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10화
37. 어미새 (2)
선조는 어이가 없어 제신들을 내려보았다.
진심인가?
선조는 생각했다.
‘굴포운하라니.’
터무니없는 소리다. 국초, 태종 치세에도 전력을 다하였으나 처참한 실패로 끝난 사업이 바로 굴포운하다.
나아가 누구도 굴포운하를 언급하지 않게 됐다. 단지 처참한 실패로 끝나서만이 아니다.
당시와 비교해 지금의 조선은 대규모 사업을 일으키기에 유리한 점이 하나도 없었다. 관리들의 녹봉과 비축미 총액만 보아도 단적으로 드러나지 않나?
국초와 비교해 절반 수준으로 떨어진 녹봉은 자체도 비참했으나, 제도의 변화까지 감안하면 차이는 훨씬 더 크다.
태종이 처음 조선을 창건했을 때 관리들은 녹봉 외에도 과전(科田)을 받았다. 관리들이 대토지와 함께 유의미한 수준의 녹봉을 받을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최근은 어떠한가.
과전의 혜택을 축소한 직전마저 분급이 없어진 지 오래였다. 녹봉 역시 가진 땅이 없는 자들이 굶어 죽지나 않을 정도에 불과했다.
‘검약을 숭상하는 조선이라지만 일련의 변화는 개혁이 아닌 쇠락의 결과일 뿐이니.’
비축미는 국초에 비해 반의반으로 줄었다.
그마저도 태반은 케케묵어 국책의 대금으로는 도저히 쓰지 못하고, 재해 지역에서 먹을 게 없어 아사하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나 쓰일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굴포운하라니.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공판.”
선조가 운을 뗐다.
“그대가 사비를 지출해 율도의 아전들에게 숙소를 지어주었음을 아오.”
“예.”
“일개 신하에 불과한 몸으로 나라를 대신해 나서주어 귀감이 되니 내 공판에 대한 평가를 달리한 참이었는데 지금 하는 말을 들어보니 재고를 해야겠소이다.”
“하오나.”
선조는 박영준의 말을 기다리지 않았다.
“공판이 먼저 나에게 청하기를, 율도의 환경이 열악하니 아전들에게 쓸만한 숙소를 지어주자 하였지. 그때 내가 응하지 못한 이유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통감하지 못해서가 아니었소.”
“예, 아옵니다.”
“알면서 굴포운하라니 오죽 공조의 판서로서 이뤄낼 일이 없으면 굴포운하를 언급한다는 말인가? 참으로 실망스럽소이다.”
게다가 선조가 아는 박영준은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처신의 달인! 박영준에 대한 세간의 평가다. 좋은 소리라곤 못 하겠지만 객관적인 관점에서는 유능의 극치다.
훈구척신이 조정을 잡았던 시절,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항거하지 않았던 사람은 사림의 세상이 되자 차례차례 찍혀 나갔다.
하지만 박영준만은 판서 노릇을 전전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알음알음 재산까지 모았으니, 입으로는 욕하면서도 내심 자신도 박영준처럼 기술 좋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자들이 즐비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굴포운하라는 개소리를 하다니.’
세간에서는 사람이 갈 때가 되면 변한다고들 한다.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고도 하고.
보아하니 박영준이 그런 경우인 것 같았다. 평소답지 않은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율도의 아전 찌꺼기들에게 숙소를 지어주겠다고 할 때도 슬슬 갈 때 됐나 싶었지만.
‘뒈지기 전에 체직 시켜야겠군.’
현직 관리의 죽음은 선조 그에게는 만족스런 소식이었지만 외부의 시선을 감안하면 희소식이라 할 수 없었다.
사직소를 거듭 반려했더니 눈치 없이 픽 죽어버린 우참찬 오상의 일도 있고.
옛 일을 떠올린 선조가 경멸어린 시선을 흘렸으나, 박영준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이번에는 굴포운하를 반드시 성사할 비책이 있사옵니다.”
“하!”
선조는 가당찮다는 듯 웃고는 말했다.
“굴포운하 같은 일에는, ‘반드시’처럼 신뢰를 주기 어려운 표현도 없소이다. 무슨 바람이 불어 갑자기 굴포운하를 입에 담는지는 모르겠으나…….”
