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03화
35. 인외마경 율도국 (1)
“다시 돌아왔군그래.”
공조판서 박영준이 반겼다.
이곳은 공조의 당상관청.
“참의 이순신! 갑술년! 1월 2일! 공조 당상관청으로! 전입을! 명 받았습니다!”
“뭐? 하하하!”
박영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단숨에 분위기가 좋아졌고, 나는 웃으며 제대로 인사했다.
“간만에 사모 쓰고 인사드립니다, 대감.”
“나도 마찬가지일세. 참의가 다시 복직될 줄 알고는 있었지만 시간이 제법 흘렀군.”
“덕분에 바쁘게 지냈습니다.”
꼭 일을 해야만 바쁜 것은 아니다. 나는 제삼당 조직을 위해 꽁지 빠지게 돌아다녔고, 덕분에 많은 우군을 만들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이이와 허엽. 권철을 포함한 권 가와 눈앞의 박영준이 그러했다.
“인사드리게. 이쪽은 참판을 지내고 있는 이준민(李俊民)일세.”
이준민은 상석 오른편이 자리해 있었다.
쉰은 넘긴 원숙한 모습에, 약간 말랐으나 인상은 인자했다. 덕분에 친해지기 어려운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참의 이순신입니다.”
“이 참판일세. 앞으로 잘 일해보도록 하지.”
짧게 인사가 나눠지자 박영준이 덧붙였다.
“이 참판의 외숙이 바로 남명 선생이시네.”
남명 선생이라면 당연히 조식(曺植)이다. 이황과 함께 여러 동인을 가르쳤던 대학자 중 하나.
“오…….”
나는 감탄했으나 이내 쓰게 웃었다.
“참판께서는 요즘 조정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드시겠군요.”
동인의 스승인 조식을 외숙으로 두었다곤 하나, 그의 연배를 보아 본인은 서인과 가까울 터였다.
한때 훈구척신을 몰아내고자 함께 목숨 걸고 싸웠던 서인 동지들이, 지금은 외숙인 조식의 제자들과 싸우는 중이었다.
양쪽 모두와 인연이 있는 참판으로서는 어느 한쪽을 편들기 어려운 상황. 물론 선택의 어려움보다도 사림의 자중지란 자체가 더 불편할 그였다.
“하아…….”
과연 깊은 한숨으로 운을 떼는 이준민이었다.
“물리쳐야 할 적들이 사라지자 서로를 물어뜯으니, 지금의 세상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두 눈으로 직접 보아온 사람으로서는 씁쓸할 뿐이네.”
“음.”
“이 참의는 분란을 최소화하고자 애쓰고 있다면서?”
“과장입니다.”
나는 긍정하면서도 별 것 아니라는 듯 에둘러 표현했다.
이준민은 들어서 알고 있다는 듯 말하고 있으니, 애초에 부정은 무의미했다. 다만 풍문이 돌고 있다면 위험했다.
내가 제삼세력을 형성하고 있다는 소식이 선조의 귀에까지 전해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으니까.
솔직히 겁이 아주 안 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과연 이준민이 어째서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일까.
‘혹시…….’
내가 박영준을 바라보자, 박영준이 미안하다는 투로 말했다.
“참판께서도 요즘 시국에 아쉬움이 많은 듯해서 말이네. 참의가 근래에 힘쓰는 일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해보니 기꺼이 힘이 되어주겠다 약조하시더군.”
“아.”
“내가 오지랖이 넓었나?”
“아니요.”
나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오지랖이긴 하나 참판은 종이품 대신이다. 고관풀이 부족한 내 세력에 이만한 사람이 나의 편이 되어준다면 든든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준민의 성격을 보아 가까운 시일에 영입을 시도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나는 말을 아낀 채로 그를 얻을 수 있었다.
“판서 대감께서 소관의 소박한 바람을 높게 평가해주시고, 또 도움까지 주시니 감사할 뿐이지요.”
“다행이군.”
박영준이 또 눈치가 빨라.
세간 사람들은 일신의 안위에만 매달린다고 혹평하지만, 이런 바닥에서는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거다.
판서와 참판이 나의 편이라면 공조에서 뻘짓거리만 하다 나오지는 않겠군.
마침 공조는 여타 관청보다도 토목공사 등의 실체 있는 결과를 도출하는 데 역할이 집중되어 있다.
