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04화
35. 인외마경 율도국 (2)
“근무시간 중에 이런데 나와도 되는 겁니까?”
홍문관을 나선 유희춘이 나를 이끈 곳은, 바로 기방이었다.
“장관의 특권일세.”
“아랫놈들만 서러운 세상이로군요.”
“꼬우면 장관하면 된다네.”
기생을 부르지는 않았으나 대신 주안상이 푸짐했다. 미식가인 나에게 감흥을 줄 정도는 아니지만, 보통 사람들은 산해진미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였다.
나름의 사죄인 걸까?
예상치 못하게 휘말리게 한 잘못의.
‘나는 괜찮은데.’
유희춘이 단초를 제공하긴 했지만, 요새 선조가 한 짓거리를 보면 체직은 결국 벌어질 일이었다.
이조판서였던 박영준마저 관직이 갈렸는데 참의인 나라고 멀쩡할 수 있었겠나.
‘여튼 씹세끼야, 그게.’
물론 정쟁을 유발한다는 것만으로 왕이 씹세끼가 되시는 건 아니다.
나라고 다르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나로 뭉친 신권은 반드시 왕권에 항거하게 마련이고, 왕 입장에서는 신하들이 자중지란을 일으켜줘야만 했다.
선조의 문제는 사림의 분열을 유도했다는 것이 아니다.
놈은 그 이상을 생각하고 있었다.
기축옥사(己丑獄事).
정여립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이 옥사는 연산군이 일으킨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는 물론, 이후의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를 합친 것 이상의 규모로 진행되었다.
당시 동인 영수였던 이발은 본인은 물론이고 늙은 어머니와 어린 아들까지 고문치사를 당해야 했으며 정여립과 관련된 수많은 문인과 선비들이 억울하게 떼죽음을 당했다.
이후 처사도 참으로 지능적이었다.
연산군은 두 번의 사화를 일으켜 강한 왕권을 가졌으나, 이에만 의존하였다가 수족이었던 사화 공신들에게 배신 당했다.
선조는 연산군에게서 배운 점이 있었는지 기축옥사의 책임을 정철 등 서인에게 전가해, 피해자인 동인마저 왕에게 매달리게 만들었다.
능력이라면 능력이지만 수법이 너무 저열하고 사악했다. 이만하면 십세끼 소리도 오히려 관용적인 표현 아니겠나.
‘그래서 내 책임이 막중하지.’
미스터 십세끼께서 동서 양당을 돌아가며 패죽이지 못하게 할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으니까.
마침 나는 동서 양당과 인맥이 두텁고 결정적으로 선조가 날뛰는 것을 방치하면 놈의 왕권과 위상만 강해진다.
지인들을 지키는 것도 좋지만 나는 곧 죽어도 선조가 잘되는 꼴은 볼 수 없겠으니 당연히 개입해줘야 했다.
“영감, 부담 가지실 필요 없으십니다. 제가 체직된 것은 높으신 분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지, 어찌 부제학 잘못이겠습니까.”
“어, 음.”
유희춘은 차마 ‘높으신 분’ 탓이라는 걸 부정하지는 못했다.
다만 불편함이 아주 없지는 않았는지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말하지 마시게.”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유희춘은 답하지 않았다.
“그럼…….”
공조의 일에 대해 말하려는 순간.
“소식 들었나?”
“……갑자기 소식 들었냐고 하신다면.”
“아.”
유희춘은 미안하다는 듯 말을 끊고는, 무슨 소식인지 가르쳐주었다.
“우의정의 사직이 가납되었네.”
“우상께서요? 이전부터 건강상의 이유로 사장(辭狀, 사직소)를 제출하셨다는 말은 들어보았습니다.”
들어본 정도가 아니다.
노수신은 군기시 때 상관이었고, 개인적인 인연도 있어 처음 사직소를 제출했을 때 안부 차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몸보다는 정신이 더 피로해 보였다.
이유는 뻔했다.
동료인 서인들이 차세대인 동인들과 날을 세우고 있으니, 20년간 유배를 당해가며 사림 세상을 이룩하려던 노수신은 비통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오히려 20년 동안 정계에서 분리되어 있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순진한 사람이었지.’
선조가 노골적으로 노수신을 거듭 영전시켜 조정에 복귀하고도 어디 한 곳에 뿌리를 박지 못하고 겉돌아온 노수신이었다.
꼭 독기를 품어야만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렇지 못한 노수신에게 스승과 사형, 동지들이 피땀으로 흘려낸 사림 세상이 고작 한 세대만에 분열되어 자중지란을 일으키는 몰골은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직을 청한 거다.
추잡한 조정의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아서.
“결국은 이렇게 되었군요.”
“후…….”
유희춘은 깊은 한숨을 흘렸다.
