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00화
33. 천하대세 (5)
“안 됩니다!”
심의겸이 외쳤다.
이조 당상대청에 일순 당혹이 맴돌았다. 판서인 정유길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갑자기 안 된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소관이 김효원이라는 자에 대해서 조금 압니다. 그는 이조전랑의 관직을 지낼 자격이 없습니다.”
“김효원에 대한 풍문이라면 내 들어본 적이 없지는 않네만…….”
그가 윤원형의 저택에 뺀질나게도 드나들었다는 것.
목숨 걸고 소윤 일파와 맞서 싸웠던 정유길로서는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자가 이제와서 사림의 일원이라는 듯 입 싹 닥고 뻔뻔하게 돌아다니는 것 역시 말이다.
그럼에도 내색하지 않았던 이유는, 일생의 황금기를 이미 지나친 늙은이로서 분란에 엮이고 싶지 않았을 뿐.
“오건이 후임으로 김효원을 지목했으니 개입할 수 있는 일이 아닐세. 국법에서 전랑천대(銓郞薦代)라는 이름으로 보장하고 있는 권한이니까.”
“그릇된 일이라면 응당 나서서 제지해야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오건이라는 자도 사실 전랑의 자리에 마땅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오건.
그의 가문인 함양 오씨는 즐비한 오씨 중 하나로, 사림이 척신과 맞서 싸울 때 어떠한 역할도 해내지 못한 가문이었다.
나아가 오건 역시 전하의 은혜를 입어 관문에 진출했으나, 충의를 발휘하여 간적의 죄를 규탄하는 대신 조용히 입을 다물고서 일신의 보전에만 급급했던 자였다.
그뿐인가?
박영준과 이순신이 각기 판서와 참의를 지낼 당시, 두 사람이 억울하게 정치적인 이유로 희생되자 자기가 무엇이라도 된 듯 이조의 문제는 일원인 자신에게도 있다며 사직을 청했다.
이건 죄 없이 희생당한 두 사람에게도 심히 불쾌한 만행일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자리를 가시방석으로 만드는 짓이었다.
마치 저 혼자 고고한 학이라도 된다는 듯.
정작 용기가 필요한 시절에는 누구보다도 보전이 급급했던 자가 감히 보일 짓이 아니었고, 실로 오만방자한 자였다.
그런 자가 이조의 전랑으로서 한때 나라의 인사를 좌지우지했다는 사실도 심히 불편하거늘, 이제는 아예 소윤 영수인 윤원형의 종자를 자신의 후임으로 지목하다니?
“이제라도 오건의 죄를 물어 삭직해야 합니다. 그리 한다면 감히 전랑의 권한을 들먹여 김효원을 앉힐 수는 없겠지요.”
삭직.
삭탈관직(削奪官職)의 줄임말로,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관직자 명단인 사판(仕版)에서도 이름을 없애는 형벌이었다.
이를 당한다면 오건은 이조전랑의 역사를 잃었으니 전직 전랑이랍시고 후임을 지명하는 자대권(自代權)을 행사할 수 없을 터였다.
“참의 말대로라면 김효원이 좌랑에 제수될 일은 없겠지. 하지만 이미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 사람인데, 이제 와서 치부를 찾아낼 수도 없거니와 굳이 찾아내더라도 좋은 인상은 받지 못할 걸세. 삭탈관직까지 갈지도 의문이고.”
정유길의 지적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이미 사람이 떠난 뒷자리를 뒤적거린다고 어떤 치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찾아낸다 치더라도 뒤늦게 들먹인다고 처벌할 수 있겠는가?
지대한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닌 이상 삭탈관직까지 이어지기란 요원했다.
심의겸은 입술을 씹었다. 불쾌했으나 부정할 수는 없었다.
“참의가 반대를 한다니 내 공문에 올리는 것은 며칠 늦추도록 하지. 하지만 이후에도 변화가 없다면 참의께서도 인정하셔야 할 걸세.”
“……예. 그러지요.”
단, 정말로 변화가 하나도 없다면.
심의겸은 퇴청한 즉시 할 일이 생겼다.
* * *
며칠 뒤 편전 집무실.
승전색이 승정원에서 올라온 공문을 바치고 물러나자, 선조는 따분한 눈길로 한가득 쌓인 일거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선조는 피로와 같은 하찮은 기분에는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처럼 권자를 들어 펼쳤다.
“……오.”
선조는 만족 어린 감탄을 흘렸다.
이조참의 심의겸의 상소였다.
