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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06화 (106/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06화

36. 시간을 마시는 새 (1)

정철의 초청을 받았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의도가 뻔했다. 나를 서인에게 영입하겠다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이미 독자적인 세력이 있다. 역습의 느낌으로 도리어 정철을 내 편으로 영입하고 싶었지만 기대는 하지 않았다.

원 역사에서도 워낙 짙은 당색을 드러냈던 정철이었기에.

뜰로 들어서니 사랑방에 있던 정철이 나를 발견하고는 손을 들었다.

“아, 오셨는가!”

“간만입니다.”

“안으로 들어오게.”

정철은 팔을 뻗어, 방문을 마저 열었다. 그러자 열린 틈 너머로 이이가 나타났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여기에서 나를 볼 줄은 상상도 못했나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정철은 나를 초대할 때 동석할 사람이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이에게도 마찬가지였을 테지.

나는 가볍게 묵례하여 이이와 인사를 나눴다.

정철에게는 미안하지만 이이는 이미 내 사람이었다.

조심스러운 태도였으나 나의 세력이 여타 당파처럼 이익집단으로 변질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지, 서인측에 마음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이는 동서 양당의 분열에 질려 최종적으로 나를 선택한 사람이었다.

내가 정철에게 이이를 잃을 가능성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이이가 나에게 보고하지 않은 건 아쉬운걸.

‘뭐, 원체 어디 가서 고개 숙일 사람은 아니니.’

공인 미친놈의 패기를 굳이 내 쪽으로 돌릴 필요는 없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섰다.

“앉으시게들.”

정철은 빈자리를 향해 팔을 뻗었다.

나는 기꺼이 펼쳐진 방석에 자리했다. 딱히 상하석을 가리지 않는 삼각형 형태의 배치.

정철은 먼저 두어 잔 걸쳤는지 얼굴이 약간 달아오른 상태였다.

“두 분께서는 근래에 어떻게 지내셨나?”

조심스럽게 운을 떼는 정철이었다. 먼저 답한 사람은 이이였다.

“이 사람이야……. 뭐. 사직한 이래로 세월만 잡아먹는 중이지.”

“복직은 아니 하시고?”

“제안은 있었지만 마다하였네. 근래 조정에서 펼쳐지는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피로해서.”

이이는 아직 말을 다하지 않은 투였지만 정철이 서둘러 끼어들었다.

“맞네. 참으로 피로한 상황이지. 한평생 유학을 배웠다는 사람들이 오늘날의 세상을 이룩한 어른들과 맞서 싸우고 있으니.”

이이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나.

정철의 말은 노골적으로 동인을 공격하는 것이었고, 미안하지만 이이는 동서 사이의 당쟁에는 추호도 관심이 없었다.

물론,

“이 사람이 생각해도, 일각의 행보는 도의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참의께서는 이해해주시는군!”

“사실이 그러니까요.”

동인은 서인이 피를 흘려 이룩한 세상에 편히 진출한 주제에, 서인과 맞서고 있었다. 마치 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려는 격이다.

“패륜과 다를 바 없지.”

정철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군. 서인들은 동인에게 선인이자 선배였다.

“하지만 이 사람은 조심스럽습니다.”

“왜?!”

정철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잘잘못이 명명백백한데 무엇을 조심스러워하냐는, 책망 느낌이 다분했다.

단순한 사람 같으니.

“분란이 커진다면 사림의 비극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비극은 무슨. 그들은 사림이라 할 수도 없네. 도려내어야 마땅할 것을 도려내는 과정이니 오히려 축하해야 할 일이지.”

“음…….”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철은 이미 서인의 주구였다. 눈과 귀를 가린 채로 서인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보내는 꼴을 보면 말이다.

정녕 선조가 그려가는 그림을 보지 못한단 말인가?

당장은 버릇없는 신세대의 모습이 불쾌할 뿐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적대감은 커져가고 진심이 되어갈 터였다.

결국에는 단순히 동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절멸시켜 마땅할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겠지.

‘기축옥사 당시 전면에 나서서 칼춤을 춘 사람이 정철이기도 하니.’

내가 말을 한다고 돌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처럼 생각이 단단히 굳어버린 사람을 굳이 설득하려다간, 도리어 나까지 적이 되는 수가 있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이이를 바라보니, 그 역시 정철의 극단적인 면모에 질렸는지 떪은 감 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간만에 좋은 인연들이 모였는데 머리 아픈 이야기만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사람은 정 사인께서 친히 주재하신 자리라, 내심 기대한 바가 있었는데 말이죠.”

술.

나와 이이를 회유할 생각이었던 정철이었지만 술의 유혹을 이겨내긴 어려웠는지, 헛기침을 흘리고는 밖을 향해 외쳤다.

“여봐라! 주안상 셋 봐오거라!”

예, 하는 목소리와 함께 발소리 하나가 집 뒤편으로 향했다.

