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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98화 (98/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98화

33. 천하대세 (3)

이조.

판서 박영준과 참판 강사상은 똥 씹은 표정이 되어 등청했다.

이유는 다름 아니게도 선조의 명령 때문.

-장필무가 이번에 경상 병사로 직을 옮겼다지. 이러한 내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경상 감사에 추천한 자에게 죄를 물어야겠다. 책임자를 가려 계품하라.

아래쪽에서는 이런저런 말이 나오기는 했지만 적어도 당상의 영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조정은 안정되었고 당상관급 대신들의 경우에는 대체로 명종조 권신들과 함께 싸웠던 자들이 태반인 덕이기도 했다.

전우애 비슷한 느낌으로, 사소한 흠결쯤은 그러려니 넘어가주는 것이었다.

정말 중요한 자리는 선조가 빠짐없이 개입했으므로 왕 역시 인사에 대한 논란은 자신이 나서서 무마해버리기도 했고 말이다.

덕분에 이조는 큰 분란을 없이 유지되어왔다.

이제는 아니지만.

“전하께서 하신 말씀은…….”

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마침 자리한 박영준이 쓰게 말했다.

“총대를 메라는 것이지. 전하께서는 우리 이조의 관리들보다 장필무를 더 아끼시는군.”

정확히 말하자면 장필무를 아낀 게 아니다.

장필무를 아껴온 자신의 권위를 아낀 것이지.

자신이 안목이 없어 이런 논란이 있는 사람을 쓴 게 잘못이 아니라, 논란이 있는 사람을 자신에게 추천한 이조의 관리가 잘못했다는 식으로 책임을 돌린 거다.

“뭐…….”

이러한 사실이 입 밖으로 나오기 직전이었으나, 사실 이 자리에서 전말을 모를 사람은 없었다.

나는 말을 돌렸다.

“대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음!”

박영준은 침음만 흘릴 뿐이었다.

선조가 장필무 대신 애먼 이조의 관리를 팔아먹기로 했다면, 사실 누군가가 총대를 매야만 했다.

그러나 박영준 입장에서는 억울한 것이, 사실 책임자를 따지자면 바로 선조가 책임자였다.

장필무는 회령 부사로 있을 당시 소흡을 도와 원정을 크게 성공시킨 공으로 후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다.

그 임기가 최근 다해가자 평소 장필무를 밀고 있었던 선조가 먼저 이조에 압력을 넣었다.

장필무의 임가가 다 해가는데 정해둔 다음 자리는 없냐면서 말이다.

단순한 질문에 불과했지만 저의를 못 알아들을 사람이 어디 있나? 그래서 곧 공석이 되는 경상 병사를 추천한 것이었다.

후보 조사?

왕이 찌르라는데 찌르지, 뭔 토를 달겠다고 후보 조사 따위를 한단 말인가.

‘제기럴…….’

이런 논란이 생길 줄 몰랐던 박영준 입장에서는 정말 난데없이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게다가 병마절도사는 종이품의 영감급 대신. 인사의 책임자랍시고 적당한 당하관 놈을 골라 보낼 수도 없었다.

결국 당상관인 이 자리에 앉은 셋 중 하나가 책임을 져야 하는 셈인데, 어느 쪽이건 못 미더울 수밖에 없었다.

하다못해 공범 사이에서 한 놈을 희생시키자면 그러려니 싶을 텐데, 모두가 무고한 마당에 누군가에게 총대를 메게 하자니 메는 쪽도 지랄 맞을 테고 메라는 쪽도 찝찝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쳐 맞기라도 한다면 다행이다. 척 질 각오도 해야 했으니까.

“씁.”

이따금, 부서에 단지 재수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 책임을 져야만 한다면…….

박영준은 책임자가 지는 편이 옳지 않겠냐 싶었다.

그리고 이조의 책임자는 판서인 자신이었다.