전 이조좌랑 오건은 어떠한 인물이고, 또 그가 후임으로 추천한 김효원이 어떠한 인물이니 자대권은 정당하지 않으며 설령 유효하더라도 김효원은 이조좌랑이 될 자격이 없다는 상소였다.
탄핵과도 같았으나 공개적이지는 않았다. 딱히 공론까지 일으킬 생각은 없다는 듯.
‘이런 면에서는 은근히 착실한 늙은이야.’
조정의 분란을 바라지 않는다…….
“하하하…….”
선조는 비웃음 섞인 웃음을 흘렸다.
심의겸이 조정의 안녕을 생각하는 배려는 고마웠지만, 선조는 그 배려에 응할 생각이 없었다.
사실 선조가 원하는 것이야말로 조정의 분란이었으니.
‘오건을 내가 내보냈으리라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겠지!’
처음 이조의 당상직에 자리가 둘이나 났을 때는 모두가 불쾌함을 드러냈다. 인내의 열매는 단 법이라지만 선조로서도 많은 인내심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선조는 자신과는 크게 연이 없으며 서로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두 늙은이를 이조에 배치했다.
한쪽이 나서면 다른 한쪽은 방관한다는 느낌으로.
약간의 힘이 실리는 것도 좋았다.
판서인 정유길은 사림 모두가 존중하는 웃어른이다. 그가 심의겸의 행동을 방관한다는 것은 소극적인 용인과 다름없었고, 제삼자들에게 대의적인 느낌을 줄 수 있었다.
‘그리고 오건을 밀어내고 후임으로 김효원을 지목하게 했지.’
오건은 정말 존재감이 하나도 없는 놈이었다. 관직을 지낸 세월이 짧다고는 못할 터임에도 두각을 드러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뒷배가 되어야 할 그의 가문, 함양 오씨는 있으나 마나 한 수준이었다. 차라리 다른 본관을 사칭하는 편이 나을 정도로.
오건을 사직하게 만든 것은 일도 아니었다.
거기에 선조는 작은 부탁 하나를 얹었을 뿐이었다. 후임으로 김효원을 지목하라고.
‘이전부터 심의겸과 김효원은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의 불편한 기류는 왕조차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내막이라는 것이 실로 우스웠다.
김효원은 윤원형의 사위인 이조민(李肇敏)과 돈독한 사이였는데, 그를 만나고자 윤원형의 저택을 찾은 적이 있었다.
심의겸은 집안인 청송 심씨가 파평 윤씨와 인척 관계에 있어, 어른들 사정으로 윤원형 저택에 끌려갔고 말이다.
거기서 두 사람은 윤원형의 저택에 있던 서로를 훈구파에 빌붙은 내부랭이쯤으로 오해했고, 앙숙이 되었다.
동족 혐오인지도 모르리라.
변명인지 뭔지 각자의 사정이 퍼졌음에도 두 사람의 관계는 달라지지 않았다.
세상이 바뀐 뒤에도 김효원은 심의겸을 탄핵했고, 심의겸은 방어를 위해 김효원을 공격했다. 그렇게 오해로 빚어진 적의는 진짜 적의가 되었다.
‘수레는 이미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다는 거지.’
선조로서는 두 사람 사이의 사사롭고 개인적인 분쟁을, 보다 ‘유용하게’ 쓰기로 했다.
이렇게 힘이 실리고 저렇게 힘이 실리면서 결국에는 사림이 사림이 대항해 싸우는 이상적인 상황을 끌어내고자 말이다.
무릇 힘을 합친 신하는 감히 왕의 권위를 넘보게 마련이니, 대신 저들끼리 물어뜯게 만들어야지 않겠는가?
선조는 밖을 향해 일렀다.
“상선(尙膳) 있는가.”
상선(尙膳)은 내시부의 장관직. 두 사람이서 번을 돌아가며 왕의 곁을 지켰다.
“하문하시옵소서.”
“일단 들라.”
“예.”
짧은 대답이 있었고,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렸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늙은이가 공손히 손을 모아 입장했다. 대체로 늙은 내시들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편이었다.
눈앞의 상선도 마찬가지였다.
“부르셨사옵니까.”
“내 상선에게 시킬 일이 있어서.”
“하문하시옵소서.”
“소문을 하나 내줬으면 하는데.”
“…….”
* * *
“제가 잘못 찾아온 건 아니겠지요?”
심의겸의 저택.
과거 훈구파 명문가로서 세상이 바뀐 지금 세는 많이 기울었지만,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는 격언을 실감시켜주는 그의 거처는 휘황찬란했다.
언뜻 지나가다 본다면 ‘이런 집에서 사는 사람은 행복하겠지.’라는 편견이 들 정도이나, 지금 심의겸의 기분은 편견은 어디까지나 편견에 불과함을 증명하고 있었다.
