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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99화 (99/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99화

33. 천하대세 (4)

“무슨 도움말인가?”

박영준이 물었다.

여차하면 도와줄 기세로.

‘좋아.’

나는 속으로 웃었으나 겉으로는 담담했다. 그리고 고대하던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사실, 소관이 화살받이를 자처하느라 오해를 많이 사지 않았습니까.”

나는 과거 상관이었던 장필무의 인사에 부정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관직이 갈렸다.

사실이 아님은 이조의 당상이라면 잘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대외적으로 나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이들은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자기 사람을 잘 챙긴다는 이미지도 좋지만 말이야. 그렇다고 부정까지 저질렀다는 이미지를 달 필요는 없거든.’

나는 말을 이었다.

“이런 말씀 드리기 조심스럽습니다만, 대감께서 괜찮으시다면 대외에 풍문 하나 내주심이 어떨지.”

“음.”

박영준은 풍문의 내용을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뻔했으니까.

내가 관직이 갈린 실체에 대한 것 아니겠나. 뻔했다. 알려진 것처럼 이순신이 부정을 저질러서 관직이 갈린 게 아니라, 희생을 자처했을 뿐이라고.

명백한 사실이었으나 박영준 입장에서는 껄끄러울 수 있었다. 내가 총대를 멨다는 것은, 나만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님을 뜻하니까. 즉 문제의 책임 소재가 분산될 수 있었다.

‘과연 박영준이 납득할까.’

한동안 박영준과 함께 일해보면서 직접 느꼈지만, 박영준은 몸을 사리는 타입이었다.

대외적인 평가 역시 마찬가지.

청요직을 지낼 때는 옳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았고, 당상이 되어서는 일신만을 꾀하여 권신에 가담하지 않고도 벼슬을 지낼 수 있었다며 처신술은 인정하면서도 소극적인 행동에 대한 피판을 받았다.

그의 평가가 어떻건 나는 박영준을 존중한다. 사사로운 친분 때문이 아니라, 혼란의 시기에도 한몸 건사하고서 여전히 재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점에서.

‘그래서 더욱 내 편으로 만들 필요성이 있지.’

박영준은 한때 나를 두고 권철과 경쟁하였으나 관직을 내려놓은 권철에게 남은 것은 잿더미에 불과하다.

몇몇 지인들이 당상에 자리하고 있으나 박영준처럼 적극적으로 나를 원하는 자는 없었다.

그가 나를 원한다면 나라고 그를 원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올라갈 사다리가 있는데, 왜 맨손으로 절벽을 올라가야 하나?

‘만일 박영준이 한 몸 사리고자 우군의 도움 요청도 거절할 사람이라면 못 쓰겠지만…….’

선조가 이조를 공격할 당시, 박영준은 다른 누구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대신 자신이 나서려고 했다.

그동안 소극적인 모습만 보아온 나로서는 의외의 책임감이었다. 단지 일신만 꾀하는 자라면 낼 수 없는 용기였다.

그래서 내가 대신 희생하기로 하지 않았나. 박영준은 보전하고서, 이참에 그를 완전히 내 편으로 만들고자.

이제는 마지막 관문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내가 첨정의 우려를 모르지는 않네. 설령 다른 관직이 제수되더라도, 부정을 저지른 자라는 오해를 받고 있다면 기분이 편할 수 없겠지.”

거절하기 위한 밑밥을 까는 건가.

나는 가볍게 웃어주고는 잔을 기울었다. 박영준이 말을 이었다.

“참의가 현명한 사람임은 알고, 그래서 노파심에 하는 말이네만 풍문이 위로 올라갔을 때 어떤 인상을 남길까 우려스럽네.”

이편으로 말을 돌리나?

억지는 아니다.

내가 관직이 걸린 사연의 전말이 드러나면 박영준의 입지도 타격이 간다. 남들 눈에는 그가 부하를 발패로 썼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으니까.

평소부터 자신의 안위를 아꼈던 그라면 이런 오해를 사는 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윗선, 그러니까 ‘선조’의 시선이다.

이조의 당상관이 아닌 이상, 장필무가 선조의 푸시에 의해 경상 병사에 제수되었고 뒤늦게 만들어진 논란에서도 보호하고자 이조의 관리를 대신 조졌다는 사정을 아는 자는 없었다.