‘달리 말하자면 공을 인정받기 쉽다는 뜻이기도 하지.’
소프트의 발전과 혁신은 가시적이지 않다. 그마저도 쉽지 않다는 건 차치하고, 변화의 결과가 도출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본질적인 개혁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소프트의 발전은 필수 불가결이다.
하지만 사후에나 재평가받는 일은 사양이다. 나에게 필요한 건 존재가치 증명이었다. 더 많은 추종자를 끌어모으고, 선조조차 나에게 쉽게 손대지 못하도록.
“예전부터 관련 관직을 얻으려면 해보고 싶었던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래?”
박영준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대부분은 뜨신 자리에 앉아 문서나 뒤적거리길 원하지, 육조 중에서 제일 끗발 떨어지는 데다 현장 출장도 흔한 공조는 바라지 않으므로.
정작 이조에서 일할 때는 그냥저냥 때우던 이순신이 공조에서 화색이 밝으니 별일이었다.
판서인 입장에서는 이순신이 성과를 내준다면 그저 고마울 뿐이지만.
“무엇인가.”
“굴포운하(掘浦運河)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
굴포운하 소리에 판서 박영준은 물론 참판 이준민도 깜짝 놀랐다.
굴포운하(掘浦運河)가 무엇인가?
태안과 서산 사이는 북쪽의 가로림만과 남쪽의 천수만이 깊게 파고들어 육지가 병목처럼 좁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 조운선들은 세곡을 옮기기 위해 태안 전체를 빙 돌아가야 했는데 해당 해역은 거센 파도, 잦은 암초, 난해한 해류 등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조운선이 침몰하여 상실되는 세곡의 총액이 해마다 만 섬 단위일 지경이라, 조선에서는 물론 이전의 고려에서도 문제가 제기되었고 대안으로 나온 것이 바로 굴포운하였다.
앞서 언급되었던 태안과 서산 사이의 좁은 육지를 뚫어 새로 수로를 내어, 조운선의 망실을 최소화하자는 개념이었다.
해마다 만 섬 단위의 세곡은 쌓일수록 엄청난 양이 되기 때문에, 고려조는 난항을 예상하고도 공사를 강행했으나…….
실패했다.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막 개국하여 가장 강대할 시점인 태조와 태종의 치세에서도, 전조 고려가 남긴 흔적을 이용해 공사를 재개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참의…….”
이러한 역사를 뻔히 아는 박영준으로서는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내 자네가 재주 있는 사람이라는 건 잘 아네. 하지만 굴포운하를 완성하겠다는 말은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수준 이상으로는 안 느껴지는군.”
“어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굴포운하는 전조에서 첫 삽을 뜬지 450년도 더 지났지만, 그동안 단 한 번도 유의미한 결과를 보지 못했네.”
“그래서 저도 못하리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박영준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무슨 뜻으로 받아들였냐는 듯. 뻔한 소리를 한다는 투였다.
태안은 통짜 화강암 덩어리나 다름없었다.
중심부에서 멀지 않은 백화산에서도 듬성듬성 드러난 그 통짜 화강암의 일면을 볼 수 있다. 이딴 게 땅 조금 파면 나타나는데 운하를 어떻게 판단 말인가?
조선 시대에서 믿을 것이라곤 사람 손밖에 없는데 화강암 상대로 괭이질하다간 병신 만들기 딱 좋았다.
“못 믿으시겠다면 어쩔 수 없지요.”
“비책이 있다면 말이나 해보게.”
“흐음……. 대감께서 믿음이 없으셔서 비책을 알려드릴 수 없겠군요.”
박영준의 미간이 줄어들었다.
불쾌해하나, 싶었으나 박영준은 인상을 풀고는 피식 웃었다.
“자네가 이렇게까지 나를 도발하는 걸 보면 비책이 있긴 있군?”
“흠, 흠.”
“믿겠네. 믿어야지. 내 이 참의가 아니면 누구를 믿을까?”
“감사합니다.”
“비책은?”
“생각해둔 바가 있으나, 실제로 가능할지는 의문입니다. 당분간 다른 업무를 하면서 경험을 쌓으며 현실화할 방도를 모색해보려 합니다.”
“음. 기대하지.”
“반드시 부응하겠습니다.”
