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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01화 (101/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01화

34. 명분 (1)

선조가 사림의 분열을 원한 이유는 분명하다.

신권이 뭉치면 왕에게 위협이 되니까.

때문에 사림의 독주 체제를 뒤엎을 필요가 있지만, 왕권의 강화를 절실히 원한다면 다른 이유도 있을 터였다.

예를 들자면 신하들 사이의 분란을 조절하는 위치에서 이익을 최대한 빨아먹을 생각이라던가.

두 세력이 비등한 수준으로 싸우게 되면 특히 결정권자에게 힘이 실릴 수밖에 없었다. 양편 모두가 왕에게 잘 보여 자신들이 바라는 결과를 얻으려 할 테니까.

‘그걸 내가 보면서 구경만 할 수는 없지.’

왕이 결정권자 위치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정쟁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변수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꼭 왕만 변수라는 특권을 누려야 한다는 법은 없다. 나 역시, 충분히 변수가 될 수 있었다.

‘세력을 갖춘다면 말이지.’

당파급 힘을 가질 수는 없겠지만 이런 힘들을 규합한다면 충분히 발언력이 생기게 마련이고, 동서인 양당에게는 새로운 선택지가 될 터였다.

굳이 왕에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가며 비굴하게 복종을 맹세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답이라면 굳이 그러야 할 필요가 있나?

‘일부는 왕이 아닌, 나에게 잘 보이려 할 거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더 의식하게 만들려면, 발언력 역시 더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영의정까지 지낸 권철과 그의 아들들, 재상급 인물임에도 나에게 두터운 호의를 비치는 박영준.

인지도도 있고 명성도 있으나 마냥 좋은 쪽만은 아니다. 힘은 되어주겠지만 이래서야 내다 당파 싸움 사이에서 이익만 노린다는 인상을 벗어날 수 없다.

신립 역시 나에 대한 호감을 거두지 않았다면 영입 가능할 거다. 스승인 김성일도 가능성은 있고, 적이 뚜렷하지 않은 이순신도 기대를 걸어볼 법하다.

하지만 이들의 문제는 여론에 보탬은 될 수 있어도 발언력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거다. 관직이 낮거나 무인이었으니까.

‘중견 위치에서 발언력과 여론 유도, 그리고 정당성에 힘을 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이지.’

마침 나는 봐둔 사람이 있었다.

이이!

그는 사림의 분열 이후 양측의 화해를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이미 벌어질대로 벌어진 동인과 서인은 타협하지 않았다.

몇몇 사람들은 이이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겠지만 구성원 대다수가 마음을 돌려먹지 않는 한 집단의 방향은 바뀌지 않는 법.

더군다나 동서 분열 이전부터 조짐은 있어왔고 분열은 대세이기도 했으므로 이이가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혼자서 시류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결국에는 어영부영 서인의 영수 비슷하게 되었지만…….’

공인 미친놈 소리를 들을 정도로 지랄 맞은 성격과는 별개로, 집단을 제어할 카리스마는 부족했던 탓인지 서인들은 이이를 훈장으로 이용했을 뿐 그의 주장에 따르지는 않았다.

타의에 의해 영수로 추대되어 끌려다닐 뿐이었다면 그것대로 비참했고, 자의로 도박을 시도했더라도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안타까운 일이지.

‘그럼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양당의 화평을 위해 애썼다.’

나라면 이이에게 이상적인 비전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가 원하고 그가 바랄. 감정적으로는 조금 내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응할 수밖에 없는.

어쩌면 천하의 이이를 내가 당여로 부릴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알고 지낸 지 고작 몇 년의 세월이지만 마냥 짧다고는 못할진대, 자칭 형과 부담스러워하는 동생 사이에서 이런 관계까지 될 줄은 나도 몰랐다.

‘뭐…….’

세상이 험한 탓 아니겠나.

처음 권철에게 조정으로 복귀해, 힘을 쌓으라는 제안을 들었을 때는 많이 흔들렸지만.

내가 두 번째로 회령을 다녀오며 느낀 건 자신이나 주위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는 역시 힘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평화롭게 살고 싶대도 힘이 없으면 휩쓸려야만 한다.

