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08화
36. 시간을 마시는 새 (3)
“하하하하…….”
내가 웃자, 이산해가 물었다.
“무엇이 그리 우스우신가?”
이산해는 우려를 표했다.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 없다고. 단기필마로는 어떠한 꿈도 이룩할 수 없다고.
그러니 자신과 손을 잡아 동인의 영수가 되어 권력을 잡고 원대한 꿈을 펼치라고.
거기에 대뜸 웃음을 터뜨리니 이산해로서는 불쾌하면서도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까지 우스운 소리를 했나 싶어서.
내가 답했다.
“아아, 시간이 참.”
“……?”
“독하군요. 시간이라는 게. 형님들께서 새파란 꼬맹이를 중간에 앉혀두고 미소와 농을 나누었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나와 나의 지인들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이이, 정철, 이산해……. 모두 나를 아껴주었던 사람이었다. 그 흔적은 여전히 나의 저택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이의 구도장원공 붓.
정철의 서안과 문방사우.
이산해의 해설지.
하지만 세월이 흘러 나는 형님들과 동등한 관계가 되었고 형님들은 당색의 차이로 서로 거리를 두고 있었다.
변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보라. 세월의 독기가 이렇게 세다.
“크흠, 흠.”
이산해는 짧게 헛기침하고는 말했다.
“많은 게 변했네. 세상은 시시각각으로 변하지. 거기에 맞추지 않으면 도태될 뿐이야. 언제까지고 철부지로만 남아 있을 수는 없네.”
“비극이로군요.”
“비극이라.”
이산해는 음미하듯 중얼거리곤, 말을 이었다.
“참의가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할 생각이 없다면 굳이 강요하지는 않겠네.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등을 돌리는 일은 스스로에게도 가혹한 짓이지. 특히 자네 같은 사람에게는 더더욱.”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신.”
“…….”
“반대편을 향해서도 똑같은 태도를 보여야겠지.”
중립을 지키라는 말이었다.
나는 이산해에게 적도 아니지만 아군도 아닌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적이 아니라는 것보다 아군이 아님을 더 크게 인식한다. ‘여차할 때 내 편이 되어줄 자’보다는, ‘여차하면 적에게 붙을 수 있는 자’가 더 와 닿는다.
이산해가 우려하는 바는 바로 그것이었다. 중립이란 당장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 중립을 원해도, 언제 약해져서 특정 세력에 붙을지 몰랐다.
“참의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조정에서 존재감이 큰 사람이네. 인망도 두텁고 성품이 좋으며, 결정적으로 능력까지 대단하니까.”
“…….”
“그런 사람이 나의 편이 되어주지 않겠다는 건, 솔직히 말해서 기분 좋은 일은 아니네. 하지만 참의의 성향을 알면서도 내가 강요를 한다면 도리어 참의에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겠지.”
의외의 섬세함이었다.
이산해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자네가…… 늙은이들 편에 선다면 내가 어떤 기분이 들겠나?”
“이해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걱정하시는지도요.”
“그렇다면 다행이로군.”
이산해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이해했다면 됐네. 참의는 남을 배신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마음 편히 믿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영감께서 우려하시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성을 걸고 약조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래.”
나의 호언장담에 이산해는 안도한 표정을 보여주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산해는 내가 혹시라도, 나중에라도 서인에 가담하는 경우를 우려하고 있었지만 그럴 가능성은 추호도 없었다.
왜냐?
나는 이미 제삼당 영수니까. 이 멀쩡한 자리를 놔두고 내가 어디를 간단 말인가. 이산해의 걱정이란 그가 느끼는 중요성과는 별개로, 하찮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여전히 착각에 빠져 있다면, 굳이 이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대신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부탁? ……으음.”
이산해는 짧게 침음을 흘리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엇을 원하시는가? 들어보고 내 합당하다는 생각이 들면 도움을 주겠다 약조하겠네.”
“감사합니다.”
“아니, 감사할 것까지야. 아직 확정된 건 없네.”
“들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서 그렇습니다.”
“큼, 크흐흠…….”
이산해는 엎드려 절 받기가 민망했는지 헛기침을 흘렸다. 그래도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 없는 듯 했다.
“말이나 하게.”
“사실은.”
“사실은?”
