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07화
36. 시간을 마시는 새 (2)
“내가 참의에게 너무 미안하군.”
판서 박영준이 말했다.
밤섬의 숙소 건설은, 사실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고작 제수용 과채들과 뽕나무 잎을 기르는 작은 섬에 사람들의 시선이 돌아갔다면 애초에 밤섬이 인외마경으로 전락하지도 않았으리라.
박영준은 장계를 통해 자신이 예산을 대겠다며 숙소 신축을 요청했고 어전에서는 단 한마디 언급도 없이 비답으로만 알아서 하라는 명령이 짧게 돌아올 뿐이었다.
하지만 막상 첫 삽을 뜨면서 자재들을 나르자, 밤섬의 숙소 신축은 단숨에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일부는,
-아전 떨거지들이 노났네?
하고 시큰둥하게 반응했지만 일부는 달랐다.
한평생 남들 눈치만 보며 재물만 살살 모아왔던 박영준이 이런 일면도 있었냐고.
평소 이미지와 맞지 않는 일이라, 마냥 순수한 의도만은 아니리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박영준이 아전들 집을 지어줘서 무슨 재미를 보겠나.
게다가 전임 공조판서는 밤섬의 봉상시 숙소를 9채에서 2채로 대거 축소한 점과 극명히 대비되어, 박영준의 평가가 좋은 쪽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대감께서 소관에게 미안해하실 것이 어디 있습니까.”
“예산을 대고 일을 전담한 것도 자네인데 나만 덕을 보는 같아서 말이네.”
“배가 아프긴 하군요.”
원래는 적당한 시점에 내가 예산을 댔다는 소문을 세간에 풀 생각이었다.
박영준 말마따나, 그만 재미 보는 상황이었으니까. 나도 내 몫을 찾아야지 않겠나. 일단 밤섬의 숙소 신축부터 통과시킬 생각으로 박영준의 이름을 걸었던 거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이슈가 될 줄이야. 전말을 밝혀 반전을 꾀하기는 어려워졌나?’
박영준의 평가마저 변해버린 지금 전말이 밝혀지면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 더 요란한 법이므로.
물론 일이 이렇게 되어도 방도는 있다. 박영준이 나에게 크게 도움을 받았으니, 그만큼 밥값을 해주면 된다.
내가 결정적으로 이뤄내려는 것은 굴포운하이지 아전들 숙소를 사비로 지어주는 게 아니었으니까.
“소관도 이렇게까지 격한 반응은 생각하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대감께 득이 되었으니 기쁩니다.”
“덕분에 공판으로 좌천된 것 때문에 완전히 내리막길을 가지는 않겠어.”
“하하하……. 내리막길이요? 제가 있는데 기우가 심하시군요.”
“앞으로도 참의만 믿어야겠군.”
“그게 정답입니다.”
다소 뻔뻔한 태도. 상관 상대로 보일 태도는 아니었지만 박영준은 나의 당여였고 이번 일로 크게 도움을 받았다.
그럼에도 반항적으로 불쾌함을 느낀다면 끝까지 데려갈 필요가 없다. 다행스럽게도 박영준은 개의치 않았지만.
“소관이 공조에 처음 와서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전입을 명 받았다고 외쳤던 것, 말인가?”
“아니요! 굴포운하를 말하는 겁니다.”
“당연히 그것도 기억하지.”
“공조에 대한 여론이 호의적일 때 떡밥을 뿌려둬야지 않겠습니까. 작은 공사로는 끝나지 않을 테니까요. 미리미리 신뢰감을 줘야 합니다.”
“알겠네. 어려운 일은 아니지.”
나에게 비책이 있다곤 해도, 굴포운하는 군기시 때 근무하던 것처럼 끄적거린 설계도에 필요성을 설파하는 정도로는 성사가 불가능했다.
신무기의 시제품을 몇 개 만드는 것과 전조를 포함해 조선의 황금기에도 실패한 대규모 공사를 다시 시작하는 것은 경중이 다른 일이었다.
아무리 나의 명성이 높고 공조가 좋은 인상을 남겼다고 바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먼저 멍석을 크고, 튼튼하게 펼쳐놓은 뒤 재상들이 납득할만한 굴포운하 현실화 방안을 제시해야 했다. 물론 여론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호도할 인맥과 세력의 필요성은 말할 것도 없다.