“과장이 아니옵니다.”
감히 왕의 말까지 끊어가며 억지를 부리는 박영준이었다.
-쾅!
어좌의 팔걸이가 시끄럽게 울었다. 조소와 경멸로나마 받아주던 선조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감히 왕의 말을 끊는 것은 불충이었으므로. 차차 가늘어지는 시선에는 가증스러운 존재를 바라보는 적의가 담겼다.
박영준도 결국은 여기까지인가, 하고.
이때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전하, 일단 들어보시옵소서.”
“……공조참판.”
이준민. 조심스럽고 진중한 자다. 감히 왕에게 ‘들어보라’는 식의 건방진 소리를 해대는 사람이 아니었다.
조정에 떼죽음의 바람이라도 부는 건가?
박영준에 이어 이준민까지 평소 그들답지 않은 추태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일면으로는, 호기심도 살짝 들었다.
늙은이들이 단체로 노망이라도 난 게 아닌 이상 어떻게 합을 맞춰가며 변덕을 부린단 말인가?
어쩌면…….
“참의 이순신이 실로 놀랄 만한 비책을 냈사옵니다.”
아아, 그래.
마침 이순신을 떠올리려던 선조는 예상 그대로의 발언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순신이 누구인가.
놈은 자신에게서 여러 평가를 거쳐왔다.
처음에는 순진한 바보에 지나지 않았다.
도성의 거지들을 거두어, 먹이고 입히며 심지어 집도 지어주고 세금까지 대납했다. 대가리 속에 꽃밭만 펼쳐진 멍청이 이외로는 표현할 수단도 많지 않았다.
선조는 이 바보를 곁에 두어 장차 장기말로 쓰고자 했다. 빌어먹게도 믿을 놈 하나 없는 이 조정에서 한 놈 쯤은 마음 놓고 써먹을 수 있기를 바랬다.
하지만 이순신은 그리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었다.
보다 중히 쓰고자 조정으로 부르자 거절한 적도 있고, 대과 전시에서 어심을 농락한 적도 있었다. 실로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놈이 사직한 뒤에 (인정하기 싫지만) 상실감마저 들었던 건, 재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조용히 지내나 싶더니.’
선조는 뒤편에 자리한 이순신을 바라보고는 콧바람을 흥, 내쉬었다. 하지만 놈이 무슨 짓을 하겠다고 설칠 때마다 소기의 성과가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말이나 해보라.”
선조가 건성으로 발언을 윤허하자, 박영준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시선이 향한 곳은 공조참의 이순신이었다.
운은 설령 박영준이 떼더라도 설명은 이순신이 해야 하는 것.
공을 몰아주는 것과도 같았으나 이미 받아먹은 바가 있는 박영준은 아쉽지 않았다.
오히려 처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로서는, 선조의 적의까지 담긴 반응을 의식해 차라리 이순신이 나서주는 것을 고맙게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참의.”
“예.”
“말씀드리게.”
“알겠습니다.”
공조판서 박영준과 공조참판 이준민이 옆으로 비켜서자, 이순신이 대오를 뚫고 나와 어전에 섰다.
“신 공조참의 이순신, 주상 전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
발언의 기회를 주어서?
선조로서는 알 바 아니었다. 그가 굴포운하라는 터무니없는 사안에 대한 잡설을 용인한 이유는 대자비를 발휘해서가 아니라, 호기심 때문이었으니.
그는 손을 가로저었다.
“되었다. 어찌 굴포운하를 성사할 것인지나 말이나 해보라. 만일 내가 듣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면, 감히 조정을 어지럽히고 무의미한 논의로 내 귀를 어지럽힌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선조는 들어나 보겠다는 듯 팔짱을 꼈고, 좌우에 시립한 대신들 역시 귀를 활짝 열었다.
이순신이라는 이름 세 글자에 호기심이 동하는 건 비단 선조만이 아니었으니.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과거 태종대왕께서 일으키신 굴포운하 사업은 비록 끝은 맺었으나 성과가 비루하여 오늘날에는 흔적도 남지 않았고 세간의 사람들은 태종대왕의 유일한 과오라 평하는 지경에 이르렀사옵니다.”