‘여기가 나 박영준의 관직 생활 끝인 셈이지. 할 만큼 했으니 이쯤에서 내려오라는 하늘의 뜻이다.’

잘못은 전적으로 선조에게 있었으나, 이렇게라도 합리화하지 않는다면 억울해서 복창이 터질 판이었다.

‘씨이펄, 이조판서까지 지냈으니 다음 관직은 삼의정이라 생각했거늘!’

박영준은 통한을 삼키고는 쓰게 말했다.

“이번 일은 내가 책임을 지겠네.”

당상대청에서는 잠시 침묵이 돌았다.

참판 강사상은 자신이 희생양이 되지 않아 다행이라는 듯, 항상 딱딱하기만 했던 그도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의외의 눈치.

이런 상황에서 적막을 깨는 사람이 있었다.

“그럴 필요 없으십니다.”

“……?”

“제가 나서죠. 어차피 이번 일은 누구에게 잘못을 돌릴 일도 아니고, 따지자면 모두가 억울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장관께서 희생당하실 필요 있겠습니까?”

박영준은 차마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자신으로서도 무척이나 억울한 상황이었기에. 자신이 대신 나서겠다는 이순신이 고맙고도 미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되겠나?”

“누구 하나 죽어야 할 상황이라면 병사가 죽어야지 장군이 죽는 거 아닙니다. 게다가 대감께서는 저를 아껴주셨는데, 그동안 은혜를 못 갚았으니 이렇게라도 해야죠.”

“……일이 이렇게 될 줄 알고 자네에게 호의를 베푼 건 아니었네만.”

“압니다.”

나의 단호한 대답에 박영준은 푹 고개를 숙였다. 참판인 강사상은, 차마 나서지 못하고 있었고 말이다.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림도 그럴싸하지 않습니까? 장필무 밑에서 판관을 지냈던 이순신이, 상관에게 보답하기 위해 치부도 눈감아주고서 추천했다.”

박영준은 무척이나 묵직한 숨을 토해내곤 말했다.

“미안하네.”

“나중에 위로주 한 잔 대접해주십시오.”

박영준은 쓰게 웃었다.

“당연하지. 내가 그 정도도 못 해줄까…….”

* * *

며칠 뒤.

박영준의 저택.

그는 나를 맞아주면서도 지난 일이 어색했는지, 미소에는 미안함이 가득 묻어났다.

“오셨나?”

“예. 이가, 순신 인사드리겠습니다.”

“이름 앞에 달린 게 없으니 내가 영 미안해.”

“그게 어찌 대감 잘못이겠습니까. 게다가 대감이시라고 풍파가 비껴간 것도 아니잖습니까.”

나는 파직은 면하였으나 대신 관직이 갈렸다. 지금은 재배치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

박영준은 하관을 잘못 관리했다는 이유로 공조판서로 변경되었다. 육조 판서의 머리였던 이조판서에서 졸지에 꼬리인 공조판서로 전락한 것이었다.

‘고작 한 사람에게만 책임을 돌릴 생각이 아니었다는 거지. 놈이 무엇을 노리기에 이조에 당상 공석을 둘이나 만든 걸까?’

이조의 당상이 고작 셋뿐이란 점을 감안하면 이조가 텅텅 비었대도 과장이 아니었다.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을 꽂아 인사를 장악할 계획인가?

놈은 예전에도 신하들 눈치는 안 보는 편이었지만 이건 막 나가는 수준이었다.

멀쩡히 일 잘하던 사람조차 고작 정치직 이익을 위해 숙청한다는 건, 정치질에 관심 없던 자들에게도 경각심을 새길 테니까.

이익도 좋지만 적을 너무 많이 만드는 짓이었다.

‘선조가 이 정도로 미친놈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선조의 위험함은 똘끼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었다.

놈은 일반적인 폐급과는 달리 눈치가 좋았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행보가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는 분명히 알 터였다.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는 건가.’

고민은 이어지지 않았다.

박영준이 말했다.