이미 눈에 띈 상황이라 이제 와 마음을 고쳐먹어도 조용히 살기는 그르긴 했으나, 처음부터 두각을 드러내지 않기로 했대도 지금과 같은 결말은 다르지 않을 터였다.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한 몸만 건사하여 산 깊숙이 어딘가에서 풀뿌리와 나무껍질만 파먹을 생각이 없었다면 말이다.

물론 나에게는 절대 만족스런 선택지는 되지 못했겠지.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듯…….’

여기까지 왔을 뿐이다.

주위 사람들 사이에서는 약간의 관계 재조정이 있겠지만, 내가 일개 판관일 때에 비해서도 지금 관계는 많이 달라진 터라 특이할 것도 없었다.

단지 한 번의 재조정이 더 들어갈 뿐이지.

설령 서인의 영수가 되고 위인전에 실릴 이이라도 나의 결심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아.

마침…….

-쿵, 쿵.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이.

미리 서찰을 통해 불러두었다. 이제는 설득하는 일만 남았다.

쉬이 협조를 약속하지는 않겠지. 관계 재정립까지 더하면 난행이 따로없었다. 물론 각오는 해두었다.

“어, 참의!”

이이가 손을 들며 반겨주었다.

“대사간 영감 아니십니까.”

“영감은 무슨, 따지자면 아우께서도 영감인 것을.”

내가 지냈던 관직인 이조참의 역시 대사간과 마찬가지로 정삼품이었다. 전직이라 끗발이 밀리긴 하지만, 따지자면 동급인 셈.

예전에는 형님을 자처하며 편히 대해주던 이이의 태도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자리하시죠.”

나는 내가 자리한 쪽마루 옆을 가리켰다.

“밖에서?”

“선선하니 좋지 않습니까.”

“아우님 배려에 감사해야겠는걸.”

“이런. 눈치채셨습니까.”

최근 이이는 대사간의 자격으로 선조에게 상소를 올렸다.

내용은 오늘날 조정의 기강이 무너졌으니 의식하여 다스리고 간관에 자격 있는 사람을 갖추라는 것.

심의겸과 김효원의 충돌로 사림의 분열이 가속되자 이이 딴에는 자신의 의견을 진달했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선조가 관심이 없을 때 으레 보여주는 반응만 다시 보여주었을 뿐.

“걱정해 주어 고맙지만 난 아무렇지도 않네.”

“소외당하는 충신처럼 억울한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부정하지 마시지요. 억지로라도 위안을 아니 받으시면 나중에 지치십니다.”

“……쩝.”

이이는 부정하는 대신 입맛만 짧게 다시고는 옆에 자리했다.

나는 노복을 시켜 주안상을 봐오게 했다.

“형님께서는 현명하신 분이니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오늘날의 분열은 오래전부터 예정된 일이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는 이이였다. 그라고 분위기의 변화를 읽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이전부터 선비들 사이에서는 학맥과 이론에 따라 조금씩 갈라지고 있었지.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빨리 격화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네.”

“신기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제가 자리에서 쫓겨난 것부터 시작해서, 사림에서 연배 있는 사람들이 이조의 요직을 차지하고, 때마침 오건이 사직하여 그들과 평소 반목하고 있던 사람을 추천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이건 다 일이 일어난 경과를 순서대로 읊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어떻게 짜맞추듯 틈도 주지 않고 일이 흘러갔는지.”

그랬다.

역사를 알고 있는 나야 뒤에 배후가 있음을, 누가 흉수(兇手)인지는 뻔히 알고 있었으나 이 시대 사람인 이이로서는 짐작만이 한계였다.

머리 나쁜 사람은 아니니 냄새는 맡았겠지. 그래서인지 놀라지도 않는 이이였다.

“으음.”

“특히 오건의 행방이 의심스럽지 않습니까? 그가 이번 사태를 노린 게 아닌 이상, 흘러가는 상황에 무척이나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그랬겠지.”

“분명 반응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없단 말이지.

물론 작금의 상황에 오건은 단지 단초만 제공했을 뿐, 책임소재가 있는 건 아니다.

다만 벌어지는 상황을 감안하면 오건은 진즉 김효원에 대한 지지를 다시 표명하거나, 혹은 추천을 철회해야 했다.

김효원 추천이 오늘날 사림 분열을 목표로 벌인 일이었던 게 아닌 이상.

“그런데 말이 하나도 없단 말입니다?”

이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불쾌함을 느낀다는 어조로 말했다.

