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97화
33. 천하대세 (2)
“정조시를 청하옵니다.”
예조판서 박충원(朴忠元)이 아뢨다.
정조시(停朝市).
말 그대로 조정과 시장을 정지하자는 뜻이다. 대체로 지체 높은 사람이 유명을 달리하였을 때 예우 차원에서 행하는 일.
“음.”
선조는 침음을 흘렸다.
고작 며칠 전 우참찬으로 직을 옮긴 오상이 유명을 달리했다.
오상은 이전부터 건강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선조는 마다하고 관직만 갈기로 하였는데 결국 사달이 난 것이었다.
그의 사인은 노령이지만 왕 역시 책임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나라를 위한 노고는 분명 영광스러운 것이었으나, 그만큼 나라 역시 오래 일해온 신하에게 평안한 황혼 정도는 배려해줄 수 있잖은가?
죽을 때까지 부려먹는 것이 아니라.
오상의 죽음은 제신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기 힘든 일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다면 좋겠으나, 방도가 마땅치 않았다.
‘오상에게 우참찬직을 추천한 녀석이 이순신이었던가.’
놈의 탓으로 전가할까, 싶었으나 무리가 있었다.
오상이 이전에 지내던 판윤은 왕을 대신해 도성 전체를 총괄하는 자리였다. 반해 우참찬은 의정부 말직으로, 품계는 높으나 하는 일은 많지 않아 여유로운 자리였다.
부담이 가중되어 때 이르게 죽었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는 셈이다.
‘제기랄.’
선조는, 근본적으로 누군가가 죽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노신들.
한평생 권력을 탐하다 끝내 한 줌 흙으로 전락하고 마는 노신의 최후란 소소한 만족감을 안겨주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자신에게 피해가 가는 경우라면 선조는 사양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없는 경우라면 더더욱.
“내가 오상을 크게 쓰고자 거듭된 청에도 차마 사직은 받아주지 못하였는데, 이렇게 이른 때에 부음을 전해들으니 심히 비통하오. 예조에서는 유족들에게 과인의 위로를 전하도록 하고, 이틀 정조시하겠소.”
“예.”
예판을 위시한 관리들은 짧게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
홀로 남은 선조는 이매를 쓸어내렸다.
늙어터진 노신이 때가 되어 죽었을 뿐이다. 그것을 자신의 책임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다. 애석할 이유는 없었으며 실제로 선조는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불쾌하기만 할 뿐.
오상이 오죽 불충한 신하였으면 참을성 없이 죽어, 자신을 망신시키냐고 말이다.
‘좋게 생각할 구석이 아주 없지는 않다만.’
이틀간의 정조시. 뜻밖의 휴일을 얻게 된 자는 관리들만이 아니다.
조정이 쉬면 왕의 일감 역시 대폭 줄어들게 마련이다.
마침…….
‘절대왕권 수립을 계획하려던 나로서도 진도를 뺄 여유가 생겼으니.’
오상의 죽음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단지 눈치 없이 죽었을 뿐.
선조는 피식 웃어버리고는 팔걸이를 짚으며 일어났다. 휘적휘적 정전을 빠져나오니 밖에서 대기하던 궁인들의 무리가 따라붙었다.
‘지긋지긋한 놈들.’
선조는 눈살을 찌푸렸다.
왕을 시종하기 위한 무리이나, 매사가 불쾌한 선조에게는 감시의 시선 외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지위 있는 노신들이 저마다의 끄나풀을 궁궐에 심어놓았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기도 했으므로, 딱히 피해망상적인 생각도 아니리라.
‘이러니 내가 절대왕권을 수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하 주제에 감히 왕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지다니.’
약점과 기회를 노리기 위함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하자면 신하들은 왕을 충성의 대상이 아닌, 견제와 이용의 대상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불충하고 불충하며 오만하고 오만한 발상이었다.
실로 역적들이나 가능한…….
그리고 선조에게 신하란 모두가 잠재적인 역적이었다. 힘과 적절한 환경만 갖춰진다면 누구나 군주를 향해 칼을 빼들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 들.
‘저열한 놈들.’
마음 같아서는 하나하나 목을 친히 쳐버리고 싶지만, 지금 당장 보검을 들고 설쳤다간 죽는 건 이쪽이 될 터였다.
몇 놈 죽일 수야 있겠지만 왕이라고 목숨에 여유분이 있는 건 아니기에.
선조는 실망하지 않았다.
