 전면전의 승기를 누가 먼저 쥐고 시작하느냐가 정해진다.
물론 당파의 이익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지위를 지금 자리에서 두어 단계 높여줄 공신위는 모두에게 절박한 것이기도 했다.
“…….”
그래서겠지.
평소 일면식도 없던 자들까지 나에게 슬쩍슬쩍 시선을 보내오는 것은.
‘한심한 놈들.’
양당의 분쟁이 없었더라면 선조 의도대로 나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증오까지 했을 자들이었다.
상황이 바뀌었다고 천박하게 태세를 전환하는 그들에게 나눠줄 떡고물은 어디에도 없다.
앞으로의 행보를 계획한 나는, 앞자리의 공조판서 박영준과 참판 이준민에게 속삭였다.
“날파리들이 덤빌 텐데, 두 어르신들께서 제지해주십시오.”
나의 명령에 박영준과 이준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로서도 제삼당의 전유물이 되어야 할 부스러기를 동인이나 서인에게 양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것이 자신의 지위 향상을 위해서건, 제삼당을 번듯한 당파로 성장시켜 궁극적으로 사림 화평을 유도하기 위해서건.
“그럼.”
내가 운을 떼며 발을 옮기자, 마치 그것이 신호라도 되었다는 듯 사방에서 관리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참의!”
“이 공(公)!”
가까이 다가온 자들은 앞다투어 공허한 인사, 덕담, 아는 척을 시도했으나 나는 형식적인 대답만 하며 계속 발을 움직였다.
길은 박영준과 이준민이 내어주고 있었으므로, 발목을 묶어대는 떨거지들의 시도는 무색하게도 나는 재빨리 근정전을 탈출할 수 있었다.
* * *
공조.
뒤숭숭한 분위기였으나 나쁘지 않았다. 공신 녹권이 사실상 확정된 판서 박영준과 참판 이준민은 이미 공신이 된 것처럼 희희낙락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참판 이준민이었다.
“나는 참의 일에 도움이 된 것이 없는데, 후의를 입으려니 많이 부끄럽네.”
“마다하시겠다면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
이준민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당혹한 표정을 짓자, 나는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농입니다. 참판께서 소관을 위해 얼마나 힘이 되어주셨는데요.”
“깜짝 놀랐네, 이 사람아.”
가슴을 쓸어내리는 이준민이었다. 곁에서 졸지에 끈이 떨어지나 싶었던 박영준도 은근히 안도한 기색이었다.
단물만 쪽 빨고서 팽해도 두 사람은 정말로, 한 게 없어서 항의도 어려웠으니까. 물론 배신감을 표출할 수는 있겠지만 이후가 감당이 안 되니 제정신으로는 못 할 짓이었다.
지금의 나는 이제 두 사람의 입지를 아득하게 능가했으니.
하지만 노골적으로 자존심을 꺾으려 들 생각은 없었다.
“판서 대감께서도 마찬가지지만, 소관은 두 분께서 응원을 해주셨기에 마침내 운하 사업이 성사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하하……. 다 참의 덕이지.”
죽다 살아나서인지 선선히 이순신의 덕임을 인정하는 이준민이었다. 어쩌면 충성을 증명하는 발언이라 봐도 무방하리라.
박영준도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이제 어찌 할 생각이신가?”
“공사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정치적 거취를 물어보시는 건지.”
“후자일세.”
이순신이 공사를 어떻게 하느냐는, 박영준은 관심도 없었고 설령 있더라도 개입의 여지가 없었기에 진의가 뻔한 질문이었다.
단지 노골적인 인상은 주지 않기 위해 물어나 본 것일 뿐.
“저에게 힘이 되어준 사람은 두 어르신만이 아닙니다. 여러 사람이 소관의 추천을 받아 공신이 될 텐데, 뜬금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옹호해주십시오.”
“다 참의 편이니까?”
“예. 물론 삼의정 대감들은 제외하고요.”
“어……, 삼의정 대감의 녹권을 반대하라는 말인가?”
“아니요. 그 뜻은 아니고요.”
국가 최고기관인 의정부의 대신들이라, 굴포운하 사업에 한 일이 없더라도 구색을 맞추기 위해 녹권될 가능성이 십중구할이었다.
배가 아픈 일이었으나 양보는 해야 한다. 일등공신을 독점하고자 욕심이라도 부렸다간, 의정부 대신들과 척을 지게 될 테니.
그리고 노골적인 인상을 남겨 수많은 사람을 적으로 만들겠지. 오히려 양보가 남는 장사였다.
“녹권되는 사람들은 삼의정을 제하고 다 제 사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수는 얼마나…….”
