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12화
38. 공로 독점 (1)
달포 뒤.
도성으로 돌아온 나는 일행들을 해산시키고 저택을 찾았다.
“공자님!”
간만의 방문에 저택 식구들이 나를 반겼다.
“그동안 잘들 지내셨습니까.”
“예, 공자님 존안 보기 부끄러울 정도로 잘 지냈습니다.”
“안 본 사이에 식구들 얼굴에 기름기가 흐르는 걸 보니 과연 잘 지낸 모양입니다. 상전은 달포 꼬박 외지에서 굴렀는데!”
과장해서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저택 식구들이 왁자지껄하게 웃었다.
내가 이런 일에 진심으로 화내지 않음을 잘 알고 있기에 보이는 반응이었다.
“노고 많으셨으니, 보양식을 내오겠습니다.”
“아, 보양식! 좋지요. 하지만 일단은 씻어야겠습니다. 밖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뜨끈한 물로 몸을 지지고 싶군요.”
“아,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저택 식구들이 해산하자 나는 사랑방을 찾아 피로한 몸을 뉘었다.
고작 한 달 조금 넘게 밖에 있었을 뿐이지만, 거의 수 년 만에 귀환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야 온기가 감돌기 시작한 안방이었지만 나는 너무나도 편한 마음으로 휴식할 수 있었다.
자다 깬 다음에는 씻고 특식을 대접받았다.
연포탕!
낙지는 예로부터 익기양혈(益氣養血)이라 하여 기를 더하고 피를 보하는 효능이 있다고 했다. 그게 사실인지 과장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낙지가 맛있다는데는 아무도 이견이 없으리라.
상쾌한 목넘김의 반주를 더하고 마지막으로 배와 생강, 대추를 우려낸 배숙으로 입가심하니 달포의 고생이 싹 씻겨나가는 기분이었다.
배가 부르니 이제 할 일도 없겠다, 꿀잠 한 판 때리고자 이부자리에 드러누우니 극락이 따로 없었다.
“······.”
그리고 다음 날.
한가득 원기충전을 했거늘, 공무가 다가오니 기력이 9할은 빨려 나간 기분이었다.
주말도 없었는데 월요병이라니.
솔직히 선조와 임진왜란만 없으면 진즉 낙향해서 떵떵거리며 살았지. 전직 당상관이다, 돈 많다. 동네에서는 목민관 이상으로 거들먹거릴 수 있는데 이 고생을 왜 하냐?
이게 다 선조와 임진왜란 때문이었다.
‘선조랑 도요토미랑 사이좋게 벼락 맞고 안 뒈지나······.’
하늘도 무심하시지.
나는 고개를 젓고는 관복을 챙겼다. 오늘은 공조 늙은이들에게 무사귀환을 알린 다음, 현장에서 작성한 보고서를 의금부에 제출할 예정이었다.
“출타하십니까?”
을룡이 물었다.
“그래. 넌 마저 쉬지 않고?”
태안으로 출장할 때 을룡이 호위를 자처했다. 고생이야 나와 다르지 않을 텐데, 고작 하룻밤 휴식에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상전의 공사가 다망한데 아랫놈이 쉬는 게 어딨습니까?”
“같잖은 소리를 다 하는구나. 쉬어, 헛소리 하지 말고.”
“저는 괜찮습니다.”
단호한 대답.
나이 좀 먹었다고 책임감이 샘솟는지 갈수록 재미가 없어지는 을룡이었다. 예전처럼 이렇게 무식한 칼잡이 인상은 전혀 아니었는데 말이다.
“유사시에는 네가 나를 지켜야 하는데, 지친 상태로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겠어? 쉬어야 할 때 쉬는 것도 일이야.”
“······알겠습니다.”
그제야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물러나는 을룡이었다.
여튼 재미가 없어요, 사람이.
여자라도 소개해줘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저택을 나섰다.
공조 당상대청을 찾으니 내가 일등이었다. 이제 돌아온 사람인만큼, 업무랄 게 없어 늘어져서 늙은이들을 기다리니 이준민이 먼저 입장했다.
“오!”
이준민은 나를 발견하기 무섭게 감탄을 흘렸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참판 영감. 용케도 제가 없을 동안 직이 갈리지 않았군요.”
“내가 갈리길 바라셨나?”
“그럴 리가요. 어떤 놈팽이 녀석이 어르신 밥그릇 뺏어가지 않아 다행입니다.”
