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14화
39. 동서분당 (1)
“그래.”
선조는 제신들을 향해 일렀다.
“의정부에서 올라온 계사는 잘 보았다.”
“……망극하옵나이다.”
영의정 홍섬은 송구스럽다는 듯 허리를 숙였다.
그를 포함한 삼의정과, 동벽 서벽 누구 하나 이순신의 보고서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왕도 이해하지 못할 전문용어를 그대로 옮겨 아뢸 수는 없어, 다들 어물거리며 대충 합당하다…… 수준의 공문을 올린 참이었다.
일국을 경영하는 의정부의 일곱 대신이 머리를 맞댄 결과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참혹했다.
‘다른 일 같았으면 이 기회에 몇 놈 갈았겠지만…….’
선조는 죄스러워하는 삼의정을 내려다보며 만족감 어린 미소를 지었다.
저들도 반성하는 모습이 있겠다, 굳이 좋은 일을 앞두고 초를 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지금은 분위기를 띄워야 할 때였다.
“내 가만히 보아하니 참의의 발상이 대단하다. 더욱이 일을 성사하기 위해 직접 만능분을 개발하기까지 했으니, 어찌 뭇 관리들의 모범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굴포운하 사업의 요지는 굴포운하 자체에 있었다. 마침 의정부의 보고도 사업의 타당성 보고가 아니었던가. 비록 이순신이 책임자라고는 하나 핀트가 어긋난 발언이었다.
무슨 일을 저지르겠다는 복심이 너무나도 뻔히 드러났으므로, 당사자인 이순신으로서는 침을 꼴깍 삼킬 수밖에 없었다.
‘뭘 꾸미는 거지, 이 또라이가?’
조정으로 복귀한 뒤 제법 적지 않은 시간을 왕 앞에서 보냈다.
별다른 일은 없었다. 공무와 관련된 대화만 이따금 있을 뿐이었고, 또 내가 사리는 편이라 그마저도 흔치 않았다.
과거 윤대라는 명목으로 나를 불러놓고 온갖 미친 티라는 티는 다 낸 선조이니. 과실이 무르익지 않은 지금 시점에서는 최대한 똥 피하는 심정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내가 굴포운하라는 초유의 사업을 이끄는 이상, 선조의 관심을 안 받을 수는 없으리라 각오했지만.’
막상 선조가 허파에 바람이라도 든 것처럼 실실거리며 나를 드높이니 염통이 절로 탱글탱글해졌다.
“……노고가 있으면 보상하는 것을 나라의 법으로 세웠으니, 공조 참의의 공을 정식으로 치하하여 뭇 사람의 모범으로 삼고 장군에게 내리는 부월로 삼아 사업의 성공을 기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직 첫 삽도 뜨지 않았는데 치하부터 운운하는 선조였다.
일의 경중을 생각하면 선조의 발언도 마냥 무리수는 아니었으나, 비정상적으로 호의적인 태도를 보아하니 어중간한 치하로 끝나지 않을 듯했다.
그것이 선조의 계략이겠으나 내막부터 알아야 대응할 수 있는 법.
이순신과 마찬가지의 심정이었던 영의정 홍섬이 먼저 운을 뗐다.
“치하라 함은, 어떤 종류의 치하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녹훈을 해야겠다.”
“……!”
녹훈 운운에 홍섬은 물론 좌우에 시립한 제신들의 눈동자가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녹훈이 뭔가?
훈신(勳臣, 공이 있는 신하)을 기록하겠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공신을 삼겠다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아직 사업이 시작하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석회 수급의 선결 과제인 황해도 금천(金川)의 가마들조차 하나도 세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녹훈이라니?
출정하는 장수에게 부월을 내릴 수는 있지만 아직 시작도 안 한 전투의 승전을 치하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하다 못해 공신이라니!
“저, 전하…….”
홍섬이 우려를 표했으나 선조의 심지는 굳었다.
“예로부터 굴포운하는 조선이 반드시 성사해야 할 숙원사업이었는데, 참의가 있는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진전이 있게 되지 않았는가?”
“성상의 말씀이 실로 옳사오나, 아직 사업은 시행조차 되지 않은 상태이옵니다.”
“이미 성사된 일이다.”
“결과가 어찌 될지 모르옵나이다.”
“영상은 이 일이 반드시 성사되어야 함을 모르는가? 그런데 벌써 초부터 치려 하다니, 과연 백년대계를 구상해야 할 위치에 있는 자로서 올바른 행동인지 모르겠다.”