박영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떡밥만 흘린 셈이었으나 박영준은 더는 호기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극적인 결과물을 위해 인내심을 발휘한 것일까.
잡담이 끝나자 각자에게 업무가 배정되었다. 나 역시 첫날이지만 바로 일거리를 받았다.
“유 부제학은 어째서요?”
부제학 유희춘. 내가 홍문관에서 응교를 지낼 때 상관으로 있었던 사람이었다.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었는데, 그가 장필무의 논란거리를 지적하는 과정에서 내가 애먼 타격을 입는 바람에 묘해진 관계였다.
그렇다고 내가 유희춘을 싫어하는 건 아니고, 유희춘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한다. 의도한 바가 아니었으니까.
단지 얼굴 보기가 어려워졌을 뿐. 관청도 달라졌겠다, 실제로 이조참의에서 체직된 이후 면대한 일이 없었다.
“이번에 유 부제학이 이전 공조 당상들이 중재한 일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네. 전하께서는 유 부제학에게 공조와 다시 상의하라 명하셨고.”
“무슨 일이랍니까?”
“봉상시의 밭을 지키는 아전들이 밭과 맞닿은 상의원의 뽕나무밭에서 뽕잎을 훔쳐대어, 뽕나무가 상하니 아전들 처소를 줄이자는 것이었지.”
“도둑질이 일어나는데 처소는 왜 줄이는 겁니까? 도둑놈을 발본색원하여 일벌백계해야지.”
“내가 그때 공판은 아니어서 잘 모르지만, 경고하는 게 아닐까 싶네. 더 불편해지기 싫으면 도둑질 그만하라는 것이지.”
“흠.”
“전임 공조 당상들이 처리해야 했는데 사람들이 바뀌어서 붕 뜬 상황일세. 유 부제학 쪽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더 기다리면 끝도 없이 늘어질 것 같아서.”
나는 씨익 웃었다.
“유 부제학이 왜 연락을 안 하고 버티는지 알 것도 같은데, 대감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으음……. 부제학 덕분에 내가 관직이 갈렸으니 부담스러웠겠지.”
“관직이 갈린 건 소관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만.”
박영준이 덧붙였다.
“그렇다고 참판을 보내랴?”
종이품 참판이 정삼품 부제학을 직접 찾아간다는 것도 모양새가 빠지지만, 하관 사정이 애매하다고 상관이 직접 나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가 아니 간다고 했습니까? 흠흠. ……미리 좀 처리하시지.”
“참의가 올 줄 알고 있었으니까 내버려 둔 거야. 유 부제학이 부담스러워한다는 건, 달리 말해 죄책감이 있다는 뜻이니. 자네라면 협조적으로 나오겠지.”
하지만 유희춘의 협조와 봉상시의 말단이 상의원의 뽕잎을 훔치는 건 별개의 일이었다. 또 도둑질이 일어났다간 책임을 죄 뒤집어쓸 터였다.
박영준 이 양반.
말도 없이 참판 이준민을 영입한 것도 그렇고, 내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면 슬쩍 도움을 줘서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나 본데…….
제삼당 영수는 오직 나뿐이다!
“깔쌈하게 처치하고 오겠습니다.”
나는 자신 있게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당상대청을 나섰다.
“정 곤란한 일 있으면 도와달라 하게.”
흑심을 드러내는 박영준을 뒤로하고.
* * *
“아……. 음.”
유희춘은 나를 마주하자 당혹스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참의께서 오셨군.”
“편하게 대해주셔도 됩니다, 영감.”
“아닐세. 이제는 관품도 같으니…….”
어색하게 어려워하는 유희춘이었다. 정말로 부담감이 있었나 보다. 시선과 함께 고개를 돌리며 무안해하는 것을 보면.
나와 함께 일해본 사람이라, 내가 희생을 자처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전부터 내가 인사비리나 저지를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 자신이 저격한 장필무는 어떠한 타격도 입지 않았는데 뜬금없이 나만 관직이 갈렸으니 유희춘도 당혹스러웠겠지.
책임소재를 따지자면 무협 고수마냥 유희춘의 저격을 흘려 나에게 날린 선조에게 있지만, 신하인 유희춘이 선조 탓을 할 수야 있나.
똥은 선조가 쌌는데 애먼 사람만 죄책감을 앓는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