“하하······, 새파란 참의가 참판이 나를 걱정했다니, 이거 자존심이 상하는데?”
“굴포운하 건으로 제가 상전 자리에 올라서 별 수 없으십니다, 하하.”
오만한 소리였으나 이준민에게 거부감은 없었다. 물론 내색만 하지 않았을 뿐 불쾌한 소리일 수도 있었기에, 나는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제대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참판 영감. 걱정해주신 덕분에 다치지 않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아니야, 내가 무얼 했다고.”
“그동안 강녕히 지내셨습니까?”
“나야 잘 지냈지. 나야말로 참의가 잘 지냈나 궁금하군. 공무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불편하게 구는 사람은 없었나?”
“없었습니다.”
귀찮은 일은 있었지만.
내가 조정에서 워낙 크게 주목을 받다 보니, 현장인 태안까지 가는 과정에서 고을마다 접대를 받아야 했다.
잔칫상을 쫙 깔아두고 사람까지 불렀다는데 어찌 매몰차게 거절하겠나. 딴에는 성의인지라, 성이라도 냈다간 적이 생길 수 있어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돌아올 때는 이러지 말라고 확약을 받아두어 나았지.
그것만 제외한다면 불편한 일은 없었다.
“다행이로군. 태안 군수는 어떻던가?”
“아는 사람입니까?”
“알다 뿐인가. 외숙이 가장 아끼던 제자가 바로 그 친구였는데.”
“아, 그래요?”
“허리춤에 칼을 차고 다니지?”
“예. 예전부터 그랬던 사람이군요. 남명 선생을 욕보이는 것 같아 죄송한 말이지만, 처음 봤을 때는 미친놈인 줄 알았습니다.”
공공연히 칼을 차고서 돌아다녔으니까.
나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감을 뿜어내는 태안 군수의 모습에 미친놈인가, 하는 생각이 안 날 수가 없었다.
“하하하하······.”
참판은 이해한다는 듯 웃고는 답했다.
“경의검(敬義劍)이라고. 남명 선생이 아끼던 제자에게 물려준 것이지.”
“사연이 있었군요. 보통 유품은 아닌데, 남명 선생이 태안 군수를 무척이나 아꼈나봅니다.”
“그 친구가 남명 선생한테는 아들이나 다름없었지.”
“친아들은 입도 아니랍니까?”
“하나 있었는데 요절했거든.”
상실감에 수제자를 자식처럼 아껴 유품까지 남겨주었구나.
“태안 군수는 어떤 사람입니까?”
“올곧은 사람이지. 스승 성격을 똑 닮았어. 입조심을 안 해!”
“대신 사람은 진국이더군요.”
“그것도 스승을 똑 닮았지.”
미친놈인가, 싶었던 첫인상과는 달리 태안 군수는 공사 구분이 깔끔하여 협조 외의 일로는 붙들지 않았다.
대신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는 직접 나서가며 적극적으로 보조를 해주었기에 현장 조사가 빠르게 진전될 수 있었다.
“그런데 관직을 내려놓는다니 아쉽게 됐습니다.”
마음에 들어 살살 영입도 시도했으나 정인홍은 사세가 더러워 관리 노릇은 여기서 끝낼 거라며 못을 박았다.
임기가 다하는 대로 낙향해 스승님 묘나 지키겠다던가.
“그 친구가?”
“예.”
“허어······.”
이준민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쳤다.
“아까운 사람인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곁에 두면 든든할 텐데.
제가 관리 노릇이 싫다니 어찌 강요하겠나? 나 같아도 선조와 도요토미가 벼락만 맞아 뒤지면 당장 낙향할 텐데.
이후 이준민과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고 있으니 판서 박영준이 찾아왔다.
“오!”
박영준의 첫 반응도 이준민과 다르지 않았다.
간만에 나를 마주한 박영준은, 체통에 연연하는 대신 인사하고자 일어선 나를 껴안았다.
“별고 없었나?”
“덕분에 마음고생 없이 몸만 고생하고서 돌아왔습니다.”
“잘됐군. 춘부장께 인사는 드렸고?”
“일행이 있는데 어떻게 돌아오는 길이라고 멋대로 들르겠습니까. 찾아가더라도 공무는 끝난 다음에 찾아가서 인사를 드려야죠.”
“에이, 이 사람. 원칙도 좋지만 자네 춘부장이 얼마나 걱정하고 기대했겠나? 간만에 귀한 아들 얼굴 보나 싶었을 텐데.”
