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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15화 (115/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15화

39. 동서분당 (2)

나의 마음속 공인 미친놈의 자리에는, 이이도 있었지만 선조가 살짝 더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의 광기는 지적능력 부재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을 믿지 못하는 중증의 편집증과 경계심, 적대감. 그리고 모두의 머리를 밟고 올라서겠다는 권력욕과 오만함.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측 불가능함.

이들 요소요소가 선조를 즐비한 광인 중에서도 유난히 특별한 광인을 만들어주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선조는 종잡을 수 없는 만행을 하고 있었다.

“참의는 본성이 순하고 겸양을 좋아해 자신의 공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한데, 어찌 그에게 의향을 물어보라 대답 뻔한 소리를 한단 말인가? 우상은 지금 나를 기만하려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선조는 나를 공신으로 만들려는 게 분명했다.

과하게 띄워, 굴포운하의 중요성을 부각하고 그것을 성사시킨 자신을 희대의 성군으로 포장하려는 셈이지.

대가는 무엇인가?

나의 외교적 고립이다. 주목받는 자는 시기 받게 되어 있다. 특히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능력만 좋아 고관을 꿰찬 상황에서는 더더욱.

주변의 시선이 좋은 편만은 아니지.

그래서 더더욱 주위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호의적으로 대했단 나로서는 무척이나 혈압이 오르는 만행이었다.

‘나만 나쁜 놈 만들고 혼자서 꿀을 빠시겠다?’

나아가 나를 주변에서 고립시켜 차도살인의 말로 쓰려는 것이 분명했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선조의 행동은 예상외이긴 했으나 치밀했다. 가재도 치고 도랑도 잡을 비책이다.

물론 실패할 경우 후폭풍도 커지겠지만 선조는 만일의 경우를 의식하기보다는 굴포운하 사업이 성공하는데 베팅한 것 같았다.

‘나라고 절대 성공한다는 호언장담을 할 수 없거늘.’

보통 간담이 아니었다.

하지만 선조가 계략을 시도한다고 내가 꼭 당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고립도 세력이 없는 끈 떨어진 연에게만 가능한 짓이지, 나처럼 이미 똘마니들을 여럿 영입한 상태에서는 역효과를 일으키기 쉽다.

남들은 몰라도 똘마니들은 내가 주목을 받을 수록 더욱 충성과 존경을 바칠 테니까. 조직의 결집력이 강화되고, 당파 영수의 힘까지 강해지는 경우는 오히려 나에게 이상적이기까지 하다.

‘미리 여러 사람을 포섭해 두길 잘했군.’

하지만 이 시점에서 티를 낼 필요는 없다.

그리고 제삼당 존재와 나에 대한 평판이 반전되는 것은 별개다. 특히 동, 서인 모두에게서 질시와 질투를 받는다면 향후 행보에 제약이 클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러운 점은 이쪽으로도 대비가 되어 있다는 점이겠지.

‘교토삼굴(狡免三窟)이라. 영악한 짐승은 어떻게든 빠져나갈 길을 만들기 마련이지.’

나는 맞은편에 자리한 대사간 이산해를 바라보았다.

그는 평소답지 않게 무척이나 부담감 어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치 온 세상의 근심과 우환을 다 떠안은 사람처럼.

이산해는 똑똑한 사람이었고 현 흐름이 이어진다면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뻔히 알 터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가 단기필마 끈 떨어진 연이라는 전제에서나 해당하는 상황이며, 현실은 그렇지 않지만…….

“……!”

이산해는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미소를 보냈다. 남들이 본다면 지인 사이의 짧은 인사로 보이겠지만, 이산해는 이것이 약조 이행의 재촉임을 모르지 않을 터였다.

일전에 서인을 선동하고자 동인의 영수로서 공공연히 반대하겠댜 약조하지 않았던가.

지금 상황에서는 무리였으나 이산해는 약조한 말을 뻔뻔하게 뒤집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약속 때문에 함께 종친에 항거할 정도로, 내뱉은 말에 책임감이 있는 자였다.

다시 당혹에 물드는 그.

왕이 타협조차 하지 않고서 밀어붙이는 이 상황에서, 신하들은 속으로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차마 나서지는 못하고 있었다. 굳이 모난 돌을 자처해 정을 맞을 필요는 없으니.

그 심정이 이산해라고 다르지는 않을 터인데,

“전하!”

커다란 목소리로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나서는 이산해였다. 충동적인 선택에 퇴로를 두지 않겠다는 듯.

‘의외의 순진한 면모로군.’

나에 대한 착각으로 왕과 맞서게 되었으니, 만일 내가 오래전부터 제삼당을 구성했음을 알게 된다면 배신감을 느낄 게 뻔했다.