배소는 달랐어도 노수신과 마찬가지로 20년 동안 유배를 했던 유희춘이다. 그 누구보다도 가깝게 느껴졌을 노수신이 질려 떠난다니 유희춘도 마음이 편치는 못하리라.
흔들리는 걸까.
“제가 이래서 순자(荀子)를 좋아합니다. 하신 말씀 중에 틀린 말이 하나도 없거든요. 특히 치사편이…… 근래에 들어 많이 와닿는군요.”
순자는 유교의 성인 중 한 사람으로, 후세의 꼰대적 유학과는 달리 상급자와 하급자 간의 사이까지도 예(禮)와 의(義)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언급한 치사편(致士篇) 전반에는 군주의 올바른 태도를 강론하고 있는데, 이런 구절이 있다.
-어진 이를 등용한다고 입으로는 말하면서, 어진 이를 물리치는 행동을 한다면 어진 이가 진출하고 어리석은 이가 물러나기를 바람은 어렵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내가 지금 한 순자 타령은 왕이 아가리로는 백날 선비를 찾지만 하는 짓거리는 정 반대인 이간질 따위가 전부라 노수신이 도망간다는 소리였다.
“크흠!”
유희춘이 쓰게 기침했고, 나는 순진한 척 물었다. 물론 전혀 순진한 의도는 아니었다.
“옛 성인의 말씀이 옳다고만 할 뿐이었는데 영감께서는 무엇이 불편하신지……?”
“불편한 게 아니라.”
“대사간도 못 해먹겠다 싶었나봅니다.”
대사간. 이이.
나의 편이 되기 직전, 왕의 무관심과 형식적인 반응에 질려 관직을 때려치운 상태였다.
“이보게!”
이전부터 이이와 함께 왕을 상대로 많은 말을 나누었던 유희춘에게는 다양한 의미일 수밖에 없었다.
노수신은 물론이고 이이도 질렸다는데 당신은 어떻냐는 도발이 될 수도 있고, 마찬가지로 사직해야지 않겠냐는 제안이 될 수도 있었다.
혹은 선조가 어진 선비들을 잘 쫓아내는 못난 놈이라는 강조가 될 수도 있겠지.
어느 쪽이건 유희춘에게는 마음 편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라, 반응은 조금 격했다.
“내가 이 자리에 참의를 데리고 왔네, 참의가 나를 데리고 온 것이 아니라!”
“그렇지요.”
“…….”
내가 선선히 인정하자 막상 다른 말을 꺼내지 못하는 유희춘이었다.
안 그래도 복잡한 심경을 내가 잔뜩 흔들어놓은 것일까. 고개를 떨어뜨린 채 이마만 싸매는 유희춘이었다.
나는 가볍게 말했다.
“조금 취합시다. 제정신으로는 피곤할 테니.”
“후.”
잔을 채워주니 유희춘은 단숨에 털어 넣었다. 속의 열기를 다스리겠다는 듯. 하지만 나온 반응은 무거운 분위기를 단숨에 깨버리는 것이었다.
“켁! 컥! 캬학!”
목에 걸리기라도 한 것일까.
기침과 함께 술을 분무하는 유희춘이었다.
“하하하하!”
내가 빵 터져 웃자 유희춘은 눈물을 찔끔 흘리며 술을 원망했다.
“아니, 술이 왜 이리 세?!”
“분위기 전환의 기술을 하나 배웠습니다.”
“노린 게 아닐세!”
“그렇다고 믿어드리죠.”
“……끄응!”
뒤늦게 잔을 기울이자.
“오!”
나도 도수에 놀랐다.
정철 덕분에 독주를 많이 접해본 나조차 놀랄 정도이니, 이건 정말로 도수가 높은 물건이었다.
이런 걸 주의하지도 않고 바로 목구멍으로 때려 넣었으니 몸개그를 할 수밖에.
“세군요.”
“가장 좋은 술로 가져오라 했더니!”
“좋은 술이긴 합니다, 하하.”
은은하게 노르스름한 빛깔, 달고 알싸한 맛이 딱 계당주(桂糖酒)다.
주재료인 계피와 꿀 모두 귀한 재료인 만큼 소주 중에서도 고급 소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유희춘은 계당주건 뭐건 호감이 싹 사라졌다는 듯 투정을 부렸지만.
“에잉!”
“그래요, 그래. 술 이야기 말고 일 이야기 합시다.”
“그러세!”
민망한 처지라 유희춘은 기꺼이 화제 전환에 동의했다.
“상황이 어떤지 알려주시지요. 공판께 들은 것은 봉상시 아전들이 상의원 뽕나무밭을 망쳐, 아전들의 처소를 줄이기로 했다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게 전부 맞네. 원래는 아전들이 머물 여막을 완전히 없애버리기로 했지만, 두 개는 남겨놓기로 했는데 그마저도 너무 과한 축소라.”