“어찌 저라고 모르겠습니까. 의정부 어르신들 설득하는 대로 돌아가 부모님을 뵐 생각입니다.”
“그러게.”
박영준과도 잡담을 나누니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풍수학 제조랍시고 데려온 녀석이 측량은 안 하고 ‘물을 다스리는 일은 상서롭지 못하다’ 따위의 개소리나 한 일의 투정을 마지막으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제물로 바치려다 말았습니다. ······그럼.”
“어디 가시게?”
박영준이 놀라며 물었다.
“무사귀환을 보고했으니 의정부 들러야지요.”
“아.”
언제까지고 여기서 웃고 떠들 수만은 없었다. 나의 공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가 도와줄 건 없나?”
“아직은요. 필요할 때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네.”
박영준과 이준민과 짧게 인사를 나눈 뒤, 나는 의정부를 나섰다. 품에는 보고서가 신줏단지처럼 안겨 있었다.
의정부는 공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전부 육조거리 안이라, 잠깐 걷는 정도로 의정부에 입성할 수 있었다.
“흠.”
의정부 내부는 여타 관청에 비해 독특하다. 사각형 형태의 부지 안에, 사선으로 기울어진 세 개의 커다란 전각이 줄지어 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뜰이 마름모꼴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이유? 모른다. 물론 철학적인 이유야 있겠지. 단지 알 바가 아닐 뿐이다.
삼의정이 업무를 보는 중심의 정본당(政本堂)의 앞에 서니, 인기척을 느꼈는지 관리 하나가 나와 맞아주었다.
“참의.”
“사인.”
잘 아는 사람이었다.
의정부 사인 정철.
그는 나의 방문이 예상외였는지, 조금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로 의정부를 찾으셨나?”
“당연히 어르신들께 인사드리고 태안에서 조사한 것을 보고하고자 왔지요. 주된 이유는 간만에 정 사인 존안을 보기 위함이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실없는 사람 같으니······.”
과연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으나 기분은 좋았는지 희미하게 웃는 정철이었다.
그가 지난번 나를 서인에 영입하려 들었던 자리에서, 당색이 무척이나 진해져 냉정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 모습에 일부러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래서 나를 불편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으나 딱히 나를 경계한다거나 불편하게 여기는 모습은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속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일단 내가 동인에 가담하지는 않았다는 점, 그리고 내 굴포운하 사업에 대해 동인 영수인 이산해가 무작정 반대하게 되어있다는 점에서 정철의 속내가 어떻건 나를 배격할 수는 없을 터였다.
동인과 적대하려면 내가 주도하는 굴포운하 사업에 동의해야 하거든. 대외적으로는 정철 역시 나를 지지하는 그림이 나올 수밖에 없다.
“잠시만 기다리게. 어르신들께 의향을 물어볼 터이니.”
“그러십시오.”
나는 발을 돌리는 정철을 금세 쫓아, 가까운 거리에서 속삭이듯 말했다.
“좋게 말해주세요.”
“응? 어련히 알아서 좋게 말하지 않을까. 게다가 자네가 하는 일은 큰 사업인걸. 내가 무어라 하건 대감들은 일단 자네 보고를 받을 걸세.”
선조가 명했던 절차이기도 했다.
“아, 그게. 다름이 아니고.”
“······?”
“흘려들은 바로는 젊은 관리들이 초유의 대공사에 내심 불만이 많다는 말을 들어서요.”
젊은 관리들.
사실상 동인을 지칭하는 대명사나 다름 없었다. 서인에도 젊은 관리들은 많았으나, 비교적 평균 연배가 높았으므로.
“그, 그런가?”
정철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근래 떠오른 굴포운하는 분명 커다란 논란이었지만 당색에 따라 옳고 그름이 나뉘는 사안도,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인들 중에서도 찬반이 갈리고 동인 사이에서도 찬반이 갈린다.
그런데 갑자기 동인들이 굴포운하에 반대한다니, 이순신이 바깥에서 달포 내내 굴렀을 동안 도성을 지켰을 정철로서는 의외일 수밖에.
하지만 당색에 물들어 편협한 사고를 가진 정철은 깊게 생각할 필요도, 그러야 할 이유도 느끼지 못했다.
동인이 반대한다?
그렇다면 서인인 그가 할 행동은 정해져 있었다.
“알겠네. 내 최대한 어르신들께 잘 말해보지.”
진지한 얼굴로 아주 호언장담을 하는 정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