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02화
34. 명분 (2)
“근래의 소문은 이미 접해보았습니다.”
류성룡이 말했다.
“무슨 소문을 말씀하시는 건지.”
“영감께서 이조의 책임을 직접 지셨다는 소문 말입니다.”
“아.”
류성룡 역시 나에게는 이이와 마찬가지로 영입 대상이었다.
역사에서는 동인의 거두로 성장했으나, 당색이 짙지 않았고 온건한 편이라 불가능할 것은 없다 싶었다.
이미 서인 영수인 이이를 끌어들였는데 류성룡이라고 못 하겠나.
못 본 시간이 길었지만 다시 차차 만나면서 친밀함을 쌓을 여유는 없었다. 사림의 분열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고 류성룡이 동인에 가담하게 된 후에는 너무 늦을 테니까.
나로서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어느 쪽이라도 서애께 좋은 소리는 못 들을 터이니, 이 사람은 말을 아끼겠습니다.”
가볍게 웃어주니 류성룡이 말했다.
“영감께서 정말로 인사비리를 저지르셨다면, 송구한 말씀이지만 소관이 좋게 생각하지는 못하겠습니다만 이조를 위해서 희생하셨다고 나쁘게 생각할 수는…….”
“그래요? 이것도 따지고 보면 기군망상인데.”
“음.”
류성룡은 짧게 침음하고는 답했다.
“잘못은 잘못입니다만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으니 죄를 물을 수는 없지요.”
“의외인데요? 서애시라면 그것대로 불충이라고 한 마디 하실 줄 알았습니다만.”
나에게는 은영연 직전의 자리에서 개꼰대처럼 굴던 류성룡의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관직생활을 하면서 조금 유해진 걸지도 모르겠다.
“소관이 한동안 못난 사람이기는 했습니다만, 그 정도는 아닙니다.”
“으음, 믿음이 안 가지만 그렇다고 하시니. 이 사람이 믿어드려야지요.”
“끙.”
류성룡이 앓는 소리를 내자, 나는 웃어주고는 화제를 돌렸다. 고작 잡담이나 하고자 저택에 초청한 게 아니었으니까.
“서애께서는 요즈음 벌어지는 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태라 하신다면…… 소관은 솔직히 사태라는 표현도 거북합니다.”
“이런.”
“개의치 않습니다. 단지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하니까요. 단지 별 것 아닌 일을 괜히 과대평가하는 게 아닌가 싶어 그럴 뿐입니다.”
“과대평가요?”
위인이니 통찰력을 가지고 앞으로 벌어질 일을 능히 짐작하리라 믿고 있었으니까. 이이도 그렇지 않았던가.
그런데 류성룡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하고 있었다. 예상치 못했던 의외의 반응.
“몇몇 분들은 이번 사태…… 아니 상황이 심각해지리라 예상하고 있던데요. 이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영감의 추측이 옳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소관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런 생각이 작금의 사소한 분란을 더 키우는 게 아닌가 하고요.”
“흠.”
확신인가, 바램인가.
오히려 전자가 설득은 쉬웠다. 사실이 그렇지 않음을 알려주면 되니까.
이이 역시 현실을 외면하려 하였으나 결국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상책이며 해답이 될 수 있을지를.
오히려 실체 없이 막연한 바람이야말로 마음을 돌리기 어려웠다. 설령 사실이 그렇지 않더라도, 나의 바람대로 흘러가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류성룡은 어느 쪽일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함께 목숨을 걸고 척신을 물리치고자 애쓴 사이 아닙니까. 고작 자리 하나를 가지고 극단적인 상황으로 흘러갈 것 같지는 않군요.”
이런…….
어조에는 힘이 담겨있지만 이건 확신보다는 바람에 가깝다.
자리 하나 때문에 극단적인 상황으로 흘러갈 것 같지는 않다고? 한평생 알고 지낸 죽마고우도 고작 몇만 원 빚에 원수가 되는 법이다.
하물며 당하관직과 청요직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이조전랑의 자리는 단순히 ‘자리 하나’로 치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영감께서는 생각이 다르신 모양입니다?”
“아…… 하하하.”
나는 멋쩍게 웃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최근의 흐름에는 모종의 의도가 있다고 봐요.”
“의도라면…….”
나는 이이에게 해주었던 말을 조금 유순하게 다듬어 다시 내뱉었다. 류성룡은 짧게 침음을 흘려댔으나 반박은 없었다.