“무엇을 말하고 싶으신 겐가?”

“형님꼐서 작금의 사태에 불안해하신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작 중립적인 위치에 서서 양측을 중재하는 정도로는 무엇도 이루실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가만히 앉아서 관망하라는 건가? 대세는 거스를 수 없으니?”

심화되는 분위기. 나는 입술을 핥았다. 바짝 메마른 상태였다.

이이는 평소답지 않게 단어 선택을 조심스러워하고 있었다.

대세라니?

물론 합구필분이라 하였으니 뭉쳤던 사림의 분열은 천하의 대세가 맞다. 하지만 그것을 의도하고 바라여 주도하고 일으킨 자는 따로 있지 않은가.

“거스르고자 한다면 못 거스를 것도 없습니다.”

“……어떻게?”

“무례한 말씀입니다만 형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겁이 나서, 실천하지 못하고 계실 뿐이지요.”

“아우님께서는 나를 우롱하시는 겐가.”

“진지하게 묻겠습니다. 형님께서는 진심으로 이 사태를 걱정하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최소화하시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단지 흉내만 내시며 위선으로 얻을 명성을 원하십니까.”

“뭣!”

이이는 마루를 때리며 일어났다. 쿵. 두꺼운 나무 바닥이 요란하게 울었다.

“내가 아우에 대해서 그동안 착각한 게 많은 것 같군! 오늘 일에 대해서는 잊을 터이니 한동안 보지 말게나!”

대접은 필요없다는 듯 솟을대문으로 향하는 이이였다. 나 역시 일어나 그를 붙잡았다.

“형님,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 기만입니다. 스스로에 대한 기만이요. 제가 기분 나쁘게 해드리려고 한 말이 아님을 알면서도 어찌 스스로를 속이십니까?”

“…….”

“이대로 나가시면 형님은 위선자가 되는 겁니다. 물론 부정하실 수는 있겠지요. 저야 남이지만, 자기 자신에게도 그러실 겁니까?”

이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거칠게 몸을 틀고는 말했다.

“동생의 말이 옳을 수도 있겠지.”

“옳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옳은 겁니다.”

“……언제부터 이런 사람이 되었나?”

“지금도 변하는 중입니다.”

이이는 침묵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여인들이 주안상을 든 채, 나와 이이의 소란을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아랫것들 보기 민망합니다. 돌아가시죠.”

“……후.”

이이는 짧게 한숨을 토해내곤 발을 돌렸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시 자리에서 벗어났을 뿐인데 마루의 온기는 다 달아난 지 오래였다.

주안상이 자리했고 나는 여인들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인들은 서둘러 자리를 피했지만.

이이는 나를 마주보지도 않고 시선을 조금 돌린 채 혼자서 잔을 채웠다. 그리고 단숨에 입에 털어 넣더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건드려서 안 되겠군.’

나 역시 이이가 진정될 동안 조용히 자작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이이는 얼굴에 붉은 기운이 감돌 즈음이 되어서야 나를 향해 말했다.

“아우님이 나에게 물었지. 진심으로 이 사태를 걱정하느냐고.”

“예.”

“진심이야……. 나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힘을 실어주십시오. 사림이 이대로 이원화되면 당파의 당여들은 사리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라 상대에 대한 적대감만으로 움직이게 될 겁니다.”

“아우께서 힘을 가지신다고 다를 게 있나?”

“예. 다를 거 있습니다. 많습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판단해 옳은 쪽 편을 들어줄 자들이 생긴다면, 저들은 서로에 대한 적대감만으로는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계기가 없으면 싸울 일도 줄어들고, 싸움이 줄어들면 적의도 가라않겠죠.”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잘하는 짓은 아니겠지요. 앞으로 고생할 거리가 늘어날 테니까요.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합니다. 옳은 일이라는 거.”

이이는 침묵했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고, 이이는 다시 자작하며 자신의 마음을 달랬다.

그리고 한참 후.

이이는 피로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네가 이겼어.”

“…….”

“일단은.”

“감사합니다.”

“내가 지금 한 선택을 후회하게 만들지 말게.”

“명심하겠습니다.”

이이는 후, 짧게 한숨을 흘리고는 다시 자신의 잔을 채웠다.

그 광경을 보며 나는 속으로 조용히 안도했다.

‘성공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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