“자네 덕을 못 보았으면 얼마나 더 심했을지. 공조판서로 끝난 것에 만족해야지.”

“일말의 도움이라도 되었다면야 소관으로서도 망극하지요. 단지 어떻게든 희생될 처지는 아니었나 싶을 뿐입니다.”

나보다 더 오랫동안 관직을 지내온 박영준도 모를 수 없었다.

처음부터 선조는 한 명으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그래서 이러한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는 것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 봐야 불충으로 의심받을 부스럼에 불과했으나, 나라고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다.

‘선조야, 설령 네가 이 나라의 왕이라 하더라도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모두를 적으로 돌리고도 왕 노릇이 쉬울 줄 아느냐?’

놈은 모두가 자신을 경배하고 두려워하길 바라고 있지. 하지만 저열한 행위를 일삼는 군주에게 진정성 있는 충성을 바칠 자는 없다.

“으음…….”

박영준은 쓰게 웃고는 말했다.

“참의, 풀 수 없는 억울함은 품는 게 아닐세. 괜히 속만 버릴 뿐이니까.”

그래.

맞는 말이다. 해소할 수 없는 감정은 품는 게 아니지.

하지만 어색하게 일그러진 박영준의 미소에서 불쾌함이 묻어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나를 향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사람의 심리는 어쩔 수 없지. 이게 최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감정이 안 생길 수는 없어. 기계가 아닌 이상에는 말이야.’

박영준은 짧게 헛기침하고는 안내했다.

“들어오게. 귀한 손님을 너무 오래 세워두었군.”

“아닙니다.”

안으로 들어서니 박영준이 밖을 향해 일렀다.

“주안상 둘 봐오거라.”

“예.”

노복의 대답이 있고서, 박영준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을 터라. 귀한 약주를 구했는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흐음, 이래 봬도 소관이 먹는 데는 아낌이 없는 사람이라. 입맛이 낮은 편은 아닙니다만.”

“호오? 그럼 내가 걱정을 조금 해야겠는데.”

말과는 달리 조금도 주눅 들지 않은 박영준이었다.

곧 주안상이 차려졌다. 내가 손님으로서 상을 옮기려 했으나, 박영준이 마다하며 대신 상을 옮겨주었다.

놀랍게도 상에 마련된 안주들은 육해공을 아우르는 산해진미였다. 평이한 저택의 광경과는 달리 무척이나 호화스러운 차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박영준이 재물을 알뜰하게 챙겨 부유하다는 평은 들어보았다. 저택 외관이 평범한 것은 단지 처신에 불과했을 뿐인가?’

내심 감탄하는데 박영준이 말했다.

“먹는 데 아낌이 없다 해놓고, 겨우 이 정도에서 놀라시는가.”

“고작 먹는 것에 놀라겠습니까. 대감께서 소관을 이리 아껴주시니 그 마음에 감사하고 놀랐던 것이지요.”

“말은.”

박영준은 피식 웃고는 병을 들었다. 잔을 대라는 신호라, 나는 잔을 공손히 받쳐 들고 내밀었다.

그러자 청아한 물소리와 함께 코에 스며드는 향기.

‘꽃향기? 백화주(百花酒)구나.’

백 가지 꽃을 담가 만들었다는 술. 물론 이름은 과장이다. 술을 빚는 쪽의 여유에 따라 바탕이 될 술의 재료는 물론 들어가는 꽃의 종류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깊게 파고드는 술 냄새에 어우러지는 짙은 꽃내음. 보통 정성은 아니었다. 박영준이 자신만만한 이유가 다 있었다.

“어떤가?”

“향기가 좋군요. 매화, 동백…….”

“냄새만 맡고서 안단 말인가?”

박영준이 놀라 물었다.

“설마요, 하하. 백화주에 흔히 들어가는 꽃이 매화와 동백이니 넘겨짚었을 뿐입니다.”

“에라이.”