절대왕권이 수립된다면 누구도 감히 왕과 맞서고자 할 수 없을 터이니.
선조는 마침내 편전에 도착했다.
“다들 물러가라.”
선조는 궁인의 무리를 뿌리치고 편전으로 들어섰다. 친숙한 공간.
“전하.”
집무실을 지키는 내시가 말했다.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는지 내시는 곧장 미닫이를 열었다. 선조는 기꺼이 집무실로 들어섰다.
도성 붙박이일 수밖에 없는 종친과 대신들은 흔히 자신들의 사정을 토로하곤 했다.
드넓은 팔도강산을 사방에 펼쳐둔 채 찾아가지 못하는 제 처지가 비루하다고.
선조는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드넓게 펼쳐진 팔도강산’을 주유하는 이들은 가지지 못하고 비루한 종자들이다. 그들과 그들이 밟고 선 대지를 지배하고 군림하는 일은, 바로 여기에서 벌어진다.
‘하하.’
선조는 자신의 처지에 충분히 만족해하며 어좌에 자리했다.
자신만이 앉을 수 있는 곳. 언제까지나 그러해야 할 자리. 그러기 위해서는 당장 시작해야 할 일이 있었다.
‘당장 절대왕권을 이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모든 일은 첫걸음에서 시작했다.’
왕권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왕(王)의 권력(權)이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무게(權)로서 흐름을 바꾸는 힘(力)을 뜻한다.
그렇다면 권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실무에서 나온다.
실무란 중차대한 사건과 상황에 개입하여 자신의 의사를 시행하는 일을 뜻한다.
아무리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실무를 행하지 못한다면 권력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정직한 방법으로 권력을 기르고자 했지. 가장 중요한 업무인 인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으로 말이야…….’
자신이 신하를 골라서 쓸 수 있다면 충분히 절대왕권을 수립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여러 영의정과 재상들을 직접 뽑고 써왔으나 선조는 만족하지 못했다. 비교적 순한 녀석을 가려 뽑아도, 권력을 쥐는 순간 성질이 돌변해 자신에게 이빨을 드러내곤 하였으니.
‘충신은 없어.’
왕 혼자 팔도강산에서, 천만 백성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개입할 수는 없다.
군왕은 결국 자신을 대신해 영토 일부를 맡거나 특정 업무를 대행할 자가 필요하다. 이것이 신하의 근본이다.
신하가 왕의 실무 일부를 이행하게 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실무는 곧 권력이다. 신하가 자신의 역할에만 만족한다면 무방하겠으나, 야망 없이 능력 있는 자는 없는 법이다.
신하란 근본적으로 왕과 경쟁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렇지 않은 놈이 주변에 몇이라도 있기를 바랐건만 너희들은 나에게 실망만 안겨주었지. 그렇게 권력이 좋다면…….’
불충함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가르쳐줄 필요가 있었다.
신하 하나하나는 그리 강하지 않으나 그들이 뭉쳤을 때는 강한 힘을 발휘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런 사적인 감정으로 부정할 수는 없을 정도로.
하지만 지금 자리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천박하고 불충한 한계로 인해, 신하들은 뭉쳤을 때 도리어 취약해지는 면도 있었다.
지금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려면 다른 누군가와 싸우고 승자가 되어 패자의 것을 빼앗아야 하는데, 모두가 같은 편이 된다면 그럴 수 없으니까.
그래서 특정 세력이 한 집단을 차지하게 되면 늘 일어나는 일이 있다.
‘내분.’
또는,
‘내란.’
천하대세 분구필합 합구필분이라 하였던가?
조선의 정계에서도 능히 통하는 말이다.
지금 사림은 조정을 장악했다.
훈구파 권신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심통원은 작년 여름 유명을 달리했다.
잔당 중 하나로서 끝까지 재상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오겸도 결국 몰락했다.
여느 훈구파 권신들과 마찬가지로 끝까지 권력에 대한 열의를 잊지 않았던 그조차.
하나뿐인 아들 오언후의 목숨이 경각에 이르자 일가를 이끌고 지방으로 낙향해버린 것이다.
‘현명한 일이지. 바랐던 상황이기도 하고.’
이제 물리쳐야 할 훈구파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조정을 장악한 사림은 너무나도 비대해졌다. 구성원 모두와 동질감을 가질 수 없게 된 것이다.
결국 가까운 사람들끼리 이어진 무리가 사림 곳곳에서 종양처럼 자랄 것이고, 결국에는 각자 집단의 소속감이 사림으로서의 정체성을 능가하게 될 터였다.
