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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13화 (113/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13화

38. 공로 독점 (2)

정철은 나의 방문을 알리고자 의정부 본관, 정본당을 찾았다.

좋은 답이 있었는지 정철은 밝은 얼굴로 나와 나에게 알렸다.

“들어가면 되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달포 동안 밖에 있어서요. 그동안 의정 대신들의 직책이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영의정 이 대감과 좌의정 박 대감이 한 단계씩 내려오시고, 홍 대감이 새로 영의정에 오르셨네.”

그렇다면 영의정은 홍섬, 좌의정은 이탁, 우의정은 박순인가.

전직 의정인 이탁, 박순을 두고도 짬순으로는 막내인 홍섬이 두 사람을 제치고 영의정까지 올라갔다니 약간은 의외다.

우의정과 좌의정을 하나씩 밟아봤으니 이제는 영의정을 한 번 해보라는 배려인가?

“감사합니다. 덕분에 실수하지는 않겠군요.”

“고마우면 다음에 성의를 보이게.”

주당, 아니 주신인 정철이 말하는 성의란 너무나도 뻔한 것이었다.

“기꺼이요.”

“그럼 들어가세.”

정철의 안내를 받자 정본당으로 들어서니, 안쪽 깊숙한 곳에 늘그막 노신 셋이 안쪽에 앉아 있었다.

그들 바깥쪽에는 좌우찬성과 참찬이 앉을 자리들도 배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공석이다. 의정부 전체 회의가 아닌 이상 네 관원은 일반적으로 옆 건물인 협선당(協宣堂)에 있다.

때문에 지금은 비록 세 사람뿐이지만 그들은 이 나라에서 가장 지체 높은 관리 셋이다. 주는 위압감 자체가 공조 당상대청과는 격을 달리했다.

오금이 저린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닐 정도.

하지만 압박감이라면 선조도 한 압박 한다. 나는 부담감을 떨쳐내고서 예를 표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공조참의 이순신이라 합니다.”

이에 입을 연 사람은 중앙의 영의정, 홍섬이었다.

“달포 동안 태안에 내려가 있었지?”

“예.”

“고생 많았군.”

“소관만 고생했겠습니까. 참의가 너무 적극적이라 끌려 나온 일행들도 고생했고, 그렇게 생긴 빈자리로 일감이 늘어난 관리들도 고생했지요.”

“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리길 좋아한다는 평판 그대로군.”

“과대평가로 얼룩진 소관에 대한 평판 중에서 유일한 사실이 아닌가 합니다.”

“하하하…….”

홍섬은 만족스러운 듯 작게 웃자, 나는 정철에게 보고서를 건넸다.

정철은 보고서를 삼의정에게 나아가 바쳤고 세 사람은 시선을 한데 모아 보고서를 검토했다. 방대한 내용이었으나 지금은 요지만 확인하겠다는 듯 종이가 펄럭펄럭 넘어갔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두 사람이 마저 검토할 동안 홍섬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성실하게 작업해두었군.”

“망극할 뿐입니다.”

“하지만 성의와 설득은 별개일세. 전부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 단계에서는 크게 걸리는 것이 둘 있더군.”

“하문하시지요.”

“음.”

홍섬은 짧게 헛기침하곤 물었다.

“내 알기로 굴포에서 좁은 구간은 15리(里)가 채 되지 않는데, 자네가 제출한 계획에 따르면 무려 40리라는, 거의 세 배 길이의 구간을 공사하겠다고 나와있군. 특히 남쪽은 아예 순성(蓴城)에서 시작하고 있네.”

“그렇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

“남북으로 파고든 천수만과 가로림만 모두 안쪽에는 방대한 영역의 뻘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조수 차에 따라 수시로 2장(長) 높이의 물이 차고 빠지니 이쪽으로는 공사할 수가 없었사옵니다.”

“흠…….”

“태종대왕 이후에도 세조대왕, 중종대왕 모두 운하를 시도하였으나 앞선 시도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흔적도 남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사옵니까? 모두 뻘을 파고자 했기 때문이옵니다.”

적어도 태종은 결과물이라도 낸 반면 세조와 중종은 뻘에다 삽질을 하는, 진짜 표현 그대로의 ‘뻘짓’을 하며 시간과 예산만 낭비했다.

그때 등장하는 기록이 한결같다.