“…….”
태종대왕 때 만들어진 굴포운하가 정상적으로 기능했더라면 이후부터 지금까지 족히 백 만 섬의 세곡을 아낄 수 있었겠지.
그 방대한 세곡으로 무엇을 할 수 있었는지를 감안하면, 과연 굴포운하는 오늘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 년 후의 세상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사되어야 할 일임은 맞다.
하지만…….
‘이 무슨 억지란 말이냐?’
말처럼 굴포운하가 뚝딱 성사될 것 같았으면 어찌 선대왕들이라고 해내지 못했겠나.
물론 이번 굴포운하 사업은 과거의 시도와는 경우가 판이하게 다르긴 했다.
태종은 하륜을 앞세워서, 세조는 신숙주를 앞세워서 사업을 일으켰다. 왕과 권신이 힘을 합치니 다른 신하들은 공론을 모아도 대세를 거스를 수 없었다.
결과는?
망했지.
태종도, 하륜도.
세조도, 신숙주도.
어느 쪽도 운하사업에 지식이 없었다. 열의만 있을 뿐. 무작정 저질렀다가 한쪽은 자칭 운하, 타칭 시냇물이나 낸 수준이고 한쪽은 뻘이나 파는 뻘짓만 저지르고 망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경우가 다르다. 그는 철저히 준비된 전문가였다. 과거의 시도에 비하면 정말 결정적인 이점이다.
문제는…….
‘참의 외에는 죄다 운하 사업에 문외한이야!’
영의정 홍섬 그는 물론이고, 다른 여섯 명의 의정부 대신들도 이순신의 보고서를 해석할 수 없었다.
그의 상관이자 국가의 토목 사업을 주도하는 공조의 판서와 참판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야 할 터임에도, 두 사람 역시 이순신에게 전적으로 받아먹는 위치에 있었다.
이건 사업이 성공해도 문제고 실패해도 문제다.
성공하면 이순신만 집중적으로 띄워지고, 실패하면 미연에 알아보지 못한 다른 대신들이 무능이 부각된다.
‘그래서 최대한 조용조용 넘어가는 편이 조정의 안녕에도 옳거늘!’
선조는 생각이 완전히 반대에 있었는지, 덮어놓고 공신을 운운하며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전하…….”
“영의정이 이렇게까지 소극적이니 내가 어찌 사업을 시행할 수 있겠는가.”
“사업의 시행을 만류하는 것이 아니오라.”
이순신에 대한 과도한 부각을 막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되었다!”
선조는 단호하게 의사를 피력했다.
홍섬의 생각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지금 이순신을 너무 띄워놓으면, 성공하건 실패하건 후폭풍이 커진다.
단지 그가 우려하는 상황을, 선조는 벌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물론 성공이 전제이기는 하나 상황이 극적일수록 결과 역시 인상적이기 마련이다. 물론 쓸데없이 바람을 너무 집어넣었다간 도리어 맥이 풀리지만 다름 아닌 굴포운하 사업이다.
성공만 한다며 개국과 진배없는 공이다. 그깟 과장이야 못하겠나?
사람들 모두가 기대감에 휩싸여 이순신과 굴포운하를 입에 오르내려야만 사업이 성공했을 때 선조의 위신이 극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선왕도 성사하지 못한 초유의 대사업 굴포운하를 성공한 나야말로 진정한 조선의 주인이니라, 하고 말이다.
그러니 시작부터 최대한 띄워놓을 필요가 있었다.
“참의가 반드시 사업을 성공할 것을 알고서, 내 군신의 의리를 다해 훈신의 노고를 치하하고 앞으로 세울 공을 당부하겠다는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영상은 경거망동하지 말라.”
경거망동하지 말라!
선조가 경고하듯 단단히 선을 긋자, 천하의 영의정 홍섬도 더는 어쩔 수 없었는지 허리를 숙이며 물러났다.
왕은 몇 번이고 적대적으로 영의정을 갈아치운 전력이 있는 사람.
전직 영의정만 못한 홍섬이라면, 선조의 눈에 단단히 찍혔다가 바로 쫓겨날 수 있었다.
“영상.”
물러난 홍섬 곁에서 우의정 박순이 속삭였다.
“이대로 물러나실 겁니까?”
“전하의 심지가 이렇게 굳건하신데 강권하는 것도…….”