끝에 이르러 나는 다시 한 번 부드럽게 깎아 이야기를 끝냈다.
“증좌는 없지만요.”
꼭 물증이 있어야만 확신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일이 이미 계획이라도 되어 있다는 듯 차곡차곡, 빠르게 진행된 것과 오건이 증발하듯 사라져버린 일은 수상하다못해 썩은 냄새를 풍길 정도였다.
“영감께서 이 이상을 우려하시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세요.”
“여기에 의도가 있다 함은…….”
누가 사림의 분열을 바라겠나?
뻔하지.
선조다.
물론 사람과 척진 사람도 용의자 선상에 못 오를 것은 없으나, 전통적으로 사림과 경쟁해 왔던 훈구파는 세가 기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멸망했다 봐도 무방했다.
그나마 좌의정이라는 고위직을 지내면서 잔당 규합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오겸마저 정치생명이 끝나면서 훈구파는 과거의 존재가 된 지 오래였다.
물론 훈구파의 실체가 존재해야만 복수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잔당 중 유별나게 계획력이 뛰어난 자가 있다면 음모를 꾸밀 수도 있겠지.
하지만 패망한 세력의 잔당 따위가 조정을 장악한 실세의 구성원들과 최고 핵심 관청인 이조를 제어할 수 있겠나?
이 일을 꾸밀 능력과 그래야 할 이유를 동시에 갖춘 자는 오직 선조뿐이었다.
“크흠.”
불쾌한 진실을 마주한 류성룡은 무안함에 헛기침을 토해냈다.
“설령 추측이 사실이 아니라도, 천하대세는 합구필분이라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할 최선의 방도라는 것이 기대만은 아니겠지요.”
마치 나에게는 다른 수가 있다는 듯한 말이었다. 맞다. 떡밥이었다. 류성룡을 낚기 위한 미끼.
자신의 바람과는 역행하는 현실에 혼란스러워하는 류성룡이었으나 약간의 ‘호기심’을 드러내는 게 죄는 아니잖나?
“그럼……. 영감께서는 달리 생각해두신 바가 있으십니까?”
대번에 미끼를 물어버린 류성룡이었다.
“보아하니 조정은 심 영감과 김 공을 각자 두둔하는 사람들로 패가 쪼개질 것 같더군요. 마침 두 무리에는 공통점이 적으니 필연적인 흐름일 겁니다.”
서인은 명종 치세는 물론 중종시대 출신의 인물들도 포진해 있어 나이대가 높은 편이었다.
훈구척신이 주름잡았던 시대에 가문과 환경을 배신한 이단아였고, 믿을 건 서로밖에 없는 세상에서 사림 세상을 이룩하기 위해 무수한 피를 흘려야 했다.
사림의 적통이라 할 수 있었고 각자가 사림 세상을 이뤄낸 공신들이었다.
동인은 정반대다.
서인이 혈전을 벌이던 시기 동인들은 이황이나 조식 등 스승 밑에서 공부하다 사림 세상이 이룩되자 조정에 편하게 입성한 부류였다.
사림 세상 이룩의 공훈이 미미하나 가문과 환경이 한미한 대신 훈구척신과 엮이지 않아 출신이 깔끔하다는 점, 명성 있는 대학자 밑에서 수학했다는 강점이 있었다.
두 집단 모두 출신과 성장 과정이 판이한 데다, 서인들은 투쟁의 전우, 동인은 학맥으로 얽혀 각자 당파에 대한 동질감과 유대감이 강했다.
또 선발대인 서인은 각종 요직을 선점한데 반해 후발주자인 동인은 이제야 성장하는 상황.
애초에 사림은 구성부터 두 당파로 갈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고 분쟁 역시 필연적이었다.
“물론 현 상황이 방치된다는 전제하에서 필연적인 흐름이라는 뜻이지요. 달리 말하자면, 변수가 있을 때 흐름의 향방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겁니다.”
“변수라 하심은…….”
“제삼의 세력입니다.”
“음.”
“두 집단이 비등하다는 전제 하에서, 제삼의 집단이 매 상황에서 정당하고 옳은 선택을 해준다면 두 당파가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달아가기는 힘들어지겠지요.”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저울추가 필요하다는 말씀이시로군요.”
“맞습니다.”
류성룡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쉬이 자신의 의사를 꺼내지 못했다.
