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95화
32. 안 아픈 손가락 (5)
“신이 여러 사람에게 친절하며 그것에 지위고하가 없음은 지엄한 반상의 법칙을 농락하기 위함이 아니라, 모두가 제 역할을 충분히 이행해야만 나라의 질서가 바로 선다는 원칙을 존중하기에 나오는 행동입니다.”
“…….”
“존비의 등급과 귀천의 분수가 아무리 질서정연하다 하더라도, 한쪽이 없으면 다른 한쪽은 기능할 수 없는 법입니다. 군자도 말이 없으면 백 리를 가지 못하며, 군자 없는 말은 갈 곳이 없기 마련입니다.”
대신들은 흠, 콧바람을 흘리며 긍정했다.
계급사회의 특권을 누린다는 게 무엇인가? 높은 계급의 구성원으로서 아래 계급의 노동과 산물을 영위한다는 뜻이다.
이들은 계급사회는 긍정하지만 그렇다고 아래 계급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나이가 찬 사람에게는 신분고하를 가리지 않고 관직을 베푸는데, 이는 백성이 자신의 역할에서 나라를 위해 오랫동안 헌신했음을 치하하고자 하는 선인의 뜻이옵니다. 또 천한 자라 하더라도 함부로 다를 수 없게 함은 국법으로 명시된 바이온데, 신의 뜻이 어찌 나라의 법을 어겼다고 할 수 있겠사옵니까?”
나의 물음에 선조가 되물었다.
“그러니 응교는 잘못한 것이 없다?”
“설령 잘못이 있더라도 그 의도는 나라의 질서와 국법이 바라는 바를 존중하고 힘써 따르는 과정에서 약간의 오해가 있었을 뿐이지, ‘무고’당한 것처럼 악의를 가지고서 공공의 안녕에 위해를 끼치고자 함은 추호도 아니옵니다.”
나는 ‘무고’라는 단어에 힘을 실었다.
마치 오언후가 나를 무고한 것은 모두가 알고 있지 않느냐는 것처럼.
하지만 누구도 나의 언행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내심 이번 일은 오언후가 아비의 처지를 복수하고자 무리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해관계라곤 일절 없는 오언후가 나를 공격할 이유는 하등 없었기에.
“…….”
이제 상황도 말미에 이르렀다.
선조는 턱을 쓰다듬었다.
그 역시 이순신이 악의를 가지고서 그런 일을 벌였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돌아가는 정황도 뻔했지만, 적어도 선조가 그동안 접해온 이순신은 그런 일을 벌이는 부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오만함, 애매모호함, 가늠할 수 없는 속마음이 불쾌했을 뿐이지.
게다가 항변하는 말과 어조에도 막힘이나 부족함이 없다. 이건 스스로도 이번 일을 당당하게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아니면 오래전부터 각오를 해두고 있었거나.’
하지만 어느 쪽이라도 무방했다.
전자라면 순진한 친구이니 당장의 위협은 없기 때문이며, 후자처럼 철저해서라면 이제 와서 찔러 볼 구석은 없을 테니까.
분명한 점이 하나 있다면 이순신은 지금보다 더 높은 위치로 가리라는 예상이다.
수단이 어떻건 지금 보여주는 이순신의 자질은 험난한 조정에서도 당분간은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해 보였으니까.
그에 반해 오언후는…….
‘시답잖은 놈.’
아비의 복수를 이루고자 하는 마음은 기특했지만 그 뿐이다. 이렇게까지 시야가 좁아서야 어디에다 쓰겠나.
수족으로 부릴 대상은 아니었고 자신의 절대왕권에 위해를 끼칠 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선조는 결론을 내렸다.
“응교의 충의는 여전한데 언후는 사사로운 감정으로 참소를 올려 위해를 가하려 하였으니, 나라의 신하를 겁박하고 조정의 질서에 위해를 끼친 죄가 크다.”
“저, 전하…….”
오언후가 바들바들 떨며 선조를 불렀으나, 선조는 오언후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우상의 생각은 어떠한가.”
“오언후는 사사로운 감정으로 죄를 꾸며 충신을 모함하여 인주(人主, 임금)를 미혹하였으니 그 죄가 매우 크옵니다.”
“어떠한 벌이 적당하겠나?”
“선대왕 시절 수많은 충신이 이간을 당해 스무 해의 유배를 당하였으니, 옛일을 상고한다면 당대의 죄인을 대하듯 대하여 같은 선례를 남기지 않음이 옳을 듯하옵니다.”
단순한 무고범이 아니라 일벌백계 차원에서 거하게 죄를 물리자는 주장이었다.
옛일까지 끌어들일 일은 아니나, 오겸은 그동안 공론에 반하여 의정 대신의 자리를 차지하였으므로 주위에 적이 많은 상태였다.