주안상이 나올 때까지 시간이 걸릴 터인데, 나는 정철이 헛소리를 못하게 선수 치기로 했다.

“근래에 소식 하나 들었습니다.”

“무슨?”

“이번에 의정부 사인으로 직을 옮기셨다면서요.”

“그렇네.”

정철은 대답과 함께 자신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의정부 끗발이 옛날만 못해도, 여전히 조선의 최고 기관이었다. 또 사인은 정사품에 불과하나 삼의정을 포함한 국가의 원로들을 보좌하는 만큼, 위세는 당상에 준했다.

“요직에 오르셨으니 곧 당상에 오르시겠군요.”

“그래야지. 내 언제까지고 당하에 머물러서야 그대들 앞에서 면이 서겠나?”

나는 현직, 이이는 전직 당상관. 정삼품 턱걸이지만 이제 정사품 사인이 된 정철에게는 절실한 위치였다.

각자의 근황에 대해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니 주안상이 나왔다.

마침 문쪽에 앉아 있던 내가 각자의 앞에 상을 돌렸고, 정철은 집주인으로서 먼저 병을 들어 각자의 잔을 채웠다.

도자기 잔에 채워지는 맑은 액체. 한없이 순수할 것 같지만 진한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찔렀다. 독주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이런 걸 평소에 두고 마시다니.’

보통 사람들에겐 이런 술 한 잔이 간에게 날리는 스트레이트 펀치 한 방이었다.

정철이라는 인간은 자기 간에게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정철처럼 간에게 죄를 짓고 싶지는 않았다.

“부드러운 술은 없습니까?”

“허어.”

“사인과 함께 술을 마셔서 버틸 사람이 없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

“하하하하. 그건 그렇지.”

주량이 세다며 치켜세워주니 웃으며 만족하는 정철이었다. 역시 주당에게 주량 칭찬만 한 건 없었다.

“청주도 있으니 그걸 마시게.”

정철이 밖을 향해 이르려는 찰나, 이이도 끼어들었다.

“이 사람도 청주로 부탁하네.”

“자네까지 빠지면 나 혼자 무슨 재미로 마시란 건가?”

“청주를 주지 않으면, 반 각도 되지 않아서 술 마시는 사람은 자네뿐일걸.”

다른 사람들은 다 쓰러져서 말이다.

정철은 이이의 나약함에 실망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밖을 향해 일렀다. 청주를 가져오라고 말이다.

비축해둔 술을 가져오는데 시간은 그리 걸리지 않았다. 정철을 제외한 나와 이이의 상 옆에 청주가 가지런히 놓였다.

“자, 이제 약한 척하지 않기일세.”

정철이 잔을 들어 건배를 권했다.

지금 채워진 잔은 순도 100%의 독주였지만, 이미 따라버린 것이라 뺄 수도 없었다. 나는 두 사람과 잔을 부딪쳤다.

-짠!

기분 좋은 소리를 신호로 모두 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독주가 입안을 불태웠다.

맛을 즐길 새도 없이 넘기니, 끓는 물을 억지로 삼키기라도 한 듯 독주가 불길을 남기며 식도를 내려갔다.

‘정말 사람 잡는 술이로군.’

턱 숨이 막힐 정도라 과연 이이는 어떨지 보니 그는 얼굴이 찌그러져 있었다. 그에게도 감당하기 어려운 독주였나 보다.

그래서인지 이이는 눈치를 보지도 않고 고기 안주를 연이어 집어삼켰다. 독주로 손상된 기도를 기름기로 진정시키겠다는 듯.

마침 그 모습을 본 정철이 짓궂은 얼굴로 바라보자, 이이는 항변하듯 물었다.

“자네는 어째서 이런 술을 좋아하시는 건가?”

“이제는 어지간한 술로는 취하지도 않으니.”

“꼭 제 같은 술을 좋아하시는군.”

“허어? 독하기로 따지면 옛날 이 선생이 더했으면 더했지 지금의 나만 하겠나.”

정철이 짓궂게 웃었다.

확실히, 당하관 시절이이야말로 독주에 걸맞은 독종이었지. 만나는 상관마다 얼마나 좋은 인상을 남겼는지 이조 때 상관인 박영준은 아직까지도 이이를 미친놈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상관만 씹어먹으려 들었나?

자신을 가르쳤던 백인걸은 물론, 대학자이자 동인의 스승인 이황, 선조를 왕으로 만들어준 이준경, 이준경에다 훈구 최후의 권신이었던 심통원을 저격했던 기대승, 이황과 함께 유일하게 조선의 문묘와 배향공신 명단에 함께 올라간 이언적까지.

뭇 사람들이 존경하는 사람의 웃어른과 핵심 인물들을 가리지 않고 공격했다.

게다가 가정 내에서도 이이는 항상 분란을 만들었다. 밖에서 새기 전에도 안에서부터 샜던 바가지라는 뜻이다.