아전이 몇 놈인지는 모르겠으나 아홉 채에서 살던 인간들을 두 채로 몰아넣자니 확실히 처벌이 과했다.
콩나물 시루도 아니고.
나아가서 거처를 싸그리 없애버리자는 건 상의원 의견이었나?
도둑질도 괘씸하다만 그렇다고 아전들을 노숙자로 만들어버리려는 꼴을 보아하니 봉상시나 상의원이나 수준이 또이또이였다.
“그래서요?”
“이 사람이 두 개로 줄인 것은 과하다니 전하께서 답하시더군. 여막을 철거한 관아가 공조이니 여막 개수를 늘리건 줄이건 공조와 의논해서 해결하라고.”
왕노릇하기 편한 세상일세.
“제가 보기엔 여막 개수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어째서?”
“아전들이 뽕잎을 왜 훔쳤겠습니까?”
“탐욕스러워서 그렇겠지. 아니면 생각 자체가 없었던가.”
“지방에서 일하는 외아전(外衙前)은 적어도 유지 노릇이라도 합니다. 녹봉이 없어도 먹고 사는 데 문제없지요. 하지만 도성에서 근무하는 경아전(京衙前)은 순 비렁뱅이들 아닙니까.”
가난한 조선이라 일반적인 정직(正職) 관리들의 녹봉마저 염수처럼 짜지만, 교대 근무 중 실제 근무 기간만 녹봉을 받는 체아직(遞兒職)도 있었고 녹봉 자체가 없는 무록(無祿)까지 있었다.
이런 마당에 아전 따위에게 줄 녹봉이 있겠는가?
물론 ‘명목상’ 존재는 하지만, 관리들 녹봉조차 조선 초와 비교해 절반 수준으로 삭감됐다. 관리도 먹고 죽을 녹봉이 없는 마당에 아전 녹봉?
꿈결 같은 소리다.
물론 아전도 찌끄레기 공무원 비슷한 위치라 창조경제를 시도한다면 돈 나올 구석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봉상시는 제사를 전담하는 관청이었다. 이런 데서 밭이나 돌보는 아전에게 돈 나올 구석은 어디에도 없었다.
“굶어 죽기 싫으면 뽕잎이라도 훔쳐야겠죠. 대궐의 재물을 관리하는 상의원의 뽕나무라면 품질은 좋을 터이니.”
물론 뽕잎만 아니라 자신들이 관리하는 밭의 작물도 서리했을 거다. 단지 싹 다 같은 편이라 거론되지 않았을 뿐.
“이런 마당에 여막까지 철거해서 근무 환경을 개판까지 만들어 놨으니, 아마 도둑질이 늘었으면 늘었지 줄지는 않았을 겁니다.”
“음……!”
“그런데, 어딥니까? 현장을 보는 편이 상황 파악에 큰 도움이 될 텐데.”
“율도(栗島)일세. 가겠다면 배 타고 가야하네.”
“예?”
율도(栗島).
친숙한 이름으로는 밤섬! 한강에 있는 그 밤섬 말이다!
“그 콩만한 섬에서 한쪽은 봉상시 밭을, 다른 쪽은 상의원 뽕나무를 관리한다고요?”
“그렇네.”
“…….”
유희춘의 태연한 대답에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자기가 밤섬에 갇혀 쉰내 나는 남자들과 함께 난방도 안 되는 오두막에서 밭을 지킨다고 생각해 보라. 벌써부터 깝깝하다.
그런데 반대편에는 상의원의 뽕나무밭을 지키는 아전들이 있다.
양쪽 모두 본청에서 수확량을 이유로 매일 같이 쪼아댈 텐데, 아전 나부랭이 처지에 감히 항거할 수도 없으니 저들끼리 콩만한 밤섬에서 수시로 지분 싸움을 했을 거다.
여기가 우리 땅이니, 저기가 너희 땅이니…….
말싸움이 격화되면 주먹질도 오가고!
당한 쪽은 화가 나서 반대편 밭에 작물 테러도 하고!
그러다 수확에 차질이 생기면 또 쪼이고! 빡치고! 싸우고!
소속이 다른 두 무리를 몰아넣은 것부터 문제가 크지만, 하다못해 월급이라도 빵빵하면 모르겠으되 무급 인턴 처지에 이따위 짓거리를 하는 판국이었다.
‘누가 미쳐서 섬에 있던 인간들 모조리 회 안 친 것만으로도 용하다.’
나는 또 어디 성저십리 근방의 일인 줄 알았지.
밤섬?
이야…….
노비들도 화들짝 놀랄, 인권유린의 첨단을 걸어가는 인외마경이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는 줄은 상상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