물론 이쪽이 흔들리던 이산해를 재촉하긴 했지만, 나서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라고 둘러댈 수도 있으니.

졸지에 이산해가 설레발을 떨어서 자승자박을 한 일로 몰아갈 수도 있지만, 이산해란 그렇게 적으로 만들기에는 아까운 사람이었다.

그동안의 우애를 배신하는 것도 내키지 않는 일이고.

하지만, 당장은 내가 해줄 일이 없었다.

어전에 웅성거림이 일었다.

-쿵, 쿵!

어좌의 팔걸이가 요란하게 울었다.

주위가 환기되자 선조가 물었다.

“대사간. 무슨 일인가?”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말하라.”

선조의 윤허가 떨어지자 이산해는 약간 질린 얼굴을 하면서도 또박또박 깔끔한 목소리로 의견을 개진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신은 사업이 우려스럽사옵니다.”

“무엇이 우려스럽단 말인가? 이미 의정부의 대신들이 참의의 보고와 계획을 검증하고 나에게 찬성의 뜻을 밝혔거늘.”

사실, 적극적으로 찬성한 것은 아니다.

의정부의 대신들은 이순신의 보고서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트집을 잡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두루뭉술한 말로 나쁘지 않다는 식의 의견만 전달했을 뿐이다.

그게 졸지에 찬성이 되었으니…….

아무리 침묵과 찬성의 본질은 같다지만 의정부 대신들로서는 찔리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부인하기에는 자신들도 잘한 것이 하나도 없으니.

“대사간은 나나 의정부의 판단을 믿지 못하겠다는 뜻인가?”

“아니옵나이다.”

“한데 어찌하여 반대한단 말인가.”

“올해는 유난히 가뭄이 심하여 앞으로 있을 백성들의 노고가 불 보듯 뻔하옵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수많은 백성을 노역에 동원하는 것은 심히 미안한 일이옵니다.”

“나라고 백성들을 동원하는 일이 어찌 달갑겠는가? 그렇지 않고서는 어떠한 사업도 성사할 수 없기에 불가피하게 동원할 뿐이다.”

“…….”

“그리고 운하는 백성 모두에게 이로운 일인데, 어찌 가뭄이 왔다고 미룬단 말인가? 만일 태안만 가뭄이 심하다면 미룰 수 있겠으나 모든 백성이 어려워하는 마당에 공사를 연기한다면 도리어 태안의 백성들만 편애하는 모양새가 될 것이다.”

운하를 지어서 득을 보는 쪽은 조정밖에 없었다.

물론, 안흥량을 왕복해야 하는 조운선 수부들은 굴포운하를 반기겠지만 조정은 그들이 옮기는 세곡에 관심이 있었지 미천한 수부들의 목숨 따위에 있지는 않았다.

때문에 태안의 백성만 편애하느니 마느니는 순 헛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이산해가 대규모 동원을 유려한 것은 가뭄이 겹쳤기 때문이지 동원 자체를 부정해서가 아니었다.

한창 바쁜 시기에 가뭄까지 겹쳐 논밭이 실시간으로 죽어가거늘, 이러한 마당에 농군들을 동원해 공사에 투입한다?

선조의 강행 의사는 수많은 가정을 파탄 내겠다는 의지와 다름없었다.

‘이산해의 말은 옳지만…….’

소용은 없었다.

애초에 선조가 답정너인 상태이므로 이산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선조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으리라.

또 이산해가 반박하는 이유도, 진정으로 굴포운하 사업을 좌절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서인을 선동하기 위함이니.

자연스레 주장에 힘이 빠지고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과연 이산해는 선조의 궤변이나 다름없는 억지에도 반박하지 않고서 침묵을 지켰다. 동감하지는 않으나 따지지는 못하겠다는, 사실상 항복의 사인이다.

‘일이 이렇게 정리되나? 덕분에 내가 욕은 덜 먹겠군.’

서인 선동과는 별개로, 굴포운하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던 나도 공사를 연기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중종 치세 의항운하를 시도했을 때처럼 이번에도 땡중들을 동원하겠으나, 굴포운하는 의항운하와는 공사구간이 비교도 안 되게 길어 백성 동원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논밭이 실시간으로 죽어가는 가뭄 상황에서 대규도 동원이라?

내가 태안 백성들을 모두 책임질 수 없는 한, 사업을 제안하고 추진하게 될 나는 수많은 농가 파탄의 주범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산해가 옳은 소리를 대신 해주고, 선조가 억지를 부리며 강행을 주장하니 책임이 내가 아닌 선조에게 전가되는 형세가 만들어졌다.

‘선조는 자신에 대한 거부를 허용하지 않는 자라는 걸 감안하면, 의외인데.’