땅이 물러서 아무리 파도 다시 무너진다고.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당연한 소리를 한다, 싶었다. 뻘을 파니까 당연히 무너지지. 그럼 돌덩어리처럼 굳건히 버틸 줄 알았나?

“그래서 완전히 우회했다?”

“예.”

“대신 필요한 석회의 양이 최소 삼십만 섬이라고 나오는군.”

“최저한입니다.”

“그래. 최저한이 삼십 만 섬이지.”

필요한 천연재료는 그보다 훨씬 많이 사용된다.

만능분을 배합하는데 들어가는 점토. 그리고 콘크리트를 만드는 과정에서 들어가는 모래. 마지막으로 결과물 부피 중 7할은 차지할 자갈까지.

하지만 이들 천연재료는 태안에서는 너무나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어디서 살 필요도 없이 인력만 제물로 바쳐 공수하면 그만이다.

문제는 석회.

자체의 가치를 떠나 석회는 효율성 높은 산출지가 정해져 있고, 또 무거워서 운송도 어렵다.

“공조의 참의로서 잘 알고 있겠지만, 성 하나를 짓는데 석회가 십만 섬이 조금 안 되게 드네. 물론, 큰 성 기준으로.”

달리 말하며 굴포운하를 짓는데 성 세 개 분의 석회가 들어간다는 뜻.

물론 굴포운하의 가치는 고작 성 세 개로 비빌 레벨이 아니다. 지상의 성을 아무리 지어봐야 태안을 돌아가는 안흥량에서 매 해마다 파손되는 수십 척의 조운선과 만 섬까지 오가는 세곡 상실량을 만회할 수는 없다.

홍섬이 지적하는 바는 과연 석회를 이십만 섬이나 더 써가며 뻘을 우회할 가치가 있겠냐는 거지. 자재만 아니라 건설 기간도 세 배다.

“어찌 소관이 모르겠습니까? 이게 최선입니다.”

“음…….”

홍섬은 나의 단호한 대답에 자신도 놀랐는지 짧게 침음을 흘리곤 물었다.

“참의가 개발한 만능분에 대해서는, 우리도 다른 공조 당상들과 시험을 해보아서 알게 되었는데. 만능분이라는 이름이 과장은 아니더군.”

“감사합니다.”

“뻘에 쓴다면 붕괴를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현장이라곤 추호도 모르는 전형적인 탁상행정이었다.

“만능분, 물론 만능 소리 들을 정도로 대단한 발명입니다. 하지만 지상과 수중은 환경이 완전히 다릅니다.”

“흠…….”

“지상의 운하는 염분이 없는 단물에 노출되고 건설 도중에는 충분히 건조할 수 있습니다. 반해 뻘은 주기적으로 바닷물이 밀려오지요.”

급속경화 시멘트, 수중 시멘트도 아니고 원시적인 시멘트일 뿐인 만능분으로 어찌 제방이나 수로를 만든단 말이냐?

가만히 있는 물도 아니고 파도가 수시로 들어왔다가 나간다. 분명 마르기도 전에 시멘트가 녹아 없어질 터다.

“지상에서 미리 형태를 잡아 굳혀놓고, 뻘을 파낼 때마다 하나씩 심어도 되지 않나?”

“완전히 불가능한 방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조수 차이에 의해 작업시간이 극단적으로 좁고, 절차가 극히 번거롭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해내더라도 결국 만능분이 2장 이상 깊이의 염수에 수시로 노출됩니다. 염분과 압력에 의한 수명 단축은 말할 것도 없고, 시간이 지날수록 수로에 뻘이 조금씩 쌓이는데 어떻게 걷어내야 합니까?”

특히 폭풍이라도 몰아쳐서 해안이 개판이라도 되면, 운하까지 개판이 되는 거다. 뻘 영역에 있는 입출구가 뻘에 파묻힐 터이니.

복구?

가능하겠나.

운하?

뻘짓한 거지.

물론 테트라포트 수만 개를 해안에 쏟아부어 수위를 제어하는 방도도 있다. 하지만 그 짓거리를 하면 석회가 30만 섬이 아니라 300만 섬은 필요할 걸?

홍섬을 상대로 헛소리하는 아이 가르치듯 조곤조곤 반대의견을 때려 박으니, 아무리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영의정이라도 억지를 부릴 수는 없었는지 입을 꾹 닫았다.

“…….”

졸지에 참의만도 못한, 무식쟁이 틀딱으로 전락한 홍섬.

분위기가 무안해지자 좌의정 이탁이 끼어들었다.

