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05화
35. 인외마경 율도국 (3)
도성 바로 아래, 한강에서 실현된 인외마경 율도국!
봉상시 노예들과 상의원 노예들이 패싸움에 더불어 서로가 담당하는 작물을 파괴하고 훔치는 수라도 각축장!
나는 여막 개수가 아닌 환경을 지적했으나 유희춘은 전권 위임으로 화답해주었다.
물론 말이 위임이지 짬 때리기나 다름없다. 혼자서 처리하라는.
면전에서는 오만 앓는 소리로 공짜 술을 대접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지만, 사실 내가 정치할 때는 패싸움을 좋아해도 공무는 독고다이를 좋아했다.
만사가 그렇지만 책임자가 여럿이면 일이 지지부진 늘어지게 마련이다. 만일의 경우 발을 빼야 하니까,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상황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유희춘과 탁상공론이나 나누느니 차라리 나 혼자서 친히 인외마경에 강림하여, 개판을 직접 목도하고 꼴리는 대로 해결하는 편히 백배는 빠르고 효과적일 터였다.
그래서…….
“다 왔습니다요.”
뱃사공이 배를 댔다.
율도!
너지분한 무언가로 전락한 미래의 율도와는 달리, 이 시대의 율도는 완만한 언덕과 경작지가 갖춰진 나름대로 쓸만한 섬이었다.
한강 다리 아래 환경 조형물로 전락한 미래의 밤섬과는 정반대.
“고생하셨네.”
“아닙니다.”
초로의 뱃사공은 고개를 저었다. 한평생 해를 받으며 노질을 해서인지, 탄탄한 체구에 새카맣게 탄 피부가 인상적인 자였다.
“내 섬을 둘러보고 올 터이니, 잠시 기다려주시게.”
“예.”
나는 나룻배에서 뛰어 뭍으로 내려왔다.
해안은 완만한 경사와 함께 나무가 듬성듬성 자라 있었다. 안으로 조금 파고드니, 개간되어 드넓은 밭이 펼쳐졌다.
한쪽에는 제수용으로 쓸 각종 채소와 과일밭이, 반대편에는 녹음이 우거진 뽕나무밭이.
‘전쟁 터졌냐?’
양측 밭의 경계면에는 농작물과 나무들이 부러지고 박살 나, 흙범벅이 되어 마치 폭격이라도 맞은 몰골을 하고 있었다.
마치 밤섬에서 봉상시와 상의원이 내전이라도 터뜨린 것 같았다.
그나마 멀쩡한 양측의 안쪽 밭에서는 장정들이 서성이며 일하는 ‘척’을 하고 있었다. 비루한 몰골을 보아하니 아전들과 함께 섬에 갇힌 공노비였다.
“……?”
인기척을 느낀 공노비 하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피로함이 과한 나머지 헛것이라도 본 사람처럼, 공노비는 무기력함과 놀람이라는 감정을 동시에 드러냈다.
‘……흠.’
마치 공포물의 배경이 되는 도시나 마을에서, 거주민이 외부민을 볼 때 나오는 반응 있잖은가.
당신은 이런 데 있을 사람이 아니야, 같은 거. 아니면 정신이 나가서 외부민을 만나도 현실과 환상을 분간하지 못한다던가.
여하튼 나는 반쯤 영혼이 추출 당한 공노비에게 다가가 물었다.
“봉상시 소속인가?”
“예, 예에…….”
“나는 공조참의 이(李)일세.”
“……영광입니다요.”
딱히 영광스럽지는 않아 보였지만.
“아전들에게 안내해주겠나?”
“알겠습니다요.”
공노비는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터덜터덜 나아갔다. 그렇게 밭을 가로지르니 주변의 공노비들이 슬쩍슬쩍 시선을 보냈다.
눈을 마주치면 금세 피해버렸지만.
가파른 경사를 거스르니 돌을 쌓아 만든 숙소가 나타났다.
이러한 건물들이 한때 9채는 있었음을 증명하듯 주변에는 언덕처럼 쌓인 돌무더기가 듬성듬성 방치되어 있었다.
그나마 멀쩡한 숙소 앞에 다다르자 공노비가 아뢨다.
“깨워서 데리고 오겠습니다요.”
“그러시게.”
허락이 떨어지자 공노비가 숙소로 들어갔다. 곧 목소리 하나가 웅얼거리더니 신경질적으로 투덜거렸다.
“무슨 일이냐, 이 시간에? 뭐? 누구?!”