홍섬이 약한 모습을 보이자, 박순은 못마땅하다는 듯 크흠, 침음하고서 나섰다.
“전하.”
“우상께서는 무슨 일이오?”
뻔한 얘기나 할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경계어린 물음이었다.
“일의 대소를 감안하면 공사를 전담하게 될 참의에게 설령 녹훈을 하더라도 마냥 과하다고는 못할 것이옵니다.”
“…….”
박순은 선조에게 협조적인 느낌으로 운을 떼었으나, 그것이 진의가 아님은 박순은 물론 선조도 알고 있었다.
박순이 말을 이었다.
“다만 신이 생각건대, 치하하는 것도 좋지만 도리어 부담이 된다면 성급함에 일을 그르치는 형세가 될 것이옵니다.”
“어쩌란 말인가?”
“참의에게 의향을 물어보소서.”
“하!”
선조는 비웃듯 대소했다.
“참의는 본성이 순하고 겸양을 좋아해 자신의 공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한데, 어찌 그에게 의향을 물어보라 대답 뻔한 소리를 한단 말인가? 우상은 지금 나를 기만하려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박순이 다급히 부정했으나 선조는 적대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노기가 굉장히 따가워서, 영의정까지 은근히 나무라며 나섰던 박순조차 얌전히 대오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왕의 마음이 이토록 강건한 상황에서.
사실, 가장 부담스러운 사람은 이순신도 삼의정도 아니었다.
‘이런…….’
대사간 이산해!
앞서 이순신과 약조한 바가 있었다. 무조건 굴포운하에 반대하기로.
서인을 도발해 굴포운하 사업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계락이었으나, 왕이 이처럼 마음을 굳혔다면 사실 서인을 어찌할 필요도 없었다.
대신 신하들의 여론이 뒤숭숭해진 상황이었다.
왕이 딱 굴포운하만 승인하고 끝나면 나았으리라. 굴포운하의 필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어전에 없었으니까.
문제는 이순신이 너무 필요 이상으로 띄워졌다는 거다. 그리고 주목을 받고 공을 세우며 포상을 받는 사람이 있으면, 시기하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것이 불합리한 과정을 거쳐서라면 더더욱!
졸지에 이순신이 조정의 공적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마도 왕의 계략은 이순신을 과도하게 띄워 굴포운하에 이목을 집중시켜, 장차 사업이 성공했을 때 자신을 드높이고 반대로 이순신은 조정에서 철저하게 고립시키는 것이겠지.
우군 없이 끈 떨어진 연이 된 이순신이 선조의 압력을 직격으로 받으면 아무리 강한 힘을 가졌더라도 꼭두각시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대왕과 권신이 힘을 합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비극이다…….’
사실, 이미 제삼당 영수인 이순신이라 조정에서 격리될 가능성은 추호도 없었으나, 이를 모르는 이산해 입장에서는 무리를 해서라도 굴포운하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이 동인에 가담하겠다 약조라도 해주지 않는 한 손해보는 짓이었지만, 그렇다고 대왕이 권신을 부리는 최악의 상황을 감내할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
맞은편에서 이순신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무리한 부탁임을 알고 있었다는 듯, 미안함 섞인 표정. 그러나 흔들림 없는 시선. 해야 할 일을 하라는 독촉.
이순신이 책임 이행을 재촉까지 하는 이 상황을 그대로 방치했다간, 왕의 독주를 용인할 뿐만 아니라 권신에게 원한까지 사게 된다.
결국,
“전하!”
이산해는 반쯤 정신줄을 놓은 상태로 나섰다. 설령 이것이 최선이라도, 반대하는 의견에 과민 반응하는 왕에게 맞선다는 전 제정신으로는 못 할 짓이었다.
그의 등장에, 평서 이산해를 높이 사던 선조는 물론 주변 신하들까지 시선을 돌렸다.
짧은 웅성거림.
선조는 팔걸이를 쳐 주위를 환기하고는 물었다.
“대사간, 무슨 일인가?”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
선조의 눈이 가늘어졌다. 살짝 어좌를 올려다보던 이산해는 서둘러 시선을 깔고 침을 삼켰다.
관직 생활이 길지는 않았으나 오늘날처럼 긴장된 적도 없었던 이산해.
그는 이순신이 이미 자기만의 세력을 갖추고 있음을 알았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짓을 저질렀다.
비극이란 대왕이 부리는 권신을 부리는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 그에게서 펼쳐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