“이 사람이 꾸미고 있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일을 꾸민다는 소리에 이산해의 눈이 반짝였다. 혹시라도 내가 대단한 음모라도 설계한 줄 아는 모양이었다.
“말하시게.”
진지하게 재촉하는 이산해였다.
곧 이어질 말을 들으면 실망 좀 하겠는걸.
“굴포운하라고 아십니까?”
“굴포운하? 알다마다.”
이산해는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냐는 듯, 금세 기대감이 빠져나간 얼굴로 답했다.
하지만 금방 가닥이 잡혔는지 다시 긴장감을 드러내며 물었다.
“혹시 굴포운하를 재개할 생각이신가?”
“맞습니다.”
“전조에 처음 시작한 이래로 장장 450여 년 동안 어떠한 소득도 없었던 일이네. 그런데 갑자기 굴포운하라니?”
“한 해에 수십 척의 조운선이 침몰하고 수백 명이 죽습니다. 세곡도 만 섬씩 유실된다지요. 유일한 해답이었던 굴포운하가 450여 년 동안 진전이 없었다는 건, 달리 말해 천 척의 조운선과 수만 명의 사공, 오백만 섬의 세곡이 사라졌다는 것과 같습니다.”
“……음!”
“굴포운하란 최대한 빨리 성사해내야 옳은 일입니다. 다시 450년 동안 기다린다면 똑같이 수만 명의 사공과 오백만 섬의 세곡이 사라질 테니까요.”
물론 지금으로부터 450여 년 뒤면, 대한민국이다. 굴포운하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세상이지만, 이산해가 알 리 없었다.
450년 전 고려조라고 지금과 딱히 다를 바가 없는데 450년 뒤라고 뭐가 특별히 다르겠는가?
시간에 따른 변화를 체감할 수 있다면 모르겠으나 전근대는 발전이 지지부진한 시대였고 비교적 평화로웠던 동북아는 더욱 그런 편이었다.
게다가 이뤄야 할 이상사회를 수천 년 전 고대 중국에서 찾는 조선이었다.
거기에 마하의 속도로 날아다니는 비행기도 없고, 음속으로 땅을 미끄러지는 철도, 광속으로 전 세계 사람을 이어주는 통신기술은 없었다.
지금처럼 땅이나 일구고 소나 치는 농부와 목동만이 있을 뿐.
그런 세상이라면 굴포운하는 필요했다.
“흐음…….”
이산해는 짧게 침음을 흘리곤 말했다.
“힘이 되어달라는 건가? 참의가 굴포운하에 대한 의견을 조정에 타진하면?”
“아닙니다.”
“……그럼?”
힘이 되어달라고 할 것도 아니면서 뭣하러 굴포운하 이야기를 꺼냈냐는 듯한 물음이었다.
“반대해주십시오.”
“반대?”
이산해는 허, 탄식을 짧게 흘렸다.
“나와 젊은 친구들이 반대를 하면, 늙은이들은 감정적으로 대응해 굴포운하에 찬성하지 않겠냐는 계략인가?”
“그렇습니다.”
“물론 옹졸한 노인네들이라면 참의 뜻대로 나오겠지. 하지만 참의의 사업이 성공한다면 반대를 한 나와 다른 친우들은 면이 어떻게 서겠나? 늙은이들이 얼마나 기세등등하겠냐는 말이야.”
“제가 반드시 성공할 거라는 듯 말씀하시는군요.”
“내가 아는 참의는 몽상가가 아니야. 방도가 있으니 당당하게 남들은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는 일을 추진하려는 게 아닌가?”
“……하하.”
나는 멋쩍게 웃었다.
“믿어주신다니 민망합니다.”
“그보다, 대답을 해주시게.”
자신은 물론 당파의 명예와 정치적 지분까지 걸린 일이어서인지 확실하게 매듭을 맺으려는 이산해였다.
“도의상 옳은 일이라면, 제가 적극적으로 영감을 돕겠습니다.”
“…….”
이산해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굴포운하가 성공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일단 동인은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고작 감정적인 이유로 사업을 긍정하고 밀어준 서인들은, 이래서 새파란 놈들이 정치해서는 안 된다며 압박에 힘을 싣겠지.
실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굴포운하는 일반적으로 생각해서 성사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450년 동안 어떠한 진전도 없지 않았나?
