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11화
37. 어미새 (3)
공조에서도 한 차례 선보였던 시멘트.
하지만 양놈들 언어로 시멘트, 시멘트, 해봐야 조선 사람들에게는 정체불명이라, 나는 그럴싸한 이름을 지어주었다.
“만능분이라 하옵니다.”
“만능분이라.”
선조는 가당찮다는 듯 코웃음을 흘렸다.
겉보기엔 그저 회색의 가루일 뿐이다. 만능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는 외향이었다.
“그래, 만능분으로 어찌 하겠다는 말인가?”
“이 만능분을 물에 섞으면 두 시진이 못 되어 단단하게 굳사옵니다. 그 굳기가 여타 돌과 다를 바 없는데, 결정적인 점은 물에 섞어 반죽이 된 상태에서는 자유롭게 성형을 할 수 있다는 것이옵니다.”
“흐음…….”
선조는 만능분이 심심한 외양과는 달리 신묘한 물건임을 직감했다.
자연재료의 한계 중 하나가 바로 성형의 어려움이기 때문에.
돌처럼 단단한 녀석을 원하는 형태로 빚어낼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이점이었다. 물론, 해당 장점을 가진 건축자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석회와 비슷하군.”
“전하의 안목대로, 과연 주재료는 석회이옵니다.”
“……그렇다면 무슨 이점이 있단 말인가? 석회에 불필요한 작업을 해서 쓸 바에야, 차라리 석회 자체를 이용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석회는 석회석을 구워 일일이 가마에서 구워야만 얻을 수 있는, 귀중한 것이옵니다.”
“누가 모르는 줄 아느냐?”
“만능분의 또 다른 장점은 석회를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는 데 있사옵니다. 많아도 1, 2할 정도가 되지 않을는지.”
“……흠.”
최소 다섯 배 이상의 뻥튀기.
시멘트 자체의 석회 비중은 낮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시멘트에 점토가 들어가며, 쓸 때는 모래를 더한다.
또 베이스로 대량의 자갈을 사용하기 때문에 결과물인 콘크리트에서 석회의 비중은 낮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석회가 상당히 절감되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운하를 완성하는데 들어가는 석회의 양은 절대 적을 수가 없사옵니다. 하오나 아조는 석회를 구하기가 어렵지 않은 만큼, 산지에서 대량으로 만들어 수송한다면 운하를 완성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으며, 또한 한 번 굳힌 만능분은 돌과 다를 바 없어 두고두고 공사를 이어나갈 수 있어 의지만 있다면 반드시 끝을 볼 수 있사옵니다.”
선조는 턱을 살살 쓰다듬었다.
처음 굴포운하 소리를 들었을 때는 공조판서가 갈 때가 되어 헛소리나 하는 줄 알았으나, 이순신의 설명이 더해지자 제법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만능분의 존재.
기능하는 방식은 석회와 크게 다르지 않으나, 석회를 몇 배나 뻥튀기할 수 있다는 점이 결정적인 차이점이자 장점이었다.
공사에 인력을 동원하는 것도 문제지만 오직 사람뿐인 조선에서는, 인력 이상으로 와닿는 것이 예산이었으니까.
‘한 번 맡겨봐야 하나.’
하지만 굴포운하를 성사시킬, 무엇보다도 가장 큰 동기는 바로 선조의 공명심이었다.
본래 왕이 될 수 없는 환경에서 얻어걸리듯 왕이 되어버린 선조였다.
물론 이미 어좌에 오른 만큼, 그를 왕이 아닌 다른 존재로 인식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스스로는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왕 노릇과 권력에 선대왕 누구보다도 집착하고 있는 선조였다.
만일 자신이 조선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태조대왕-태종대왕-세종대왕 세 분께서도 해내지 못한 굴포운하를 성공시킨다면 자신이 왕의 재목임을 당당하게 인정할 수 있었다.
만족감뿐인가?
치적 하나하나가 자신이 어좌에 있어야 할 정당성이 된다.