“참의는 오래전부터 촉망받아 온 인재이고 또 만능분까지 개발하며 적극적으로 사업에 착수하였으며, 직접 현장까지 조사해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웠소이다. 우리들의 역할은, 이 사람이 생각하기엔 개입이 아니라 판단인 것 같소. 적절한지 아닌지만 봅시다.”

이만한 사람이니 알아서 잘하지 않았겠느냐는 지적이었다.

“……음.”

이탁의 발언에 홍섬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사업이 성공만 한다면, 현직 의정이라는 이유로 본인들까지 공신에 녹권 될 수 있었다.

그뿐인가?

사업이 워낙 크기 때문에 필두는 이순신이라도 자잘히 거들 사람이 많았다. 달리 말하자면 예비 공신이 수백 명은 되는 상황이었다.

이런 마당에 비전문가의 같잖은 훈수로 밥상을 엎었다간 의정 대신이라도 밤길에 칼침 맞는 수가 있었다.

……특히 왕이 이번 사업에 상당히 관심을 드러내고 있음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작 현장 조사에 불과할 뿐인데, 대군을 이끌고 나간 장수 대하듯 수시로 사람을 보내 진행 상황을 물어볼 정도니.

어쩌면 영의정이랍시고 함부로 끼어들 상황이 아닌지도 몰랐다.

“참의, 수고했네.”

“아닙니다.”

“내 당장 드는 의문은 모두 해소되었지만, 국가의 숙원 사업인 만큼 하루아침에 가불가를 정할 수는 없네. 먼저 두 의정과 동벽(東壁), 서벽(西壁)까지 불러 논의를 거쳐 타당성을 엄중하게 가려야지.”

동벽과 서벽은, 의정부 본당에 각기 동쪽과 서쪽 벽이 있는 자리에 앉는다는 이유로 쓰인 좌우찬성, 좌우참찬의 이명이었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결과가 나오면 전하께 상주할 터이니, 참을성 있게 기다리게. 그동안 노고가 많았으니 공조에는 한동안 자네 일정을 배려하라 언질 해 두지.”

“감사합니다. 그럼, 소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가게.”

홍섬이 짧게 배웅하자, 이순신은 인사에 살짝 묵례를 더하고는 의정부를 빠져나갔다.

남은 삼의정은 두터운 보고서를 돌아가며 뒤적였다. 무안하게도, 보고서에는 이미 홍섬이 제기한 의문과 그에 대한 대답까지 적혀 있었다.

마치 자신의 계획에 끼어들 여지는 추호도 주지 않겠다는 듯.

덕분에 홍섬은 자신이 생각도 않았던 온갖 의문과 그에 대한 답을 읽어야 했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전문용어와 숫자들이 늘어나, 책상물림인 홍섬으로서는 점점 더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으로 가고 있었다.

‘설계기준강도? 배합강도? ……이게 뭔?’

영혼이 사차원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현기증을 살짝 느낀 홍섬이 좌우를 조심스레 살펴보니, 이탁과 박순 역시 시선을 돌리며 이해하지 못한 티를 한껏 내고 있었다.

‘이럴 때는.’

홍섬은 보고서를 들며 정철에게 말했다.

“사인, 이 장부를 각 장 별로 쪼개서 가져오게. 내용이 상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알겠습니다.”

정철이 공손히 장부를 받들어 물러나자 홍섬이 덧붙였다.

“좌우찬성과 참찬들 모두 불러오게. 그 친구들도 있어야 진도가 나갈 것 같으니.”

“예.”

정철이 책을 들고 빠져나가자, 연로한 세 사람은 모두 의자에 기댄 채 피로를 삭였다.

고생을 나누면 반. 일곱 등분으로 나누면 칠 분지 일이다. 물론 각 장으로 나누어도 모르는 것은 여전히 모르는 상태지만, 무식한 티를 굳이 남들 앞에서 드러낼 필요는 없잖은가?

각자 집에 들고 가서 연구를 하건, 소귀에 염불을 외건 알아서 할 일이었다.

그리고 홍섬은 무슨 내용이 있건 간에 일단 사업에 동의할 생각이었다. 무작정 반대라도 했다가 어전에서 이순신이 이유라도 묻는다면, 할 말이 없으니까.

이와 똑같은 생각이 마침 좌의정 이탁과 우의정 박순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다른 의정부 대신이 어련히 책임질 것이라 생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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