현 상황이 어떻게든 알아서 진화되기를 바라는 류성룡에게, 새로운 당파의 존재란 자칫 사태를 격화시킬 사유 외로는 보이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어쩌겠나.
그 편이 최선인 것을.
“희망도 좋고 기대도 좋지만 막연한 바람은 어떠한 결과도 도출하지 못합니다. 단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 꿈만 꾸었다는, 태만의 죄과만을 결과로 물어올 뿐이지요.”
“……!”
“생각이 달라지신다면 이 사람에게 말씀해주세요. 도움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예.”
류성룡은 힘없이 답했다.
내가 해준 말이 어지간히도 충격이었던 걸까. 마음을 흔드는 데 도움이 되었다면 나야 기쁘지만, 침울한 분위기는 사양이었다.
“자. 답답한 얘기만 한껏 해버렸으니 한숨 돌려주는 게 스스로를 위한 일이겠지요.”
나는 머슴을 시켜 주안상을 내오게 했다.
* * *
바삐 지냈던 덕에 제법 우군을 갖출 수 있었다.
먼저 장인 집안인 권철과 권씨들.
가문이 한미한 데다 최근에는 영의정 권철이 사직 상태가 되어 세가 많이 피폐해진 상황이었다. 저울추가 되어 조정 전면에 나서자니 권철은 오히려 기뻐했다.
저울추가 한자로 뭐냐?
권이다, 권(權). 권력(權力)할 때 그 권.
나의 제삼당이 양당을 제어할 수 있게 되면 규모는 작아도 존재감은 클 수밖에 없다.
초야의 사람이 되어버린 권철로서는 다시 실직에 나아가지 못하더라도 정계에서 비중을 회복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또 비중이 생기면 다시 실직에 제수도 있었고 말이다.
덕분에 권율을 포함한 권철의 아들들은 아버지에 의해 나의 앞에서 협조(충성)을 약속해야만 했다.
‘죽어도 못 놓는게 권력이라더니.’
다음은 허엽.
오겸이 몰락하면서 나와는 볼일이 없어진 사이였다. 그럼에도 허엽을 방문한 이유는 내가 그의 약점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협상 과정에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인질이 될 수 있다는 건 나와 허엽 모두 충분히 알 레벨이었다.
때문에 불청객의 처지를 감수하였으나 의외로 허엽은 나를 반겨주었다.
약속대로 오겸을 축출할 당시 자신에 대한 말은 나오지 않게 해주었다고.
나아가 그는 자신의 협조로 치부였던 오겸이 제거되자 해방감마저 느끼는 듯 했다.
과거의 죄를 조금이나마 속죄한 기분이라 했지만, 편하게 풀린 표정은 단지 ‘조금 속죄’해서 얻을 수 있는 만족감 이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협조?
그는 기꺼이 도움이 되어주기로 했다. 본래는 동인의 영수가 되어야 할 허엽이었으나, 인연으로 졸지에 제삼당 당여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물론 내 편에 붙는 쪽이, 거대 양당에 붙는 것보다 존재감이나 비중 확보에 유리하다는 사실도 주효했겠지.’
정치놀음에 실익이 없어서야 쓰나?
이조판서에서 공조판서로 전락한 박영준도 협조를 약속했다. 물론 판서급인 만큼 자신의 몸값을 높이고자 타협을 시도했고, 나로서도 어느 정도는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대감급이니.
신립은 구구절절한 설득 없이도 힘이 되어달라는 부탁 한 마디에 협조를 약속했고, 스승인 김성일은 확답하지는 못했으나 마음이 많이 흔들린 상태였다.
조만간 류성룡과 함께 답이 오겠지.
하지만 가장 든든한 사람은 이이였다. 좋고 나쁨을 떠나 조정에서의 저명함은 나조차 이이를 이길 수 없었으니까.
그가 작정하고 힘을 보태준다면 나의 발언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터였다.
‘이래서 싸울 땐 명분이 중요해.’
양당의 분란을 최소화하고 타협을 중재하겠다. 이 얼마나 좋은 명분이냐?
이익도 이익이지만 그림이 너무 좋았다. 덕분에 실익을 챙기는 부류대로도 붙고, 대의를 따르는 부류대로도 붙은 상황이었다.
나랑 똑같은 짓을 해서 신하들 힘을 빨아먹으려던 선조는 제삼당 등장과 함께 고혈압에 걸릴 게 분명했다.
선조야! 미안하지만 나도 같이 빨아먹자! 니만 입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