‘그때야말로 나의 제삼당이 전면에 나서는 순간일 거다.’
당장 동서 양당의 분쟁은 사소한 축에 속했다. 서로에 대한 명칭도 정립되지 않은 채, 증오심으로 감정만 소모할 뿐.
선조가 진도를 더 빼주지 않는 한 동서 양당의 분쟁을 이용해 한몫 챙기기는 아직 힘든 상황이었다.
물론 재미 볼 구석이 아주 없지는 않겠으나 당쟁에 끼어드는 것은 선조의 경각심을 일으키기 딱 좋은 짓이었다.
차라리 공사처럼 정쟁과는 판이한 주제에 힘을 쏟는 편이, 당의 실체를 숨기고 경각심을 회피하는 데 유리하다.
‘거기에 동서 양당 중 하나를 낚으면 더 쉽겠지.’
반대 당파가 맹목적으로 거절하더라도, 양당이 비등한 세력이라면 제삼당이 공사 재개에 추를 얹어주는 정도로 여론을 주도할 수 있다.
게다가 선조는 오만하고 자만이 심하며, 제왕다운 공훈을 쌓기를 원했으므로 기본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다.
물론 지금 기준으로는 미래의 일이다.
“알았네. 내 아는 사람들과 조정에 가볍게 운을 떼어보지. 참의가 대단한 일을 준비하고 있다고.”
“딱 그 정도가 좋겠군요. 대뜸 굴포운하 공사의 재개를 언급하면 학을 뗄 사람이 많을 테니.”
“맞네. 일단은 사람들의 기대감을 고취하는 정도로 만족하자고.”
박영준과의 대화가 끝나자 나는 참판 이준민에게 말했다.
“참판께서는 제수되신 지 시일이 제법 흐르셨지요?”
“그렇네. 가급적이면 다른 곳에 제수되기 전에 공사가 시작되면 좋겠지만…… 강요할 수는 없겠지.”
나의 굴포운하 공사가 반드시 성공할 거라는 전제가 깔린 발언이었다.
최근 관계를 맺은 사람이었으나 나에게 보내는 기대와 신임이 컸다. 박영준의 소개와 첫 만남에서 반응 인상이 나쁘지 않은 듯했다.
게다가 우리가 사실상 전용하는 당상대청에서 내부의 일을 공유하고 또 제삼당에 선진입한 박영준이 이런저런 도움을 받는 모습에 기대감도 늘었겠지.
나는 이준민의 기대를 저버릴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든 버티셔야 합니다.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 같은 친구가 굴포운하 같은 거대한 사업의 성과를 받아먹어서야 되겠습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참판이 절대적으로 나의 편이냐, 아니면 외부인이냐에 따라서 내가 발휘할 힘이 달라지기도 했다.
적어도 공조 당상 셋 모두가 적극적으로 공사 재개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그림이 좋지, 하나가 시큰둥하거나 거부라도 한다면 힘이 팍 죽을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내가 이곳에서 참의로 있는 한, 공조는 끝까지 안마당이어야 했다.
* * *
“정 사인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면서?”
이산해가 말했다.
역사에서는 동인의 영수가 되었던 그.
때마침 서인의 나를 영입하려던 시도가 실패한 시점에서 부른 것을 보니, 이번 역사에서도 이산해의 당적은 다르지 않은 듯했다.
“어떻던가?”
“대뜸 어떠냐고 말씀하셔도.”
나는 점잔을 빼며 잔을 들었다.
이산해가 말하는 바의 의미를 모르지는 않는다. 어떻기는, 서인의 영입 시도가 있었는데 어떻게 생각하냐는 말 이외로는 해석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자리를 노골적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이산해가 무엇을 제안하건 나는 동인에 가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산해로서는 불만족스런 결과겠지만,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면 정철에 이어 이산해와의 관계도 불편해질 터였다.
물론 양당과 우호 관계를 맺을 루트가 꼭 정철, 이산해만 있는 건 아니다. 다만 두 사람이 전통적인 내 우군이라는 점에서 이 건전한 관계는 최대한 지킬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이산해는 직설적이었다.
“일부러 모른 척을 하는 건가? 내 자네가 그리 단순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귀신이시로군요.”