내가 후각 천재도 아니고, 어떻게 수십 가지 꽃의 종류를 냄새만 맡고서 알겠나?

주신(酒神) 정철이라면 모를까.

흠, 그 인간이라도 냄새만 맡는 정도로 백화주의 재료를 다 알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언젠가 대접하면서 시험해봐야겠군.

“그렇다고 아주 넘겨짚은 건 아닙니다. 향기 끝에 청아함이 올라오는군요. 꽃잎만 아니라 송이째 넣어서 그런 거겠지요.”

“오. 맞추셨네. 예전에는 꽃만 따서 담았는데, 누군가 꽃송이 전체를 써보라더군. 그리 담아보니 느낌이 달라.”

“기대되는군요.”

이번에는 내가 술병을 들었다. 박영준의 잔이 채워졌고 건배가 이루어졌다. 첫 잔은 완샷. 국룰이었다.

입에서 백화주의 짙은 꽃내음이 퍼졌다. 마치 꽃밭을 마시는 듯한 느낌.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어떤가?”

박영준이 물었다.

“하하, 뻔하지 않습니까. 오늘 밤 창고 단단히 지키십시오. 제가 사람 시켜서 남은 술을 모조리 훔쳐 갈 터이니.”

“아, 그건 걱정스러운데? 자네가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여기서 다 없애버려야겠군.”

“……하하하!”

“하하하!”

* * *

제법 시간이 흘렀다.

자리를 시작할 때는 해가 중천에 떠 있었는데 지금은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덕분에 얼큰하게 취했던 나와 박영준도 어느새 제정신으로 돌아와 있었다. 산해진미에 명주를 곁들였으나 미식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술김에 내뱉은 말들이 혹 밖으로 흘러가지는 않을까 걱정만 은근히 들 뿐.

예로부터 남자는 싸우면서, 또 함께 술 마시면서 친해진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약점이나 다름없는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며 나와 박영준은 이제 막연한 호감보다는 훨씬 분명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공조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좋은 편이라고는 못 하겠군. 나 때문에 말이야.”

박영준은 억울하게 좌천당한 입장이었다. 선조가 이익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그런 사람이 공조의 장관으로 왔으니 관청의 분위기가 좋을 수가 없었다.

“빈자리는 없습니까?”

“왜, 공조에 올 생각인가?”

“파직이나 삭직을 당한 건 아니니까요. 결국 다른 관직에 제수될 텐데, 괜찮다면 대감과 다시 함께 일하고 싶어 그럽니다.”

“자네가 원한다면 나야 고맙지. 하지만 어려울 것 같네. 공조 참의가 이번에 새로 와서 말이야. 금방 바뀔 것 같지는 않거든.”

“흠.”

“의외로 참판이 되어 들어올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하하하.”

박영준이 농과 함께 웃었다.

참판이라.

참의 다음으로 높은 자리고, 육조에서는 넘버 투 자리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다할 이유는 하등 없지만……

“부정인사를 이유로 관직이 갈렸는데 설마 올라가겠습니까. 흠. 그럼 공조는 포기해야겠군요.”

“기회가 된다면 한 번 시도는 해보지.”

“참의가 새로 왔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에이. 여차하면 며칠 만에 갈리는 것이 관직인데. 찔러보는 것조차 못할까. 게다가 나는 자네에게 빚진 입장 아닌가.”

선조의 숙청 시도에 내가 먼저 나서서 화살받이 노릇을 했으니.

결과적으로는 둘 모두 어떻게든 숙청될 운명이었다 해도, 박영준 입장에서는 나에게 은혜를 입은 처지였다.

“가볍게 찔러주십쇼. 함께 일할 기회는 앞으로도 있을 테니까요.”

“나 신경 쓰지 말고 자네나 조리 잘하게.”

“흠, 제 처지가 문제이긴 하지요.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는데.”

“무슨 도움말인가?”

박영준이 물었다.

여차하면 도와줄 기세로.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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