누구긴, 공조참의지.
정삼품 당상관!
육조 중에서 끗발이 제일 떨어진다곤 해도, 어디까지나 육조 기준에서다. 여러 속아문을 거느린 공조의 당상이라면 아전으로서는 감히 얼굴을 마주할 수도 없는 존재였다.
과연 다급한 발소리가 있더니 넝마주이를 걸친 아전이 쪽문을 박차고 튀어나왔다.
“차, 참의 어르신?”
이제 사오십 되었을까.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부러져 축 늘어진 갓에, 도포는 언제부터 입었는지 새기카맣게 때가 탄 채 구멍까지 숭숭 나 있었다.
분명 유인도인데 표류당한 지 반년은 지난 몰골이라니.
“영감께서 어찌 이런 누추한 곳을 친히 방문하셨는지…… 말씀도 없이.”
“놀라셨겠지만 일부러 연락을 미리 드리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이 의전은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어서.”
“아.”
“이 사람이 율도를 찾아온 이유는, 봉상시 아전들이 일하는 여막이 과하게 줄었다는 말이 있어서요. 조정에서 잠깐 논의가 되어 이 사람이 현장 파악을 위해 직접 왔습니다.”
방문의 이유를 알리자 아전이 대뜸 무릎을 꿇었다.
“참의 어르신!”
“갑자기…….”
“제발 소인들을 살려주십시오! 아홉 개나 있던 여막을 둘로 줄이니, 자리가 너무 좁아 사람들이 돌아가며 자야 할 지경입니다!”
양손을 비비며 눈물까지 찔끔 흘리는 아전이었다.
실로 애처로운 광경.
방문 너머를 흘겨보니 한 무더기 인간이 다닥다닥 붙어서 자고 있었다. 누가 보면 시체를 한데 몰아넣은 줄 알리라.
얼마나 피곤했던지 소란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반응이 없었다.
“확실히 곤란한 상황이군요.”
“상의원네 아전들도 저희네 밭을 서리하면서, 뽕나무가 상했다는 이유로 소인들을 밖으로 내몰았으니 울분이 터집니다!”
“이해합니다. 이 사람이 무엇을 해드리면 좋겠습니까?”
“대신 여막 한두 개라도 좋으니 다시 짓게 허락만 해주시다면 은혜가 난망하겠습니다!”
“난망 좋지요”
“그, 그럼?”
아전은 반색하며 물었다.
“하지만 고작 여막이라니, 그 정도로 되겠습니까.”
“소인들이 무엇을 감히 더 바라겠습니까.”
아전에게는 쉰내 나는 아저씨들이 살을 맞댄 채 돌아가며 자던 상황에서 탈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일이었다.
그것대로도 좋지.
나라고 귀찮은 일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쓴맛을 본 봉상시 아전들도 한동안은 조용하겠지.
하지만,
“여막을 지은 다음에는요?”
“다시는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유의하겠습니다!”
“흐음…….”
나는 잠시 침묵했다가 가볍게 운을 뗐다.
“이 사람이 그대의 진심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상의원 아전들이 콧대가 높아졌을 텐데, 또 패악을 부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그건.”
“사람 마음은 당하고만 살 수는 없게 되어 있습니다.”
아전은 부인하지 못했다.
당장은 당한 바가 있으니 참겠지만 얼마 못 가 다시 사달이 날 게 분명했다. 똑같이 여막이 철거되고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오겠지.
“이 사람이 조처하겠습니다. 보다 확실하게.”
* * *
“미안하게 됐네.”
박영준이 무안하다는 얼굴로 옆머리를 긁었다.
분명 나에게 이 일을 맡길 때만 하더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청하라던 그였다. 자신 있게 그런 말을 해놓고는 정작 도움이 되어주지는 못했으니.
“어쩔 수 없지요. 대감께서 최선을 다 해주셨음에도 이뤄내지 못했다면 저라고 다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내가 건넨 말은 위안이었지만, 동시에 여기까지가 박영준 능력의 한계라는 뜻이기도 했다.
박영준 입장에서도 할 말이 없지는 않을 거다.
부탁할 때부터 쌍방 모두가 성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한 상태였으니까.
아, 얼마나 대단한 부탁이기에 판서급 대신도 성사하지 못했냐고?
‘율도 신축 숙소 건설을 할 터이니 예산을 내려달라는 것.’