결국 ‘사림’이라는 이름은 흔적으로 전락하고 신생 집단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를 적대시하며 죽어라 싸워대겠지.
‘신하란 종자들은 도저히 만족을 모르니.’
그렇게 적을 만들어서라도 서로의 것을 빼앗아야지 않겠는가?
원한다면.
‘판을 깔아주지 못할 것도 없느니라…….’
* * *
어전.
대신이 좌우에 시립한 가운데. 유희춘이 말을 이었다.
“달포 전 영흥부사 서봉이 임지에 부임하고도 서울의 기생을 아껴 관의 물건을 보내 환심을 사려 한 일이 있었사옵니다.”
“기억이 나는군. 내 그때 서봉을 불러 엄밀히 추고하고 드러난 정상에 따라 처분하라 이르지 않았던가?”
“예. 이번에 의금부에서 서봉을 추고하여 드러난 바가 있사온데, 치죄와는 별개로 드려야 할 말씀이 있어 아뢰고자 하옵니다.”
선조는 눈살을 찌푸렸다.
며칠 전의 결심과는 달리, 서인을 어떻게 분열시킬지에 대한 단초를 찾지 못해 만사가 피곤하고 귀찮은 선조였다.
그런데 또 무슨 귀찮은 일이 생겼단 말인가.
유희춘이 말을 이었다.
“서봉의 말을 들어보니, 자신을 고발한 장필무와 예전부터 같은 기생을 두고 다툼이 잦았다고 하옵니다.”
“휘하 목민관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고발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시기하여 고발했다는 말인가?”
“예. 장필무의 고발이 과장이 있었다는 면을 감안하면 거짓이 아닐 가능성이 높사옵니다. 다만 정확한 조사를 위해서는 장필무 역시 불러들여 문초함이 어떨지.”
선조는 손가락으로 이마를 꼬집었다.
장필무!
자신이 즉위하고서 오래지 않아 품계 몇 계단을 올려주었다. 아랫사람을 보내 등극을 축하한 다른 지방관과는 달리, 놈만은 누구보다 빨리 직접 찾아와 예를 표했기에.
정당성에 보탬이 되었으니 다른 놈들도 보고 배우라는 식으로 우대를 해줬었다.
물론 삼사의 저항이 거칠었으나, 마침 놈의 휘하로 들어간 이순신의 공이 커서 무마되었다.
‘이후로는 조용히 지내는 줄로 알았건만. 이 무슨 추태란 말이냐?’
자신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가며 장필무를 우대해줬기에 그에게 논란이 생기는 것은 불편한 일이었다.
‘음…….’
잠시 고민하던 선조는 늘 해왔던 짓을 하기로 했다. 딱히 장필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권위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장필무가 이번에 경상 병사로 직을 옮겼다지. 이러한 내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경상 감사에 추천한 자에게 죄를 물어야겠다. 책임자를 가려 계품하라.”
“그렇다면 장필무는…….”
“설령 그가 단순히 시기하여 서봉을 고발했다 하더라도, 서봉에게 죄가 있음은 사실로 드러나지 않았나. 따로 불러서 추국할 일은 아니다.”
선조는 더이상 잔말은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손을 저었다.
인사 담당이 아니라 장필무에 대해서 말을 올린 유희춘으로서는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지나가다 똥 밟은 사람 하나를 내던져주고 장필무와, 그를 크게 쓰는 자신의 명예와 권위를 지키려는 수작이 너무나도 빤히 드러났기에.
하지만 왕이 억지를 부린다면 신하로서는 방도가 없었다.
유희춘은 무언으로 항의했으나, 결국 물러날 뿐이었다.
“…….”
신하들의 불쾌함으로 얼룩진 어전회의는 은근한 비협조와 그러한 분위기로 금방 끝났다.
선조로서는 불쾌할 법도 하련만, 평소와는 달리 희희낙락했다.
‘이조에 공석을 여럿 만들겠군.’
인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온 선조인 만큼, 인사의 입지와 중요성을 모를 수 없었다.
만일 사림의 분열이 발생한다면 바로 이조에서 벌어져야 했다. 그러나 다들 이렇다 할 결점 없이 충실하게 역할을 이행하고 있어, 자리를 내기 마땅치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나.
위기를 기회로.
선조는 자신의 처신이 간만에 만족스러워 속으로 웃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