타격은 입겠지만 그게 당연한 판단 아니었냐는 식으로 여론을 호도한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는 있었다.
특히 왕은 양당의 분쟁이 격화되기를 원하니 서인에 비해 세력이 약한 동인이 더 약해지게 고이 두지는 않을 터였다.
이후, 동인에게 명분이 있는 상황이 찾아오면 어떨까. 이건 달리 말해 반격의 순간이라는 뜻이고, 이때 굴포운하를 성공시켜 엄청난 입지를 다진 이순신이 동인의 편을 들어준다면 기세를 완전히 뒤집을 수도 있었다.
이순신의 제안은 당장의 정치적 지분 소모를 감내하는 대신, 후일 이자를 크게 쳐서 돌려주겠다는 것과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도의상 옳은 일이라면 마땅히 도와줘야지 않나?”
이산해가 쓰게 물었다.
옳은 일이니 돕겠다는 건 대가가 될 수 없다. 옳은 일에 힘이 되어주는 건 선비로서 당연한 일이다. 마치 숨을 쉬고 내뱉듯.
이건 그가 아는 이순신답지 못한 제안이었다.
“……영감.”
이순신이 입을 열었다.
“송구합니다. 옳은 일의 편에 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렇지.”
이산해는 순간 안도했다. 방금전 이순신의 제안이, 혹시라도 그가 숨겨두었던 진면모가 드러나는 순간은 아닌가 싶어서.
하지만 스스로도 당연한 소리를 했음에 사과하는 것을 보니 착각인 모양이었다. 이산해의 가슴을 스멀스멀 타고 올라가던 서늘함이 단숨에 흩어져갔다.
“당연한 일을 하겠다는 것으로 약조를 드릴 수밖에 없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굴포운하는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서 반드시 해내야 할 일입니다. 이를 이룩하는데 정치적인 대가를 제공한다면, 설령 결과가 좋을지라도 과정까지 좋았다고는 자랑스럽게 말하지 못하겠지요.”
“……음.”
“차마 무엇도 약조드릴 수 없다는 뻔뻔한 소리를 하기가 죄송해서, 말실수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닐세, 아니야.”
안도한 이산해는 손을 내저었다.
“영감께도 영감만의 사정이 있으신데 억지를 부린 듯 해 부끄럽군요……. 하, 실망시켜드려 죄송합니다.”
“괜찮네.”
이산해는 재차 무방함을 표현했으나 이순신은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기분이 찝찝했는지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일어날 듯 움찔거렸다.
그 모습에 이산해는 덜컥 말했다.
“도와주겠네.”
“그게…… 정말이십니까?!”
이산해는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만일 지금 이순신이 자리를 떠서, 나중에 서인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굴포운하 사업을 반드시 완수하겠다는 인상을 팍팍 주고 있다면.
혹, 거기에 서인이 응하면 동인은 그야말로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버린다. 이쪽이라고 감정적이지 않은 건 아니었으니까.
서인이 굴포운하 사업에 긍정적이라면 동인은 반대하겠지. 굴포운하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중론이기도 해서, 이산해라고 차마 동인의 공론을 역류할 자신이 없었다.
이후 결과는?
서인은 굴포운하 사업에 힘을 실어준 대가로 입지가 늘어날 거다. 동인은 반대가 되겠지. 상황은 똑같은데 이번에는 이순신의 마음도 얻을 수 없었다.
‘이런…….’
좀 더 깊게 판단할 생각이 있었다면 좋겠으나 이순신은 여유를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나름대로 급한 듯하니.
게다가 자리를 뜨려는 모습에 당황해서 대뜸 도움을 약속해버린 상태였다.
“……그래. 도와주겠네. 참의께서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옳은 일을 하겠다는데, 내 어찌 선비 된 사람으로 작은 희생조차 감내하지 못할까?”
“……영감!”
이순신이 감격한 모습으로 이산해의 손을 쥐었다.
“감사합니다, 영감.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아, 아닐세.”
이산해는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미 강은 넘은 상태라, 이제 와서 주저한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이산해는 복잡한 심경은 떨쳐내기로 했다.
‘그런데 이순신의 손이 원래 서늘한 편이던가?’
사실 손을 잡아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마음 따뜻한 이순신이라 무의식적으로 몸도 따뜻하리라 생각했다.
의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