이때 ‘이순신이 희생되었다.’라는 말이 나온다면 선조로서는 당연히 자신을 공격하는 줄 알 터였다. 전말이란 장필무의 일이 그의 잘못임을 명명백백히 드러내고 있으니까.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격.

하지만 선조는 눈치 볼 사람이 없는 도둑이라는 게 문제였다.

‘소문의 발원지에 대해 수소문할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

물론 흘러다니는 소문의 발원지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추적당할 것을 의식한 상황에서 퍼뜨린 풍문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그것을 모르고서 드린 부탁이 아닙니다.”

알고서 했으니 당신은 나를 도와주겠느냐, 말겠느냐 결정하라는 재촉이었다.

돌아오는 것은,

“……으음.”

침음이었다.

역시, 박영준 성격에는 무리였나?

씁쓸한 결과였으나 악착같이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다 안 좋은 가시라도 박힌다면 내가 희생한 이유가 없어지게 된다.

설령 거절을 하더라도, 박영준은 염치가 있는 사람이니 두고두고 찝찝하겠지. 단지 왕을 거슬러가며 한 편이 될 생각만 없을 뿐, 도움을 받을 기회는 앞으로도 많을 터였다.

“도와주기 어려우시다면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좋은 자리에서 괜히 마음만 심란하게 해드렸군요.”

“아, 아, 아니야. 아닐세.”

박영준은 서둘러 손을 내젓고는 말을 이었다.

“앞서 했던 말은, 말했듯 노파심에 해본 말일세. 참의가 이미 알고 있었다니 나야말로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아 미안하지.”

자리의 분위기가 가라앉아, 나는 실없이 웃으며 술병을 들었다. 얼마 남지 않은 내용물이 찰랑거렸다.

“정 미안하시면 벌주나 드시죠. 소관이 사심을 털어 넣겠습니다.”

분위기 전환을 위한 가벼운 농이었으나 박영준은 선뜻 잔을 들지 못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듯 시선을 아래로 두더니, 몇 초 지나지 않아 대답했다.

“내가 언제 참의를 돕지 않겠다고 했나?”

주저할 때는 언제고 씨익 웃는 박영준이었다. 태세전환이 이토록 빠를 줄이야.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상황이다. 주저할 필요는 없겠지. 오히려 박영준은 현명한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이런……. 소관이 감히 대감의 의중을 넘겨짚었군요. 벌주는 제가 마셔야겠습니다.”

“그러겠나? 괘씸하니 내 사심 한가득 잔에 채워주겠네.”

“망극한 마음으로 받들겠습니다.”

“하하하!”

“하하하…….”

* * *

이조에 첫날 등청한 심의겸이었다.

과거 이조에서도 몇 번 일한 적 있었던 그에게는 남다른 기분을 안겨주었다. 몇 년 전에도 이조참의로 일한 적이 있었기에.

하지만 그보다도 앞서는 감정이 있었다.

“찝찝하구나.”

사돈지간인 윤두수(尹斗壽)에게 들은 말이 있었다.

이전 이조참의 이순신이 인사 부정의 책임으로 체직되었다고는 하나, 들려오는 말로는 오히려 일의 책임소재가 없는 다른 사람들을 구하고자 먼저 나선 것이라고.

‘어쩐지 그 순박한 청년이 인사부정 따위로 체직된다 싶었다. 내심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도 설마 싶었는데…….’

실로 찝찝한 상황이었다.

전직 이조참의였던 이순신이 그렇게 희생되어 관직이 갈렸다니, 마치 자신이 자리를 빼앗기라도 한 것 같잖은가.

게다가 대내외적으로도 말이 많았다.

정작 논란의 인물이었던 장필무에 대해서는 어떠한 처분도 없었던데 반해, 인사 책임자였던 이조참의는 체직되었고 나아가 판서까지 조직의 기강해이를 이유로 공판으로 갈렸으니까.

덕분에 이조는 물론 여타 관청들의 분위기도 많이 이상해진 상황이었다. 왕의 의아한 행보에 불쾌함을 은근히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몸을 사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은 자리를 꿰찬 심의겸은 안 그래도 죄지은 기분이었다. 근본 없는 죄책감이라 금방 떨쳐낼 수 있으리라 믿었으나,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지금은 생각을 달리 할 수밖에 없었다.

‘간만에 이 참의와 만나서 이 찝찝한 기분을 떨치기라도 해야겠군.’

술이라도 한잔 먹여줘야 죄책감이 달아날 것 같았다.