“그 과오를 나에게도 뒤집어씌우겠다는 생각은 아니겠지, 참의.”
“아니옵나이다.”
선조가 빈정대자, 이순신은 단호하게 부정하고 말을 이었다.
“신이 옛일을 돌이켜보니 사업은 옳았으나 다만 한계에 부닥쳐 실패했을 뿐, 방도가 틀린 것은 아니었사옵니다.”
“무슨 한계를 말하는 건가? 당대가 오늘날보다 못한 것이 있단 말인가?”
“태종대왕의 치세로부터 백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발전이 없다면 선대왕들께 죄짓는 말이 아니겠사옵니까.”
-쾅!
팔짱을 끼고 있던 선조가 순식간에 어좌의 팔걸이를 내리쳤다.
물론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굴포운하 운운에, 마찬가지로 좋게 생각하지 않고 있던 이순신이라 두고두고 태클을 걸었던 선조였으나 갑자기 들어온 반격이 실로 매서웠다.
대답이 그래서야 마치 선조 자신이 선대의 무능을 고발이라도 한 모양새였다.
“참의는 나를 농락이라도 할 셈인가!”
“아니옵나이다. 어찌 신하로서 감히 주인 된 자를 업신여길 수 있겠사옵니까?”
“그렇다면 오만한 대답의 진의가 무엇인가?”
“전하께서는 공손함이 과하여 백여 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전대와 비교해 이뤄낸 바가 없음을 말씀하시지만, 실상은 막대한 발전을 이룩하여 태평성대가 성큼 가까워졌으니 이를 말씀드린 것일 뿐이옵니다. 비록 태도가 불순할 수는 있겠지만 예가 과하셔서 말씀드린 것일 뿐, 어찌 진의라는 것이 따로 있겠사옵니까?”
“…….”
퍽, 때려놓고는 이게 다 네가 너무 공손하기 때문이라며 금칠을 하는 이순신이었다.
그야말로 병 주고 약을 주는 셈이었지만 선조로서는 선뜻 부인할 수 없었다. ‘아닌데? 나는 싸가지 없는 미친놈이고 방금 했던 말은 단지 너 기분 나쁘라고 끼어들었던 건데?’라고 할 수도 없으니.
“지금 참의가 나온 이유는 나의 공손함이 과함을 지적하기 위함인가?”
“아니옵나이다.”
“그렇다면 본분을 다하라!”
“예.”
선조는 흠흠, 헛기침을 몇 번 흘리고는 다시 팔짱을 꼈다.
“수로를 내고자 한다면 땅을 파거나, 제방을 쌓아서 벽을 올려야하옵니다. 그러나 태안은 조금만 땅을 파도 암반이 나오기 때문에, 땅을 판다는 것은 선택지가 될 수 없사옵니다.”
“…….”
“그러나 제방을 쌓는 것이 쉬운 것도 아니옵니다. 방대한 길이에 자갈과 토사로 수로를 내어야 하는데, 깊고 넓게 할수록 일손이 엄청나게 들고 보수 역시 힘들어지기 때문이옵니다.”
“잘 아는군.”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와는 달리 선조와 신하들에겐 기대심이 솟았는데, 맹점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면 대안도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신은 자갈과 토사의 한계를 철저하게 극복할 방도를 내었사옵니다. 윤허만 해주신다면 직접 보여드리고자 하옵니다.”
“직접 보이겠다? 준비를 했다는 말인가.”
“예.”
“어떻게 보이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한 번 보여보라.”
윤허가 떨어지자, 미리 언질을 받았는지 근정전 대문이 활짝 열렸다. 그와 함께 등장하는 손수레.
드르르륵, 하고 바퀴 굴러가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대신들 사이를 손수레가 가로질렀다.
상판에 놓인 것은 한 무더기의 회색 가루와, 그것을 재료로 삼은 벽돌이었다.
“……무엇인가?”
뭐긴, 시멘트지.
일대 혁명을 일으킬 위대한 건축 소재의 등장이었으나, 까막눈인 왕과 신하들의 시선에는 불신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