“……아닐세. 후.”
심의겸은 체증 걸린 사람처럼 깝깝한 얼굴을 한 채로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들어오게. 손을 너무 오래 세워두었군.”
나는 뜰을 가로질러 심의겸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서니 그의 감정이 한층 가깝게 느껴졌다.
최근 소문 하나가 돌고 있었다.
‘심의겸이 전직 좌랑 오건이 후임으로 지목한 김효원을 극렬 반대하였고, 나아가 상소까지 올렸으나 반려되었다고.’
덕분에 도성은 각종 소문과 풍문으로 얽혀 시끄러운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때마침 심의겸이 나에게 보낸 초대날이 되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약속을 미루는 등 눈치를 봐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심의겸이랑 김효원이라니……. 내가 관심을 안 가질 수야 있나.’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계기가 무엇이냐? 바로 심의겸과 김효원이 이조의 핵심 관직인 이조 좌랑을 두고 싸웠기 때문이다.
문제는 심의겸과 김효원은 지인이 많았으며 심지어는 세대 차이로 인해 그룹이 명백하게 나눠진다는 점이었다.
애들 싸움이 어른들 싸움 된다고, 덕분에 두 사람의 감정적인 싸움은 순식간에 사림 올드비와 영비의 패싸움으로 변모했다.
이때 OB는 서인이 되고 YB는 동인이 되었는데, 이유가 경복궁 기준으로 OB 중심 심의겸의 거처는 서쪽, YB 대표 김효원은 동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플하고 명료한 작명이었고, 그만큼 사림의 내전은 터무니없는 이유로 벌어졌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한 세대 전만 해도 함께 목숨을 걸었던 동지들이 이제는 서로를 향해 목숨 걸고 싸우기 시작했다는 것은, 드러나지만 않았을 뿐 이전부터 내란의 조짐은 충분히 있었다는 방증이다.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의 싸움은 단지 제대로 싸우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다는 거다.
‘내가 나서서 막더라도 사림은 기회가 올 때마다 분열되려 하겠지. 뭉친 힘은 갈라지게 마련이니……. 천하대세는 분구필합 합구필분이라 하였다. 뭉친 서인이 이제 찢어지는 대세를 단기필마로 거스를 수는 없겠지.’
선조가 사림의 분열을 바라고 있다면 더더욱.
‘놈이 그렸던 그림이 바로 이거였나.’
역사의 흐름이야 알고는 있지만 게눈 감추듯 일이 진행되어버려 나로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조에 자리를 내어 심의겸을 앉히고, 사직소가 가납된 오건이 김효원을 후임으로 지목했으며, 이에 심의겸이 반대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하루’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경외심도 들 정도였다.
역시 선조가 마냥 미친놈인 것만은 아니구나 싶어서 말이다.
“심란하시리라는 건 압니다만 이런 상황일수록 잘 먹고 잘 즐겨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영감의 모습을 본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후.”
심의겸은 짧게 한숨을 흘리곤 물었다.
“자네는…… 내편인가?”
“팔은 안으로 굽게 마련이죠.”
“다행이군.”
심의겸은 내가 군기시 첨정을 지낼 당시 상관이었고 공통적으로 아는 사람도 여럿 있는 만큼 나와 가까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서인이 될 생각이 있는 건 아니었다.
나는 적당한 거리에서 선을 긋기로 했다.
“공론을 일으켜 도움이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한 때 참의를 보필했던 사람으로서 조언 정도는 해드릴 수 있지요. 이런 때일수록 식사를 잘 챙기셔야 한다는 것처럼 말이에요.”
심의겸은 아쉬운 얼굴을 했지만…….
그와 김효원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싸움은 고작 해묵은 감정싸움으로 치부하기에는 일이 훨씬 더 커질 예정이었다.
장차 동인이 될 사람들과도 연이 있는 나로서는 하나의 당적을 가지기 힘들었다.
물론 중립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위치이지만 어디까지나 어중간한 자들에게나 해당하는 사항이고, 나는 ‘어중간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선약이 있어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영감의 기분이 편치 않으리라는 것은 알지만, 이런 때 제가 아니라면 누구와 함께 대작하겠습니까?”
“……고맙군.”
심의겸이 흐릿하게 웃었다. 위안을 받은 것일까.
술상이 준비될 동안 나는 생각했다.
‘선조가 이렇게 나온다면 나 역시 발맞춰 움직여줘야겠지.’
이런 상황에서 이익을 볼 수 있는 입장은 놈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