“자, 자.”

이조판서 정유길(鄭惟吉)이 가볍게 책상을 치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지금 관청 내 분위기가 좋은 편은 아니니, 잡다한 행사는 생략하도록 하고 업무에만 집중하도록 합시다.”

“예.”

“참판께서는 정랑들에게 이 사람의 뜻을 알려주세요. 내가 면신례는 상황이 나아진 다음에 행하겠다고.”

“알겠습니다.”

선배를 자칭할 새파란 놈들에게는 썩 미답지 못할 소식이겠지만, 정유길은 능히 강짜를 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할아버지 정광필은 연산군의 폭정에 간하다 유배당하였으며, 반정 이후 복귀했을 때 조광조와 대립한 적도 있었으나 조광조가 죽을 위기에 처하자 중종에게 눈물로 자비를 청했었다.

그것이 권신 김안로의 눈에 나 말년에 유배를 당했다가 어렵사리 풀려나 이듬해에 눈을 감았는데, 때문에 정광필은 사림에게는 영웅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정유길은 그런 정광필의 손자로서, 조부의 의기가 부끄럽지 않게 대윤 잔존세력과 연합하여 척신 윤원형 세력과 맞서 싸웠다.

이렇게 사림이 거듭 은혜를 입은 웃어른을 고작 면신례니 신참례니 따위 하는 말로 괴롭히려 들다간 뭇매를 맞는 수가 있었다.

‘일각에서는 마땅치 않게 보는 자들도 있지만.’

그런 자들은 심의겸이 보기엔 사림이 아니었다.

사납고 탐욕스러운 척신이 모두 제거되자, 슬금슬금 도성으로 기어와 부스러기나 주워 먹으려는 마찬가지의 족속들일 뿐.

정유길이 말했다.

“좌랑 오건(吳健)이 이조에서의 일은 이조의 관리인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며 사직을 냈는데, 그게 가납되었네. 새로 사람을 채워야 하는데 오건은 김효원(金孝元)을 후임으로 추천하였어.”

이조의 꽃이라고 불리는 정랑과 좌랑.

합쳐 이조전랑(吏曹銓郎)이라고도 하는 이 자리는, 당하관 천거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었다.

특히 왕과 대신들을 견제할 수 있는 삼사 관원의 선발에도 깊게 관여했기에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속아문의 어중간한 장관보다야 오히려 이조전랑이 더욱 입김이 세다 무방할 정도였다.

이들에게는 저들을 더욱 스스로 강하게 하는 특권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자대권(自代權)이었다.

무려 법적으로도 보장된 권리로, 바로 후임을 직접 지명할 수 있는 권리였다. 오건은 자신의 권리를 이용해 김효원을 후임으로 추천한 것이다.

‘이런!’

마침, 척신이 제거되자 도성으로 기어와 이익을 얻으려는 가짜 사림을 증오하고 있던 심의겸으로서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김효원이 딱 그러한 자였기 때문이다.

‘퇴계 선생과 남명 선생과 같은 쟁쟁한 학자들에게 두루 배웠음에도 척신 윤원형에게 잘 보이고자 하루 걸러 얼굴을 비치러 간 버러지!’

차라리 훈구파 찌끄레기라면 낫다.

적어도 자신의 출신을 부정하지는 못할 테니까. 언제까지고 변변찮은 관직이나 지내며 영원히 참회하라지.

하지만 김효원은 그러지 않았다.

분명 척신의 거두이자 소윤의 영수였던 윤원형에게 잘 보이려 애쓴 역사가 분명히 드러났음에도, 사림의 학맥을 이었다는 변명을 들어 사림을 사칭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김효원은 자신이 진짜 사림이라는 듯, 한때 훈구 척신들과 싸웠던 선인들을 상대로 사소한 치부를 들어 공격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 대상에는 심의겸도 있었다.

‘빌어먹을 훈구파 찌끄레기 놈이, 감히 사람 쓰는 일에 관여한다고? 필시 저 같은 놈들을 더 불러모을 것이 뻔하다!’

심의겸이 이를 부득, 가는 순간.

판서 정유길이 말했다.

“공석에는 김효원을 올려두겠네.”

자대권은 보장된 권리였고 이를 거스르는 경우는 흔치 않아서, 정유길은 고지하듯 말했다. 별다른 이견은 없으리라는 듯.

하지만 아니었다.

“안 됩니다!”

심의겸이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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