우의정 박순은 특히나 당대 집권세력이었던 훈구파와는 깊게 척을 진 상태였으므로, 그들 중 잔챙이 생존자인 오겸과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었다.
“흠.”
물론 선조로서도 고작 오언후나, 퇴물이 되어버린 오겸을 위해 공론을 거스를 생각은 없었다.
“좋다. 오언후는…….”
그 순간.
“전하!”
조정 대신들에게는 익숙한 외침이 들려왔다.
오겸이었다.
다급히 열린 정문 사이로 오겸이 숨을 헐떡이며 들어섰다.
“전 좌의정 아니시오.”
선조가 심심하게 반응하자 오겸이 서둘러 말했다.
“신이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하나뿐인 아들을 제대로 기르지 못해, 신이 이미 늙고 쇠하여 과를 공으로 덮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성총을 거듭 어지럽게 하였사옵니다.”
“아.”
선조는 오언후를 슬쩍 바라보았다.
오언후는 자신의 파멸이 코앞까지 다다랐음을 직감했는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툭 치기만 한다면 어전에서 실례라도 할 판.
과연 오겸에게는 개입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아들을 살리고 싶다면.
‘반응이 빠르군.’
오언후의 탄핵성 상소가 언급된 것은 어전회의 초반이다. 그 회의가 늘어진 감이 있지만 아직 회의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찾아온 것이다.
게다가 상황이 오언후에게 안 좋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기라도 한 듯한 이 다급함…….
‘곧 죽어도 의정 대신은 의정 대신이라는 건가?’
선조로서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끄나풀의 존재였다.
뭐, 특별한 건 아니다.
지켜야 할 힘과 세력이 있는 자라면 언제 어디에서든 조정에서 무엇이 논의되는지를 알아야 했다. 좌의정까지 지냈다면 당연히 끄나풀 정도는 심어 두었겠지.
“대감께서도 알고 계셨나 보오. 자제분이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미리 알고 처치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이제야 나선 점 송구스럽사옵니다.”
“전 좌상에게는 미안하지만 일은 이미 벌어졌고 나 역시 막 판결을 내리려던 참이오. 대감께서 끼어드실 상황이 아니외다.”
“……전하.”
선조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끝난 일인데 구차하게 왜 달라붙는 것인지.
하지만 가라 한다고 고이 돌아갈 기세는 아니었다. 선조는 콧바람을 내쉬고는 말했다.
“말씀하시오.”
“죄신의 아들에게……. 오언후에게……. 극형을 내리시옵소서.”
“……?”
선조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주변의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자비를 청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극형을 청하다니. 목숨이 걸린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닌 오겸의 적장자였다.
“아, 아버지!”
오언후로서는 딴에 하나밖에 없는 자식인 자신을 부친이 극형에 처하라 청할 줄은 몰랐는지, 모두의 앞에서 절규했다.
그러나 누구도 오언후에게는 시선도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극형이라니.”
“신이 공론을 거슬러가며 도의에 맞지 않게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를 스스로 인지하면서도 몸가짐을 바르게 하지 못해 오늘날의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을 사직 후에도 지극히 후회하고 있었사옵니다.”
“…….”
“그런데 못난 아들이 사사로운 감정에 휩싸여 나라의 관리를 모함하여 끝내 해를 입히려 들었으니, 만일 죄를 받아야 한다면 신이 받아야 마땅하겠으나, 곧 죽어 없어질 신이 죄를 받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또 일벌백계의 의미도 드러나지 않을 것이옵니다.”
마치 자신의 죄를 자식인 언후에게 전가하는 감도 있었지만, 오겸이 풍기는 분위기는 그와 달랐다.
오언후의 형이 확정된다면 오겸 본인은 저택으로 돌아가 대들보에 목이라도 맬 것 같은 느낌.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언후를 극형에 처하여 본보기로 삼으시옵소서. 그리하신다면 신이 그동안 지은 죄를 조금이라도 갚은 듯하여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나이다…….”
“하지만 언후는 좌상의 유일한 적자가 아닌가?”
“…….”
오겸은 더 무어라 하지 못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픈 손가락은 어디에도 없을진대, 하다못해 하나뿐인 손가락을 스스로 잘라 달라 애원하다니?
예상했던, 살려달라는 구차함과는 다른 상황이 펼쳐졌지만 어쩐지 그것과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아 보였다.
마치 오언후가 극형에 처해지지 않는다면 더 심각한 일이 벌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권철이 손을 썼나?’
선조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권철이 자리에 없는 지금 무엇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오겸을 저리 절박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선조 본인이 아니라면, 권철 정도가 아닐까 싶었다.
“……극형이라.”
본래 선조는 유배 수준에서 끝낼 생각이었다.
언후는 하찮은 인간이라, 죽어 마땅할 죄를 지은 게 아닌 이상 굳이 죽여가며 자신의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로 인해 얻을 악명이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살려두자니 훈구파 잔당에게 끝까지 복수하려는 사림의 여론을 거스르게 될 테고.