“이등 공신 수준으로는, 두 어르신 포함해서 열두 명쯤 되겠군요. 적절한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판서 박영준과 참판 이준민. 여기에 전직 영의정이자 안동 권씨 수장인 권철과 전직 우의정 노수신. 예조참판 유희춘. 황해감사 이이와 승지 허엽. 이조좌랑 류성룡과 스승이자 사간원 정언인 김성일.
마지막으로 태안군수 정인홍, 상의원 별제 이원익, 선공감 직장 유영경. 이들 셋은 아직 포섭되지 않았으나 도움이 되어주기도 했지만, 공신을 미끼 삼아 영입할 생각이었다.
“그럼 삼등 공신은…….”
박영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등 공신만 정원이 정해진 상태.
달리 말하면 이순신이 삼등 공신까지는 정원을 채워두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판서나 참판 급이면 각자 자신들이 챙겨야 할 아랫사람이 적어도 몇은 있기 마련이었다.
“을룡이라고, 해방 노비인 친구 하나 말고는 정해진 바가 없습니다.”
“……그래?”
“예.”
아무리 해방됐다지만 노비 따위가 공신이 된다니 거부감이 들 법 함에도, 두 사람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까.
“혹시, 참의가 괜찮다면…….”
박영준은 차마 강권하지는 못하고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말을 다하지는 않았으나 뻔한 소리인지라, 나는 그가 무안해할 필요 없도록 답을 해주었다.
“한둘 쯤이면 괜찮습니다. 이등 공신을 보필하였는데 어찌 이 일에 공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아, 고맙네 참의.”
“이건 참판께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이준민에게 고개를 돌리자, 그도 생각해둔 사람이 있었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마 참의는 아는 사람일 텐데…….”
“누구요?”
“태안군수 말이네.”
“아,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제 일에 보탬이 되어주었으니까요. 전부터 이등공신으로 추천할 생각이었습니다.”
“현명한 판단일세. 겉보기에는 이상한 사람처럼 보여도, 참의가 느꼈듯이 진국인 사람이니까. 곁에 둔다면 쓸만할 걸세.”
“저도 군수가 뜻을 함께 해준다면 고맙겠지만 관직에 뜻이 없다니 강요할 수는 없지요. 공신에 오르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이에 이준민이 나섰다.
“내가 잘 말해보겠네. 그의 스승이 내 외숙이기도 하고, 전부터 연락은 해온 사이이니.”
“그래주신다면 망극할 따름입니다.”
“망극은 무슨, 내가 망극하지.”
한 차례 서로를 향한 금칠이 있은 뒤, 나는 이준민에게 말했다.
“추천해주신 태안 군수는 알려드린대로 이등공신을 생각해두고 있으니까요. 삼등공신에는 다른 사람을 추천해 주세요.”
“아, 알겠네. 그러지.”
나는 미소를 지었다.
고작 육조의 말단인, 공조의 참의가 누구를 공신으로 만들지 정하다니.
그런데 상관인 판서와 참판은 이 망언을 면전에 듣고서도 불쾌하기는커녕 떡고물 소식에 희희낙락이었다.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상황.
오직 나이기에 가능한 만행이었다.
물론 우려가 아예 없을 수는 없다. 박영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참의의 사람들만 공신이 된다면, 다른 자들이 용납을 할까?”
너무나도 이기적인 인사였다.
서인이건 동인이건 이 기회에 자기네 사람들도 공신으로 만들고 싶을 터인데.
아무리 이순신 혼자서 북치고 장구 친 일이라지만, 그건 그거고 자기네들 욕심은 욕심이었다. 앞으로 당쟁의 흐름까지 걸린 일이니.
“용납할 겁니다. 한쪽은 못 하겠지만.”
“……어떻게?”
“저도 마찬가지지만 두 분께서는 운하 사업에 적극적으로 찬성 의사를 밝히세요. 공공연히 말을 하고, 반대 의사에는 척까지 질 각오로 민감하게 나오셔야 합니다. 이건 사업에 공을 세운 사람으로서 당연히 드러내야 할 태도이기도 하지만, 대신들 세력에 편승하겠다는 신호이기도 하니까요.”
“……아아. 흠. 알았네.”
내가 왜 동인을 통해 서인을 선동했겠나?
사업을 통과시키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대세를 잡고 있는 서인 세력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들의 일원으로 위장한다면 적어도 서인은 공신 명단에 잡음을 내지 않을 터였다.
원래는 운하 사업이 중반은 지나서야 녹권이 있을 줄 알았는데, 선조가 첫 삽을 뜨기도 전에 녹권하는 바람에 일정에 변화는 생겼지만 원래 계획에서 본질적으로 달라진 건 없었다.
거래, 선동, 위장.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서인을 배신하고 독립된 제삼세력으로 발호하는 것까지.
……모조리 설계된 일이었으나 다른 사람들이 내막을 알게 됐을 즈음에는, 나나 나의 세력은 이미 누구도 간과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 뒤일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