무능한 주제에 원하는 바가 많은 사람은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반대로, 왕에게 능력만 있다면 곁가지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그래서 명 태조 주원장이 십만이나 되는 공신과 그 가족들을 모조리 학살했음에도, 명군으로 칭송받는 게 아니겠나?
전조 고려는 물론 조선의 황금기 군주들도 이뤄내지 못한 굴포운하의 완성은 실로 건국에 준하는 압도적인 치적이다.
만일 성사만 된다면 자신은 주원장 못지않은 권위와 권력을 누리리라!
“좋다.”
정색할 때는 언제고 금세 얼굴을 환하게 바꾼 선조였다.
“하오시면…….”
“내 가만히 들어보니 굴포운하가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진정으로 성사될 수 있음을 알겠다. 과거의 선대왕들은 물론이고 전조의 왕들도 애썼으나 차마 이루지 못한 일이라 오래전부터 과업을 완수하겠다, 의식은 하고 있었으나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공조의 대신들이 간하고 참의가 방도를 내었으니 실로 기쁘다.”
박영준이 처음 굴포운하에 대해 간하였을 때 나온 반응을 보면,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었던 것 같지만.
“망극하옵나이다.”
“공조에서는 이미 자세한 논의가 이뤄진 것 같으나, 나나 다른 관아의 신하들은 아직 상세한 바를 알지 못한다. 그러니 참의는 먼저 의정부의 대신들에게 물어 검토를 받으라. 의정부의 대신들이 합당하다 아뢴다면 친히 사업을 승인하겠다.”
“망극하옵나이다.”
“물러가라.”
이순신은 꾸벅 허리를 숙이곤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이후 잡다한 논의가 오갔으나 앞선 굴포운하의 건이 큰 인상을 주어서인지, 좀처럼 분위기가 진중해지질 못했다.
결국 선조는 회의를 파한 뒤 신하들을 각자의 자리로 보냈다.
그리고 어전이 휑해진 지금.
‘이순신이라면 의정부 늙은이들을 설득하는데 어려움이 없겠지.’
사소한 관문이니 가볍게 넘으리라. 애초에 의정부를 거치게 한 것도 만일을 대비하기 위함일 뿐이다.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이순신 외에도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책임의 소재를 가릴 필요가 없었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승인할 수도 있었다.
‘일이 궤도에 오르면 최대한 광고를 해야겠군.’
굴포운하의 중요성, 중대함을 모르는 이는 없다. 성공해낸다면 분명 극찬과 함께 막대한 지지를 받으리라.
작지 않은 보상이었으나 지금과 같은 일은 앞으로 흔치 않을 터였다. 그리고 처음 터뜨릴 때나 반응이 있지, 성과가 연이으면 사람들의 반응 역시 시큰둥하게 변하게 마련이었다.
그러니 이번에 최대한 파격적인 인상을 줘야 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극적인 효과를 줄 수 있었다. 두 번 다시 없을 공로라 홍보해도 좋다. 말은 나중에라도 바꿀 수 있으니.
‘이순신도 많이 띄워지겠지만…….’
굴포운하를 부각하는 만큼, 이를 주도하는 이순신 역시 부각 될 수밖에 없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이전처럼 놈의 존재감을 마냥 불편하게 여기기에는, 바치는 공물이 너무나도 달콤했다. 자신을 대업을 이룩한 왕으로 만들어주겠다는데 그깟 오만함이야 조금은 못 받아주겠나.
마음에 안 들면 나중에라도 찍어내면 그만이다.
자신이 조선의 주원장이 된 다음에는 이순신만이 아니라, 조정 전체가 감히 자신에게 항거하지 못하게 될 터이니.
‘조정이 깜짝 놀랄 정도로 판을 키워볼까.’
음흉한 미소를 짓는 선조였다.
* * *
“솔직히 말해, 전하께서 워낙 경계가 심하셔서 일이 성사되지 않을 줄 알았네.”
공조로 돌아와, 박영준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물론 굴포운하 운운은 초장부터 뺨 맞을 소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왕의 경계는 거의 적대적인 수준이었다.