‘공인 미친놈으로 정평이 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괜히 정철마저 이이를 상대로 독종이라 하는 게 아니었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처럼, 근래에 들어서는 비교적 얌전해졌지만…….

정철에겐 세월이 독이 된 듯했다.

단순하고 가식 없는 호인 정철은 어느새 편협한 사림의 당여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라고 정철이 타락했다는 식으로 말할 자격이 있는 건 아니지만.’

오히려 제 성격대로 자신의 변화를 겉으로 드러내는 정철 쪽이 바람직하다. 적어도 기만적이지는 않으니까.

그에 반하면 나는…….

“참의께서는 왜 술을 마시나?”

이이가 물었다.

나는 깔끔하게 비운 잔을 내려놓으며 답했다.

“사람이 좋아서요.”

정철과는 거리를 더 두어야겠군.

* * *

“여기가 좋겠습니다.”

권 가가 말했다.

숭신방에 저택을 올릴 때 정철의 소개를 받아 대목장으로 썼던 자였다.

충실한 설계와 부족함 없는 일 처리로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물론 물주였던 나에게도 좋은 인상을 남긴 적이 있었다.

그래서 간만에 건물 하나 세울 일이 생긴 나는 권 가를 다시 쓰기로 했다.

밤섬의 숙소 건설에.

“지대는 높아 좋겠습니다만, 부지가 너무 좁지는 않을는지.”

“부족한 부지는 토대를 만들어 충당하면 됩니다. 오히려 편의나 부지확보 등의 이유로 어중간한 위치에 지었다간 강이 크게 범람할 때 침수되어 기둥이 썩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군요.”

“무리해서라도 제일 높은 곳에 짓는 편이 낫습니다. 더 올라갈 곳도 없으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나라의 토목공사를 전담하는 공조의 당상관이라지만, 국토교통부 차관이 직접 건물을 설계하지 않듯 현장의 일은 현장의 의견을 따라야 했다.

권 가가 말을 이었다.

“다만 경사가 거칠어 토대를 만들더라도 부지 확보가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

“여러 채를 계단식으로 배치할 수도 있고, 복층을 올려 부지를 효율적으로 쓸 수도 있지요.”

“흠.”

전자는 꼭대기 근처에 건물을 두르는 형상이 되어 조금 지저분해지겠지만, 단층이라 적은 예산으로 빠르게 지을 수 있었다.

후자는 마치 ‘저 푸른 언덕 위에 그림 같은 집’이 되어 깔끔하고 보기 좋겠지만 예산이 많이 들 수밖에 없다.

복층을 올리는 순간 설계와 자재에 더 힘이 들어가게되는 건 어쩔 수 없으니.

“어느 편이 좋겠습니까?”

권 가가 물었다.

어느 쪽이냐면, 기왕 짓는 김에 힘을 더 쓰더라도 멋있고 깔끔한 쪽이 나았다.

“복층…….”

“그럼 복층으로 하겠습니다.”

“아니.”

나는 짧게 말을 끊고는 말했다.

“혹시, 머리 위에 모자를 씌우듯 지을 수는 없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시온지.”

“꼭대기에는 단층으로 짓고, 지대가 낮은 주변으로는 복층을 짓는 겁니다. 높이를 맞추어 붙여 짓는다면 마치 건물이 하나인 것처럼 보이겠지요.”

“가능은 하겠습니다만…….”

말 그대로 가능은 하다, 수준이었다.

섬이 돌덩어리라 지형을 쉽게 고칠 수 없어서 깎는 대신 토대를 쌓는데, 하다못해 평면만 아닌 경사면까지 이용해 하나의 건물을 만들라?

설계를 위해서 더욱 섬세한 측량이 필요했고 경사면으로 인해 실제 건물 안이라도 낭비되는 공간이 많이 생길 터였다.

또 막상 완성하더라도 1층의 중심부가 언덕으로 채워져 있어 통행이 불편해져 동선이 길어진다.

이를 완화하려면 추가적인 복도를 내야 했다.

물론 1, 2층을 오르내리는 경로가 많아질 테고 설계에도 힘이 더 들어가겠지. 예산이 더 요구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압니다. 가능은 하겠다. 이 사람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정도로 우둔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오시면 어찌하여.”

굳이 득 볼 것 없는 설계를 고집하느냐는 물음이었다.

“난해한 건축일수록 공간을 숨기기는 쉬워지는 법이잖습니까?”

“…….”

권 가의 얼굴에 당혹이 서렸다.

내 뜻을 제대로 이해한 게 분명했다.

밤섬은 사방이 한강으로 막혀 있어, 통행을 위해서는 반드시 배가 필요했다.

또 거주하는 사람은 봉상시와 상의원의 밭을 관리하는 아전과 공노비들이 전부.

굳이 배까지 타가며 들어오려는 사람도 없었고 나갈 사람도 없었다. 외부와 격리된 공간인 셈이다.

달리 말하자면, 몸을 피하거나 중요한 것을 숨길 때 아주 요긴하게 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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