나는 잔을 내려놓으며 씩 웃어주었다. 내가 일부러 피하는 것을 아는 모양이니, 억지를 부리며 아닌 척하느니 아부하는 편이 나았다.
“누구 눈을 속이려고.”
“예상하는 대로입니다. 정 사인과의 만남에 대해서는요.”
“역시.”
이산해는 고개를 살살 젓더니 평했다.
“단순한 사람이야. 안 그래?”
“지금 저에게 대놓고 물어보시는 건 그렇지 않고요?”
“그렇지 않지. 나는 참의와 건설적인 논의를 원하거든. 우애를 강조하고 감정을 호소하는 것도 좋지만…… 참의는 그 이상을 원하는 사람 같아서.”
“이 사람은 우애도 좋아하고 감정도 긍정합니다.”
“흠.”
이산해는 이외라는 듯 콧바람을 흘렸으나, 나는 진심이었다.
물론 순수하게 사람을 좋아하고 인연을 소중히 하던 예전에 비하자면 많이 바뀌었지만, 나는 여전히 우애를 좋아했다.
유사시 나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감정 역시 긍정한다.
감정적인 사람은 조종하기 쉽다는 점에서.
“오해하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비록 정 사인의 요청에 부응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반대편에 뜻이 있어서는 아니었습니다.”
“그럼?”
“이 사람은 사림이 분열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달갑지 않습니다. 거기에 낄 생각은 별로 없어요.”
제삼세력을 구축하여 선조와 경쟁하고 정쟁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긁어모을 생각은 흘러넘치도록 많지만.
굳이 내가 이렇게까지 정치적인 사람이라는 걸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많은 사람에게 이순신은 의인의 대명사다. 그동안 남겨온 행적이 증명하고 있었다. 이 좋은 이미지를 굳이 벗겨낼 필요는 없잖은가?
“미래를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힘이 되어주셔야 하네.”
“무슨 미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지금은 사림의 늙은이들이 높은 관직을 독차지하고서 도저히 양보를 해주지 않고 있네. 훈구척신을 몰아냈다는 공훈을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세상이 바뀌었잖나. 구세대적인 사고로는 이 세계를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없네.”
도대체 어떤 방향이 옳은 방향이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참의는 유능하고 평판이 좋지. 나서기만 한다면 따르는 사람이 많을 걸세.”
“영수가 되라는 말입니까?”
“정확히 말하면 영수 중 하나가 되겠지.”
“그래서요?”
“영수에 올라 공론을 만들면 자네가 옳다고 생각한 바를 이뤄낼 수 있네.”
어느 방향이 옳다는 말도 없이, ‘내가’가 옳다고 생각한 바를 이뤄낼 수 있단다.
권력을 향유하자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사실 동인이 사림에게 대항한 이유가 앞서 말한 ‘늙은이들이 높은 관직을 독차지하고 있어서’이기 때문임을 감안하면 뻔하기도 했다.
마침 이산해는 젊은 사림 중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갖고 있었지만, 당상관이 된 5년 동안 여전히 정삼품에 머물러 있어 이 이상의 자리가 절박할 시기였다.
특히나 선조의 비호를 받아 비정상적인 속도로 승진과 영전을 거듭해온 그에게 5년의 정체란 무척이나 길고 고통스러운 세월이었을 거다.
그러다 정체의 이유를 고위직을 독점한 사림 구세대에게서 찾았겠지.
이제 이산해는 서인 늙은이들을 몰아내어 자신의 승진 정체를 해소하고 자존감을 되찾으려는 것이었다.
“예로부터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는 없다고 하였네. 이대로 단기필마로 돌아 다녀봐야, 어떠한 꿈도 이룩할 수 없을 걸세.”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 없다. 단기필마로 이룩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래서 제삼당을 구성하지 않았나.
최근 스승인 김성일과, 한동안 말도 없었던 류성룡이 마침내 합류 의사를 밝혔다.
원 역사에서는 두 사람이 장차 동인들 사이에서 비중 있는 인물이 됨을 생각하면 이것대로도 재미있는 상황이었다.
이산해는 나를 여전히 순진한 친구라 생각하고 동인으로 포섭하고 있는데, 정작 나는 이미 동인의 핵심 간부를 둘이나 호로록 잡아먹었다는 점에서.
“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