신하들 마음이야 알 바 아니었지만 장악력과 충성도가 흔들리는 것은 불쾌한 일이니까.
그런데 오겸의 난입으로 선택은 한층 어려워졌다.
제 자식을 극형에 처하라고는 하지만, 그런다고 ‘그래. 극형에 처하라.’ 라고 할 수는 없잖은가?
반대로 자비를 베푼다면, 사림은 ‘당사자인 아비마저 죽이라며 판을 깔아줬는데 왜 안 죽이나!’하고 씹어댈 것이 분명했다.
‘이럴 때는…….’
선조가 잘하는 것이 있었다.
곤란한 일에 처할 경우, 남에게 선택과 함께 책임까지 떠넘기는 것.
손해 볼 생각은 추호도 없는 선조였다.
게다가 마침 이 상황에서 깊게 연관된 자가 하나 있었다.
“응교.”
“하명하시옵소서.”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언후의 참소를 당한 자는 바로 그대이니, 내 그대의 의견을 듣고 따르겠다.”
“신은…….”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대신들은 이럴 때마다 나오는 선조의 특기가 언짢았는지 딱딱하게 굳은 채였으며, 이들 사이에서 언후는 집 잃은 똥개처럼 처량한 몰골을 한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이 나에게 달려있다는 것은 알지만, 죄를 알아서인지 무거운 분위기를 의식해서인지 감히 천박하게 자비를 구걸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뒤편에는 오겸…….
그는 애처로운 시선을 나에게 보내고 있었다.
내가 대외의 반응을 의식해 언후를 살려줄 수는 있겠지만, 그건 나의 불쾌함을 자극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모아온 자료를 터뜨리기라도 한다면?
‘차라리 언후가 죽어 나의 분이 조금이라도 풀리길 바랄 터다.’
하…….
나는 속으로 짧게 숨을 토해냈다.
오겸은 굴복했다. 이미 끝난 마당이고, 기어코 피를 볼 생각은 없었다.
“신은 언후의 죄가 크다고는 인정하나, 극형을 당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옵니다.”
“응교가 그리 말한다면 내 따라야지.”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신은 자비를 청하고 싶사옵니다.”
“자비?”
“비록 언후가 죄를 저질렀다고는 하나, 단순한 생각과 치기어린 마음에 충동적으로 저지른 죄에 불과하옵니다. 극악한 발상으로 벌인 일이 아니니 다른 참소한 자들을 대하듯 엄벌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 사료되옵니다.”
선조로서는 불쾌한 대답이었다.
사사로이 복수를 행하건, 애써 체면을 차리건 어느 쪽으로도 이순신은 일각에서 욕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를 만족시키기 어려운 상황이니까.
하지만 도리어 자비를 청한다?
분명 누군가는 오겸과 그의 하나뿐인 아들이 파멸을 맞지 못한 것에 분개하겠지만, 다른 이들은 이순신의 자비로움을 칭찬하고 호감을 느낄 터였다.
‘제기랄, 놈의 성격을 생각하면 수상한 대답은 아니지만…….’
혹시라도 이런 흐름을 예상하고서, 정해둔 최상의 답안을 꺼낸 것일까 두려웠다.
언젠가 선조는 지금과 같은 기시감을 느낀 적이 있었다.
…….
…….
…….
“……전하?”
곁에서 우의정 박순이 불렀다.
“무슨 일인가, 우상.”
“감히 재촉할 생각은 아니오나, 오랫동안 말씀이 없으시기에……. 무례를 무릅쓰고도 전하를 부를 수밖에 없었나이다.”
“아.”
선조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후.”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직전처럼 불쾌한 감정에 이어 복잡한 생각이 떠올랐지만, 신하들에게 수상한 모습을 더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선조는 일단 이 자리부터 피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전 좌상의 반성하는 마음과 응교의 자비를 청하는 말의 진심을 내 모르는 바는 아니나, 오언후는 사사로운 감정에 휩싸여 나라의 신하를 참소하고 모함하였으니 중벌에 처하지 않을 수는 없다.”
“…….”
“다만 전 좌의정이 나라를 위해 오랫동안 힘써 일한 공을 감안한다면, 유일한 적자를 죽여 대를 끊는 것은 과한 일이 아니겠는가. 죄인 오언후는 정배(定配, 유배의 일종)하겠다. 형조에서는 배소와 시기를 정하여 계품하라.”
결론을 내린 선조는 다른 말이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서둘러 말을 이었다.
“회의는 이만 파하겠다. 제신들은 물러가 각자의 역할을 다하라.”
선조는 도망치듯 어좌에서 일어나 어전을 빠져나갔다.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오언후는 풀썩 주저앉았고, 오겸은 이순신이 보인 자비가 더 큰 복수를 위한 가식이 아닐지를 두려워했다.