판서면 나라에 여섯뿐인 최상위 장관이고, 이보다 위라고 확실하게 못 박을 수 있는 존재는 사실 삼의정뿐이다.
육조 말단인 공조의 판서라도 서열을 따지면 왕 포함해서 No. 10인데, 예산 하나 못 따낸다니 이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는 조선이다!
조정은 항상 긴축 상태였고, 긴축 상태에서도 긴축을 시도하는 역 창조경제를 200년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전 따위를 위한, 심지어는 중요도도 낮은 율도에 신축 숙소 건설을 위한 예산을 내려달라고?
‘터무니없는 소리지.’
그러니 나는 물론이고 부탁을 들어준 박영준도 불가능할 거라 판단한 거다.
단지 앞서 자랑스럽게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주겠다는 말을 해버린 탓에,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임을 알면서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거지.
물론 내가 영수 자리를 탐내는 우리 판서 대감님에게 망신살이나 끼치려고 무리한 부탁을 한 건 아니었다.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다면 거짓이겠지만, 진심은…….
“대신 명분이 쌓였군요.”
“명분? 설마.”
“나라에 돈이 없으니 이게 다 신하들이 왕을 잘못 보필한 탓이 아닙니까. 반성하는 차원에서 출자를 해야겠습니다.”
“허.”
박영준은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냐는 듯, 감탄과 배신감 섞인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송구합니다, 대감. 운 좋게 잘 풀릴 가능성도 간과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끙.”
“게다가 소관이 수고를 끼쳐드렸으니 염치 상 보답을 해야지 않겠습니까.”
“……어떤?”
보답 얘기에 금세 풀리는 박영준이었다.
“필요한 예산은 제가 전부 마련하겠지만, 출자자 명의는 대감의 앞으로 돌리지요. 그편이 그림이 나오기도 하고요.”
인외마경 율도의 군상들을 구제하고자 예산을 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그러나 아랫사람을 아끼는 지극한 마음을 꺾을 수 없어 신축 숙소 건설의 예산을 대었다.
이 얼마나 좋은 그림이냐?
“호오…….”
박영준은 만족스러웠는지 나의 ‘기술’에 재차 감탄을 드러냈다.
물론 내가 박영준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예산을 끌어오라 부탁한 것이 아니듯, 이 소위 보상이라는 것도 마냥 순수한 의도는 아니었다.
첫 번째로, 나는 선조를 의식하고 있다.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은 시점에서 나의 존재감을 조정 전면에 과시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둘째, 존재감이 커지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내 이름을 내세웠다간 박영준을 병신으로 만드는 짓이었다.
판서가 실패한 일을, 참의가 사유재산까지 기부해가며 마무리 짓는 꼴이 되니까.
박영준이 지분 욕심은 있어도 철저하게 나의 편인 만큼 나 역시 철저하게 그의 편이어야 했다.
셋째, 하지만 나는 예산을 철저하게 홀로 낼 것이고 박영준은 물론 누구의 출자도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
왜냐?
나중에 소문 퍼뜨릴 거거든. 나 혼자서 한 일이라고. 그때 회계가 깔끔해야 했다. 전액 이순신 출자로. 다른 사람 이름이 끼어들면 그림이 지저분해진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네. 이번에는 기대해도 좋을 거야. 명분도 있고, 거절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니.”
“아, 예산 집행의 전권도 챙기셔야 합니다. 어차피 공조이니 다른 곳에 줄 가능성도 없지만.”
“걱정하지 말게.”
박영준이 호언장담하자 나는 깊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중요한 논의가 끝나고 각자 업무를 시작했다. 나 역시 박영준이 일을 성사시킬 때까지 놀 수만은 없으니, 단순 업무들을 처리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퇴청 시간이 다가오자, 내가 입을 열었다.
“어르신들. 새파란 막내가 술 한 번 사려는데 받아주시렵니까?”
박영준은 예상치 못한 희소식이라는 듯 답했다.
“자네가 사겠다면 가야지. 참판께서는?”
나와 박영준의 시선이 참판 이준민에게로 향했다. 그 역시 술을 싫어하지는 않는 사람이라, 펼쳐둔 권자를 단숨에 말아버리고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판서 대감과 참의만 사이좋게 노시려고 굳이 물어보신 겁니까?”
“하하. 들통 났습니까.”
“도저히 두 눈 뜨고 못 봐주겠군요. 이 사람도 끼어야겠습니다!”
재촉하며 먼저 당상대청을 빠져나가는 이준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