백성들의 반감을 각오하더라도 굴포운하로 얻을 힘과 명예가 훨씬 남는 장사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천한 백성 따위의 목소리는 의식하지 않는 것인지…….

묘한 침묵 속에서 마무리를 지은 자는 우의정 박순이었다.

“전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우의정 박순.

허엽과 막역한 사이였으나, 그와 당색을 달리하면서 서로 등을 돌리게 된 자.

본래 허엽이 동인의 영수가 될 자였음을 감안하면 그와 대적한 박순의 당색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어떻게든 사업을 시작하겠다, 마음을 굳힌 왕에게 선택권을 넘긴다는 건…….’

사실상 사업에 찬동한다는 뜻과 다르지 않았다. 직전만 해도 사업에 소극적이었던 그가, 동인 영수인 이산해가 반대를 하니 은근히 대척에 선 것이다.

“…….”

그러자 단숨에 냉각되는 분위기.

박순의 대세전환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분명 예상된 일이었음에도, 이산해는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규탄하듯 박순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냐는 듯.

이때 끼어드는 사람이 있었다.

“신이 감히 아뢰옵건대, 굴포운하 사업은 과연 나라와 백성들을 위하여 신속하게 시행되고 성사해야 할 일이옵니다.”

이조참의 심의겸!

서인의 영수였다.

그의 생각이란 뻔했다.

동인들 사이에서 명망 높은 사람인 이산해가 반대를 주장하니, 박순이 태도를 바꾸어 대척점에 섰다.

이 소식이 외부로 퍼진다면 동인들이 들불처럼 타오르리라. 서인에 대한 저주가 넘쳐나겠지. 그리고 어떻게든 굴포운하를 저지하려 들 터였다.

지인인 이순신의 사업이라, 팔이 안으로 굽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동인에 대한 적대감이 훨씬 앞서는 심의겸이었다.

그래서일까.

“비록 가뭄으로 피폐해졌을 태안의 백성들에게는 미안한 상황이지만, 어찌 대의를 위한 일에 소를 희생하지 못하겠습니까? 일의 경중을 감안하면 백성들의 고통을 어루만져주더라도, 일단은 사업부터 성사하고 난 다음이어야 할 것이옵니다.”

은근하게 대척에 섰던 박순과는 달리 이산해의 주장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발언이었다. 선조는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과연 이조참의로다. 한 사람이라도 응해주는 자가 없어 막막하였는데, 이렇게라도 왕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응당 해야 할 말을 했을 뿐이옵니다.”

“정확한 안목과 냉철한 판단을 할 수 있다면 참의와 의견이 다를 수는 없을 것이다.”

심의겸과 정 반대의 의견을 내놓는 이산해는 안목이 나쁘고 판단력이 흐리다는 소리였다. 자존심 강한 이산해에게는 설령 왕의 발언이라도 망발 이외로는 들리지 않았다.

“전하. 이조참의는 단지 아첨만을 일삼고자 분별력 없이 주장하였을 뿐인데, 어찌 안목과 판단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단 말이옵니까?”

이에 심의겸이 나섰다.

“대사간이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억지를 부리기에 불가피하게 나섰을 뿐인데 단지 자신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아첨꾼으로 몰고 치부하여 모함하다니. 어찌 사간원의 모범이 되어야 할 대사간이 그럴 수 있단 말이오!”

“사간원은 인군의 실수와 육사(六邪, 나쁜 신하)를 고발하고 처단하는 것이 원래 역할이라, 사간원의 장관인 대사간으로서 육사의 행태를 지적하였을 뿐. 사실이 그럴진대 모함이라니 말씀이 과하시오!”

“직책을 방패삼아 악질적인 모함을 정당화하다니? 선인의 가르침을 제대로 배운 선비를 자칭하면서도 이런 패악을 부린단 말인가!”

“일전에는 전랑의 자대권에도 간섭을 하더니, 제 역할도 다하지 못하면서 오지랖이 심해 추태를 일삼는 버릇은 여전하십니다!”

이산해가 동서분당의 결정적인 원인이 된 사건을 언급하며 빈정대니, 심의겸도 지지 않고 이산해가 과거 새파란 시절에도 당을 조직하려다 탄핵당한 사건을 꺼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가 하는 말은 듣지도 않고서 원색적인 비난만을 퍼부었고 어전은 시장통으로 전락했다.

몇몇 사람들이 제지를 시도했으나 혈기 달아오른 이산해와 심의겸은 상대방이 잘못을 시인하고 항복하기 전에는 먼저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지금에라도 왕이 나서준다면 어떻게든 정리되겠으나……, 선조는 오히려 턱까지 괴어가며 두 사람의 언쟁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꿩 먹고 알 먹기로다. 굴포운하에 이어 사림마저 갈라졌으니!’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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