“다 판서께서 강권하신 덕분입니다. 시의적절하게 참판께서도 나서주신 덕이고요.”
선조가 마치 도끼로 찍어대듯 박영준을 찍어댔으나, 그럼에도 박영준은 물러서지 않고 할 말을 다 했다.
나아가 참판 이준민까지 적절한 시점에서 끼어들어 마침내 선조에게 발언의 허락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만일 혼자 나서야 했다면, 특히 나에게 경계가 심한 선조에게 어떻게 운을 띄워야 할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육조판서 대신이 나서도 지랄을 하는데.
하지만 공을 선선히 나에게 양보하는 두 사람이었다.
“만일 참의가 개발한 만능분이 아니었다면 어심을 돌릴 수는 없었겠지.”
“맞네. 설령…… 이 사람과 판서 대감께서 운을 띄웠어도 자네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일을 성사시켰겠나.”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요. 이번 일은 저만 아니라 판서와 참판 대감 세 사람 중 한 사람만 없었어도 성사될 수 없었을 겁니다.”
나 역시 공을 다시 두 사람에게 돌리자, 박영준과 이준민의 얼굴이 만족으로 짙게 물들었다.
나의 적극적인 어프로치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 나는 법 아니겠나? 함께 일한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뜻을 함께하면서 누구보다도 가까워졌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나의 위치도 재조정됐다.
공조의 당상관 막내인 참의를 지내면서도, 두 사람에게 해준 게 많으니 자연스럽게 비등하면서도 내가 약간은 우위에 섰다.
대신 고생이 늘었지만.
“어전에서는 반응이 좋았지만, 인상만 좋게 주었다뿐이지 의정들을 설득하려면 고작 만능분의 존재로는 불가능하겠지요.”
“음, 확실히.”
수로의 도안과 건설 계획을 상세하게 설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랏일이란 고작 ‘비장의 한 수’만으로 알아서 돌아가는 게 아니니까.
“그런 차원에서 현장 답사를 해야겠습니다.”
“직접?”
“제가 안 가면 누가 가려고요? 대감께서요?”
씩 웃으며 물으니, 박영준은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참의 뜻대로 하시게, 늙은이들 괴롭히지 말고.”
태안을 직접 방문하는 것도 일이지만 거기서 측량, 운하 설계까지 한다는 건 보통 노고가 아니었다. 이순신에게 받아먹기만 한 입장인 박영준에겐 더더욱.
이건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계획이 머리에 있는 이순신이 최적임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참판 이준민이 덧붙였다.
“데려갈 사람은 정해두었나?”
“아직은요. 이제야 어전에서 말이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일단 선공감과 상의원에서 쓸만한 사람 하나씩 골라서 데려가야겠다, 생각은 해두고 있습니다.”
선공감은 토목 사업을 전담하는 관청이고 상의원은 궁궐의 재산을 감독한다. 실전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자재를 수급하려면 두 기관의 협조가 필요했다.
“그렇군.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주어야 하는데, 참판으로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니 참의에게 미안하네.”
“아니요! 미안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저를 지지해주시는 것만으로도 든든합니다.”
박영준과 이준민은 나의 지지자들 중에서도 흔치 않은 고관.
최근 관직을 내려놓았던 이이가 황해감사로 영전해, 고관의 반열에 들었으나 어디까지나 지방직에 불과하다. 즉, 조정에서의 영향력은 거의 없다.
주저하던 류성룡과 김성일도 최근 나의 편이 되었으나 도성에서 두 사람처럼 큰 힘이 되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솔직히 나 같은 놈은 주변이 든든하지 않으면 태클이 많거든.
좌의정 오겸을 찍어낸 시점에서 눈치 빠른 사람은 나의 위험성을 깨달았지만, 대체로 남을 시기하고 모함하는 자들은 똑똑해서가 아니라 멍청해서 그러는 거니까.
주변에 힘 있는 아군이 많이 필요했다.
특히나 굴포운하 같은 초대규모 사업의 책임자가 될 경우에는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